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86화 (86/238)

#86헤드헌팅 (4) - 승승장구

「무전기 다시 켜겠습니다. 상부에 보고를 해야···.」

부하 군인이 바짝 굳은 채로 무전기의 배터리를 분리했다.

원인 불명의 고장으로 꺼져 버린 무전기를 다시 켜려는 것이었다.

퍼억-!

간부가 주먹을 날렸다.

고장난 무전기가 날아가서 땅에 부딪쳤다.

부하는 산산조각이 난 무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 정신 똑바로 차려.」

「예···?」

「이 기운이 안 느껴지나? 저건 최소 S급 균열이야.」

S급이라는 말을 들은 부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균열 입구에 다가가면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무전기가 고장난 것도 저기서 나온 에너지의 파동 때문일 것이다.

「그, 러면···.」

「저걸 발견했다고 보고하는 순간, 우리는 죽은 목숨이라는 거다.」

부하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에 보고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예외 없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일단 균열에 들어가서 사전 조사를 하고 나오라고 말이지.’

상급 각성자 부대가 출동하기 전, 균열의 환경을 살펴볼 선발대가 필요하다는 명목이다.

초중급 수준의 균열이라면 괜찮은 얘기다.

하지만 이건 S급 균열이었다.

그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순찰대 2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었다.

‘상급 부대를 위한 인간 방패로 쓰여지는 것뿐. 알고는 안 당하지.’

「그런데 상위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기가 저희 관할인데··· 균열을 못 발견해도 사형이고, 알면서 일부러 보고를 누락해도 사형 아닙니까?」

부하가 벌벌 떨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본부에서 내려온 간부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진 눈치였다.

「묘수가 하나 있지. 내 지시를 따르겠나?」

「예.」

「일단 저 균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와라. 몇 시간이나 여유가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부하 군인이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그가 완전히 등을 돌린 순간.

푸욱!

부하 군인이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두터운 장검의 칼날이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끄, 끄윽···.」

부하 군인의 숨이 끊어졌다.

스르륵.

간부가 장검을 거두고 피를 털었다.

「멍청한 놈과 함께 갈 수는 없지.」

간부는 부하 군인의 시신을 가볍게 들쳐멨다.

부서진 무전기도 챙겨 들었다.

간부는 시신을 업은 채로 균열 입구로 걸어갔다.

슈우욱.

거대한 균열은 악행의 흔적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간부는 균열 입구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S급 균열 - 황혼의 서리거인]

- 공략 조건 : 서리거인의 왕을 죽인다

- 잔여 시간 : 14일 2시간 21분 0초

「....」

이런 무시무시한 균열에 휘말리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다.

간부는 결심했다.

「최대한 여기서 먼 곳으로 떠나야겠군.」

간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황무지에서 거대한 균열 입구만 요요히 빛났다.

간부는 몰랐지만, 만주 땅 곳곳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중국과 가까운 한반도의 국경 지방.

예민한 각성자들은 묘한 기운을 느꼈다.

먼 곳에서 난 지진을 감지하는 것처럼, 울렁이는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한건우의 길드가 있는 서울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오늘도 그 균열 들어가십니까?”

바쁘게 오가던 금해준이 물었다.

“그렇지.”

그 균열이라는 건 홍대의 미공략 균열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건우는 요즘 그 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육아가 힘드시네요.”

“하하.”

금해준이 농담을 던졌다.

정작 힘든 쪽은 금해준이었다.

길드의 인원이 늘면서, 일도 부쩍 많아졌다.

그전처럼 간단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끝없는 회의에, 결재에···. 금해준은 상당히 피곤해졌다.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눈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을 것이다.

“너야말로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

“하하, 잘 쉬고 있습니다. 다녀오세요!”

금해준이 싹싹하게 인사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신입 행정요원들이 바글바글했다.

“일을 시키려고 사람을 뽑았으면서, 사람을 뽑아서 더 바빠지네요?”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비현이 기둥 뒤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이제 그녀가 길드의 아무 데서나 나타나는 게 익숙했다.

톡 쏘는 듯한 말투도 정이 갔다.

“비현아, 너도 같이 갈래? 안 바쁘면.”

“...네, 좋아요.”

이비현은 수줍은 듯이 로브의 모자를 눌러 썼다.

내심 자기도 가보고 싶던 모양이었다.

하긴 누가 거부하겠는가.

새끼 드래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건 진기한 경험이었다.

한건우가 빌딩 앞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차 사셨어요?”

“회사 차야. 다같이 쓰려고.”

메르세데스 벤츠 G 클래스.

군용 지프처럼 보이는 검은색 차량이었다.

“아···.”

“회사 근처면 좋았을텐데. 봐서 사제 포털이라도 연결할까 생각 중이야.”

홍대 근처의 미공략 균열에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하니.

불법 포털이라도 달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은데요.”

이비현이 조용히 말했다.

한건우는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알파스 길드 쪽은 어떻대?”

한건우가 박이경을 처참히 박살낸 이후, 알파스 길드의 동향이 궁금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해요. 길드 마스터 박이경은 거의 두문불출하는 수준이래요.”

“그래? 충격이 컸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한 달이나 지났는데 계속 그 얘기로 떠들썩하니까요.”

처음에는 그 소식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며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공식 확인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반박이었으나, 곧 기세를 잃었다.

그 소문이 거짓이라면 박이경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박이경이 어디 모욕을 참을 사람인가.

본인이 싸움에서 졌다는 헛소문이 난다면, 상대방과 1대1 격투를 해서라도 소문을 바로잡을 사람이었다.

그런 박이경이 얌전히 지내고 있었다.

시비를 걸고 다니는 일도 그만두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 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거 잘 됐군.”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3위인 알파스 길드가 비실거릴 동안, 한건우의 아레스 길드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그 한 사건만으로 3위와 4위의 자리가 뒤집히지는 않았다.

길드의 역량을 판단할 때 길드 마스터의 개인 무력만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러나 소득이 하나 있었다.

-1년도 되지 않은 신흥 길드가 무슨 4대 길드야.

-S급 한 명 있다고 무조건 대형 길드가 되나?

그런 비웃음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아레스 길드의 위상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다른 길드원들은 어디 갔어요? 건물에 안 보이던데.”

“균열에 들어갔지.”

이비현은 놀랐다.

“또 자기들끼리요?”

“응. 진호가 꽤 믿을 만해.”

한건우는 지난번처럼 임진호에게 리더 자리를 맡겼다.

다만 유사시에 연락할 수 있도록 마수 가죽으로 된 팔찌를 꼭 차게 했다.

“저번처럼 다른 길드가 싸움이라도 건다면···.”

“우리 길드에?”

한건우가 반문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일성이나 환인이 아니라면 대놓고 덤빌 길드은 없을 것이다.

“하긴, 한건우 씨가 있는데···. 누가 그런 일을 하겠어요.”

이비현이 납득했다.

한건우는 방심하지 않고 다른 조치도 더했다.

전에 안면을 익힌 구조대 국장을 만났던 것이다.

국장은 한건우를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오오, 바쁘신 분께서 여기까지 찾아 주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한건우는 반가움을 표한 후 넌지시 불만을 표했다.

-구조대원들이 균열 입구를 지킬 때 말입니다. 매뉴얼을 지키도록 하는 건 현실적으로 많이 어렵겠죠?

-...그 일 때문이군요. 그건 대원들 잘못이 맞습니다.

-잘못까지는 아닙니다만, 신경만 좀 써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길드가 시비를 걸려고 따라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원칙대로 잘 관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재까지는 효과가 있었다.

요새 구조대원들의 기강이 바짝 들어서 뻣뻣하게 군다는 불평까지 들렸으니까.

그들은 미공략 균열의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에 생체인증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어놓았다.

빙하기 균열의 칼날 같은 냉기가 엄습했다.

“어디 있을까요?”

휘익.

한건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펄럭- 펄럭-!

날개 소리가 났다.

공중에서 해츨링이 날고 있었다.

몸의 크기는 표범이나 재규어 정도였다.

“언제 저렇게 컸죠?”

이비현이 황망해했다.

그녀가 해츨링을 마지막으로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한건우의 개인 집무실에서 해츨링을 발견했다.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란 게 엊그제 같았다.

그때는 날개 달린 작은 도마뱀 같았는데, 한 달 사이에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짙은 보라색 비늘에는 윤기가 났고, 4개의 날개를 쫙 펴니 훨씬 커 보였다.

“날이 다르게 큰다니까.”

한건우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쑥쑥 크는 아기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이었다.

“대체 뭘 먹고··· 아.”

이비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핵을 찾지 못한 미공략 균열.

시시때때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고, 몬스터가 리젠되어서 밀려온다.

“먹이가 무한으로 공급되니까.”

한건우는 뿌듯했다.

그때 이 균열을 확보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드래곤 키우기에는 안성맞춤이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해츨링은 아무런 적수가 없는 세상을 마음껏 누렸다.

빙하기 균열의 마수들을 잡아먹으며, 이 공간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특히 해츨링이 가장 좋아하는 건 가시 글리토돈 고기였다.

방금도 고기를 양껏 뜯고 온 모양이었다.

‘이 마수들이 빙룡의 먹이였을 테니까. 아무래도 잘 맞겠지.’

해츨링은 혼종이긴 해도 빙룡의 기운을 많이 받았다.

빙룡의 먹잇감을 주면 잘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쿠웅-!

해츨링이 거칠게 땅 위에 착륙했다.

그 배가 통통했고, 주둥이에는 푸른 마수의 피가 묻어 있었다.

“뀨욱.”

해츨링이 새끼 때처럼 애교 섞인 울음소리를 냈다.

한건우는 해츨링의 목 부분을 쓰다듬었다.

해츨링이 고양이처럼 기분 좋게 갸르릉거렸다.

낯선 광경에 이비현이 몸을 움츠렸다.

“벌써 1차 진화를 한 건 아니죠?”

“그건 아냐. 그러면 훨씬 더 컸겠지.”

지난번 이비현이 블랙마켓에서 수상쩍은 드래곤 도감 같은 걸 구해왔다.

드래곤의 생태가 적힌 책이었다.

드래곤의 엄청난 크기 때문에, 해츨링 상태에서 수백 년간 천천히 자라서 성체가 되는 걸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드래곤의 성장 과정은 독특했다.

해츨링이 1차 진화를 하면 아성체가 된다.

아성체가 2차 진화를 거치면 성체로 변한다.

어느 분기점을 넘기면 계단식으로 쑥쑥 크는 것이다.

“언제쯤 1차 진화를 할까요?”

“글쎄. 마수를 더 다양한 종류로 먹여볼까.”

드래곤의 먹이는 마수라고 도감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영양소가 필요한 게 아닐까.

한정된 종류만 먹여서 성장이 더딘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미 엄청나게 빨리 크고 있는 것 같은걸요.”

이비현이 경이로운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요즘 괜히 쫓기는 것처럼 마음이 급하거든.”

한건우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향후 1, 2년간 지각 변동이 일어날 만한 일은 없었다.

차분하게 세력을 키우며 성장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런데 이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저는···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뭘?”

“만주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요."

이비현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뭐?"

해츨링을 쓰다듬던 한건우의 손이 멈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