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참교육 (11) - 광전사
그 오만한 박이경이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알파스의 길드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나서야 하는 것 아냐?’
‘마스터는 우리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을텐데···.’
박이경은 최상급 각성자 중에서도 유난히 자존심이 셌다.
상황을 잘 모르는데 섣불리 나섰다가 나중에 더 혼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길드에 들어온 네크로맨서는 그런 분위기를 몰랐다.
리더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자 도우려 했다.
크르르르···!
되살아난 마수 시체들이 한건우에게 몰려갔다.
“크으··· 그, 그만.”
박이경이 힘겹게 말했다.
고개를 돌리려고 한 것 같았지만, 미처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자 박이경의 부하 중 한 명이 네크로맨서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두고 물러나.”
“예? 하지만.”
“마스터끼리의 싸움이야.”
“....”
네크로맨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각성자끼리의 싸움에 규칙이라도 있다는 건가?
그러나 알파스 길드원들은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네크로맨서는 하는 수 없이 시체들을 다시 잠재웠다.
스으으···.
풀썩.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건 임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나마 사정을 알 것 같은 차은비에게 물었다.
“뭡니까?”
“저 말이 맞아요. 길드 마스터끼리 싸울 때는 남들이 끼어드는 게 아니에요.”
“네? 왜입니까.”
“과거에 길드끼리 싸울 때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암묵적으로 생겨난 문화예요.”
초창기 1세대 각성자들이 난전을 벌이던 시절.
피의 역사 위에 정해진 규칙이었다.
길드가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 지금, 물리적인 충돌은 흔치 않았다.
그러니 옛 규칙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 수밖에.
“다 옛날 얘기인데···. 박이경 저 인간은 혼자서 과거를 살고 있어서요.”
차은비가 대놓고 박이경을 비웃자, 알파스의 길드원들이 불만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흘깃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차은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박이경 저 인간은 원래 일대일 격투를 좋아해요. 누가 방해하면 싫어할걸요?”
“...?”
임진호는 조금 의아했다.
자신은 한건우가 위험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차은비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차은비가 무신경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차은비 씨는 건우 형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모두 한건우와 박이경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끄으···.”
박이경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신체 강화>를 극한까지 끌어냈다.
투둑, 툭.
압박 속에 그의 모세혈관이 터졌다.
박이경의 얼굴이 시커매졌다.
“꽤 잘 버티는군.”
한건우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래비티 필드>의 중력은 작은 블랙홀을 만들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전륜성왕의 구슬로 마력 강화까지 시켰다.
그걸 견뎌낸 것만으로 대단했다.
‘하급 각성자 같으면 몸이 터져버렸겠지.’
터억.
박이경이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한건우···.”
앞으로 엎어진 박이경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한건우가 전륜성왕의 구슬에서 손을 뗐다.
스으으···.
“허업!”
중력 가중이 약해지자, 박이경의 폐가 가까스로 공기를 들이켰다. 박이경이 숨을 헐떡였다.
“이···.”
박이경이 한건우에게 험한 욕지거리를 뱉었다.
한건우는 얼굴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왜, 부끄럽나? 부하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서?”
뿌드득, 박이경이 이를 갈았다.
“...치사한 놈··· 한번 가까이 와 봐. 손 닿는 거리에선 아무도 날 못 이기니까.”
“그래? 근접전은 자신 있다는 건가?”
한건우가 <그래비티 필드>를 완전히 풀어주었다.
<그래비티 필드>는 MP를 많이 먹는 특성이었다.
어차피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었다.
“!”
박이경이 두 발로 일어섰다.
츠르르- 철컥!
박이경의 양 주먹에 너클 아이템이 나타났다.
미노타우루스의 뿔이 박힌 너클이었다.
괴력을 더해 펀치를 강하게 해주고, 타격 시 일정한 확률로 관통 효과가 있었다.
두두두두-!
박이경이 한건우에게 달려들었다.
코뿔소가 돌진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눈밭이 깊이 패였다.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졌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슈웅-!
박이경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맞아라!’
크게 내지른 오른손은 속임수였다.
한건우가 그걸 피하는 순간, 몸통에 레프트 훅이 들어갈 것이다.
<신체 강화>로 강철보다 단단하고 묵직해진 주먹이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뿔 너클까지 더하니, 그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타앗!
“?”
한건우가 반대쪽으로 돌며 팔을 쳐냈다.
연속 공격을 예측한 것 같았다.
박이경의 주먹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뻔하군.’
회귀 전 한건우는 박이경과 같은 권사 클래스였다.
특수부대 시절, 박이경의 전투 영상을 수도 없이 봤다.
박이경은 권사 클래스의 정점이었으니까.
당시 박이경의 펀치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보였던가.
패턴을 알아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도저히 못 넘을 벽으로 보였는데.’
직접 만나보니 알 수 있었다.
박이경은 이제 한건우보다 한 수 아래였다.
한건우는 슬쩍 웃었다.
그걸 본 박이경은 꼭지가 돌았다.
박이경이 <거인화>를 걸었다.
박이경의 몸이 울퉁불퉁 크게 부풀었다.
마수가 아닌 인간을 상대로 <거인화>를 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보통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정리됐으니까.
치지직!
이번엔 상의를 벗을 시간이 없었다.
가죽 자켓이 갈갈이 찢겨나갔다.
미노타우르스의 뿔 너클은 저절로 크기가 조정되었다.
“허억, 세상에.”
아까보다 한층 더 커진 박이경을 보고, 임수호 형제가 경악했다.
“3.5미터··· 아니 4미터는 되겠어.”
“인간이 아냐···.”
두 형제는 동시에 똑같은 마수를 떠올렸다.
박이경의 모습은 미궁 계열 균열에 나오는 미노타우르스와 꼭 닮았다.
스르릉-
한 발짝 물러난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들었다.
거인이 된 박이경을 보고도 그는 태연했다.
박이경을 이 자리에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박이경과 알파스 길드는 그렇게 없애버릴 장기말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누가 위에 있는지 뼛속까지 알도록 새겨줘야겠군.’
한건우는 박이경이 어떤 부류인지 잘 알았다.
박이경은 수컷의 본능이 뚜렷했다.
다른 이가 자신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다는 걸 깨달으면 꼬리를 내릴 인물이었다.
‘아직 그걸 체감할 기회가 없었겠지만.’
이번 기회에 알려주면 된다.
한건우가 박이경에게 창을 겨누었다.
“크아아-!”
박이경이 괴성을 지르면서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그의 주먹에 지축이 울렸다.
눈발이 몇 미터까지 솟아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어?”
임수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니, 한쪽에서 한건우의 인영이 드러났다.
스릉-
한건우가 몸을 낮추며, 지면과 수평으로 창을 휘둘렀다.
거인화된 박이경의 발목을 노린 것이었다.
까앙-!
창날이 맞은 곳에 스파크가 튀었다.
<신체 강화>가 이뤄진 박이경의 발목은 두꺼운 철근과 같았다.
박이경의 몸은 인간의 한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쉬이익- 터엉!
박이경의 주먹이 연이어 한건우의 창을 막아냈다.
몸집이 커져도 민첩함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폭발적으로 빨랐다.
한건우가 창을 든 채로 뒤로 튕겨났다.
“...건우 형!”
지켜보던 이들이 동요했다.
한건우가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으며 박이경의 전신을 훑었다.
‘골렘을 불러낼까?’
한건우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냥 이기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박이경을 죽이려고 하면 차라리 쉽겠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히 굴복시키기는 어려웠다.
‘몸은 돌처럼 단단하니, 예리한 무기보다 둔기를 써야 해···.’
한건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쿠웅- 쿵!
박이경이 땅을 박차며 뛰어왔다.
스륵.
마창 게이볼그가 사라졌다.
한건우가 창을 아공간 무기집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앗!”
이제껏 팔짱을 끼고 보고 있던 차은비였다.
그녀가 너무 놀라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뭐야?”
한건우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한건우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기가 어렸다.
[특성 발동 : 광전사]
회귀 전 권사 시절에 개화했던 유일한 특성이었다.
광전사 특성의 기전은 단순했다.
심장 박동이 수십 배 이상 빨라지고 전신의 근육이 팽창한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두려움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일정 시간 동안 신체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는 것이다.
‘이 감각이 그리웠어.’
두근, 두근, 쿵- 쿵쿵쿵···.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뇌룡의 심장이 북처럼 거세게 박동했다.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휘이-
한건우가 디딤발을 떼자, 그의 몸이 폭발하듯이 쏘아졌다.
퍼억!
그의 주먹이 박이경의 갈비뼈 아래를 가격했다.
“크헉!”
박이경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의 거대한 몸이 빠르게 옆으로 돌았다.
방어를 위해 거리를 두고자 함이었다.
한건우는 박이경에게 조금도 거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곧바로 박이경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거인화>된 박이경과 한건우는 키 차이가 많이 났다.
위에 있는 박이경은 공격하기는 편했지만, 방어하기는 까다로웠다.
퍼버벅! 퍼억!
한건우의 주먹이 계속해서 박이경의 명치와 옆구리를 가격했다.
박이경은 제대로 가드를 못하고, 연속으로 펀치를 먹었다.
“크아악!”
견디다 못한 박이경이 발차기로 한건우를 밀어내려 했다.
콰직!
한건우는 오히려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중심이 되는 다리를 가격했다.
“···!”
박이경은 하마터면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이 새끼가···.”
박이경은 당황과 분노가 섞인 신음을 토했다.
<거인화>된 자신에게 이렇게 겁 없이 달라붙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거인화를 하면 마수들도 겁을 먹고 꼬리를 마는데···.’
박이경은 이를 악물었다.
서로의 부하들이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야.’
박이경이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한건우가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 같지 않았다.
‘창도 안 쓰고··· 공격 마법도 전혀 안 쓰고 있잖아.’
한건우의 평소 스타일과 다르게, 마치 권사 클래스처럼 싸우고 있었다.
‘설마 이 놈이···?’
한건우가 감히 자기를 봐주고 있는 것일까?
박이경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참을 수 없이 화가 솟아났다.
“건방진 놈!”
휘이-!
박이경은 바위처럼 단단한 팔꿈치를 휘둘렀다.
한건우를 멀리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지금이군.’
박이경이 심리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동작이 단순하고 커진 것이 그 증거였다.
터억!
한건우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차!’
박이경이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건우는 손목을 꺾은 채로, 박이경을 그대로 업어치기로 넘겼다.
박이경이 워 베어에게 걸었던 기술과 똑같았다.
부웅-
박이경의 거대한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넘어갔다.
타아앗! 우르르르···.
박이경의 거구가 볼썽사납게 땅에 떨어졌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한건우가 박이경의 가슴팍 위에 올라탔다.
그가 박이경의 코에 정통으로 주먹을 박아넣었다.
콰직!
“컥!”
코를 둔중한 철퇴로 맞은 듯했다.
박이경의 눈앞에 별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은 박이경에게서 <거인화>가 풀렸다.
스으으···.
박이경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기회를 잡으려 했다.
“크아악!”
박이경이 몸을 뒤집으려고 꿈틀댔다.
그러면서 손가락 끝으로 한건우의 눈을 찌르려 했다.
한건우가 한 손을 높이 들어 벼락을 불러왔다.
[특성 발동 : 인드라의 뇌전]
우르르르릉···.
눈발이 날리는 회색 하늘에 푸른 번개가 번쩍였다.
콰앙-! 파지지직!
박이경의 이마 한가운데에 벼락이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치이이익···.
“마, 마스터!”
박이경의 부하들이 크게 동요했다.
“끄으으···.”
S급 각성자의 육체는 튼튼했다.
박이경은 죽지 않았다.
기절해서 혼수 상태에 빠졌을 뿐.
한건우는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가 무심하게 박이경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움찔했다.
“너희 두목. 잘 챙겨서 나가.”
한건우가 먼저 자리를 떴다.
그의 길드원들도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