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참교육 (7) - 4대 길드
그러나 한건우는 단호하게 요검의 유혹을 뿌리쳤다.
“이런 검은 없어지는 게 나아.”
치잉-!
요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마창 게이볼그의 창끝을 아래로 겨누었다.
방금 보았던 무기 파괴술을 써볼 생각이었다.
[특성 발동 : 검풍]
스으으-.
창끝에 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 이비현이 그를 말렸다.
“잠깐만요, 한건우 씨.”
“음?”
한건우가 그녀를 흘깃 보았다.
여전히 창은 아래로 겨눈 채였다.
“왜 없애려는 거죠?”
“위험한 아이템이라서. 누가 가지게 되면 곤란하고, 내가 쓸 것도 아냐.”
여기까지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스템에는 균형이 있어요. 그 아이템을 파괴해도, 어딘가에 비슷한 아이템이 나타나요.”
“뭐라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비현은 꽤 확신을 갖고 말했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마수가 하나 태어나려면 다른 마수가 죽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니 위험한 물건이라면 차라리 한건우 씨가 보관하고 있으세요.”
“....”
한건우는 고민했다.
그 말을 들으니 파괴하기도 마음에 걸리고, 가지고 있자니 꺼림칙했다.
‘직접 쓰지 않으면 괜찮으려나.’
한건우는 일단 아공간 무기집에 요검 이페탐을 집어넣었다.
스르르···.
상아처럼 흰 검날이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한건우는 검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요검을 집어넣은 한건우는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우선 갇혀있는 여자들이 보였다.
그녀들은 한건우가 두려운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떨고 있었다.
“비현아. 다 데리고 나가 있어. 항구 쪽으로.”
이비현이 창살 앞에 서서 뭐라고 몇 마디 했다.
여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이비현은 대표로 나선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나오겠다며 난리가 날 줄 알았다.
예상 외로 한 명씩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녀들은 한사코 시체에서 눈을 돌리며 말 없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한건우는 거대한 물류창고를 천천히 살폈다.
구석에는 실험 장비들이 있었다.
비커와 플라스크, 가열 장치···.
‘마약을 만드는 장치겠지.’
간단한 장비지만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대부분의 마약은 재료만 구하면 집에서도 만들 수 있으니까.
창고 벽에는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건우가 상자 하나를 창끝으로 쿡 찔렀다.
솨아아···.
붉은색의 결정이 알알이 쏟아져나왔다.
‘레드 스타.’
엄청난 양이었다.
못해도 몇 개국에 수출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완전히 태워서 없애버려야 해.’
이곳은 목격자 없는 무법지대였다.
불이 나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알아도 상관없었다.
잘 됐다며 사건을 묻어 버리기에 급급하겠지.
창고를 나온 한건우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아까 얻은 희귀 아이템, 전륜성왕의 구슬이 잡혔다.
파롸아악!
항구 쪽으로 가던 여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경악한 눈동자에 화염이 비쳤다.
고온의 화염이 한순간에 물류창고를 삼켰다.
시뻘건 불꽃이 혀를 넘실거렸다.
불꽃은 고층 빌딩처럼 드높이 솟구쳤다.
한건우는 창고를 등지고 금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금해준은 냉큼 받았다.
[네, 형님. 이제 돌아오십니까?]
“해준아. 부탁이 있다.”
[뭐든지 말씀하시죠!]
“지금 대마도에 와 있는데···.”
[예? 갑자기 대마도요?]
다른 지방에 간 줄은 알았지만 또 섬에 간 줄은 몰랐다.
‘저번엔 울릉도더니 이번엔 대마도···. 다음은 제주도인가? 아니면 괌? 하와이?’
금해준은 한건우의 기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 지금 대마도 항구로 헬기 하나만 보내줘.”
저 요트를 타고 부산에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다, 이미 야쿠자의 요트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아··· 그럼요!]
금해준이 조금 망설이는 것 같자, 한건우가 덧붙였다.
“이번엔 부서뜨릴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그건 상관 없습니다. 국경 넘는 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대마도면 상관 없겠네요?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금해준이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마정석 헬기의 속도는 시속 500km가 넘었다.
서울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가 400km가 조금 넘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한건우는 요트가 정박되어 있는 항구로 갔다.
여자들이 멍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그때 여자들을 대표해서 한 명이 일어섰다.
그녀가 용기를 내서 다가왔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각성자님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이비현의 통역을 듣고,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비공식적인 활동이었다.
영웅 행세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구한 건 우연일 뿐.
한건우는 이들의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앞으로 조심하시죠. 야쿠자에게 사채를 쓰거나, 얽히게 될 일은 절대 하지 말고.”
이비현이 그 여자에게 한건우의 말을 전달했다.
여자들은 더욱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여자도 있었다.
한건우는 의문이 들어서 이비현에게 물었다.
“내 말 제대로 전한 것 맞아?”
“어··· 사정상 한명 한명 집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하지만, 평안을 기원한다고 했죠.”
한건우는 뭐 어떠랴 싶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헬기를 불렀어. 금방 올 거야. 이 여자들은 배를 태워서 보내면 돼.”
“여자들만 보내는 거죠?”
“그래. 자동 항법장치에 원하는 항구로 목적지 설정해 주면 돼. 얼마 안 걸릴 거야.”
이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먼저 서울로 돌아가세요. 저는 이 사람들이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같이 갔다올게요.”
“뭐? 일본까지 갔다 오겠다고?”
한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만 배를 태워 보내자니 못 미덥긴 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들의 사정 아닌가.
“문제 없어요. 길어도 하루 이틀이면 서울로 돌아올 거예요.”
남의 나라의 본토 국경을 넘나들겠다니···.
어디서든 몸을 숨길 수 있는 이비현이라서 가능한 말이었다.
한건우는 이비현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판단을 존중했다.
“알겠어, 난 먼저 돌아가지. 서울에서 봐.”
돌아서는 한건우를 이비현이 붙잡았다.
“저, 한건우 씨.”
“음?”
“이번에 제 의뢰를 받아주신 덕분에··· 부하들의 복수를 할 수 있었어요. 그 대가로는-.”
한건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건 의뢰가 아닌 걸로 해.”
“네?”
“나도 얻은 게 많거든.”
“그··· 그,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보답할게요.”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을 인도해서 배에 오르는 그녀를 배웅했다.
‘여기 오길 잘했어.’
처음에는 이비현의 사적인 복수로 시작했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점점 커졌다.
엄청난 양의 마약을 없애고, 납치된 여자들도 구했다.
그 원흉이 되는 조직도 뿌리뽑았다.
그냥 놔두었다면 수많은 이들의 인생이 망가졌겠지.
물론 개인적인 소득도 쏠쏠했다.
한건우는 손에 쥔 구슬을 매만졌다.
마력을 증폭하는 희귀한 아이템, 전륜성왕의 구슬.
게다가 <골렘 연성>과 <검풍> 등, 유용한 특성도 얻었다.
‘당장 쓸모는 없지만 어쨌든 전설급 무구도 하나 생겼지.’
한건우는 간만에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신화급 무구가 1개, 전설급 무구가 2개.
한건우의 무기만으로 웬만한 대형 길드를 압살할 정도였다.
거기다 아이템 제작자 장영표가 신들린 듯이 쏟아내는 아이템들···.
보통 길드 같으면 여기서 만족했을 것이다.
‘더 올라가야 해.’
한건우의 길드는 요즘 세간에서 공공연하게 ‘4대 길드’로 거론되고 있었다.
1위 일성.
2위 환인.
3위 알파스.
그리고 신생 길드인 아레스.
사실 전투원 5명의 소형 길드가 쟁쟁한 대형 길드들과 함께 거론되는 게 신기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경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건우는 4위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왕 길드를 만들었으니, 국내에서는 부동의 1위로 자리잡아야 해.’
역전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일성도 환인을 제치고 1위가 되지 않았던가.
물론 일성은 모체인 대기업이 있었고, 특수안보부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았지만.
‘초기 멤버가 완전히 최정예 팀으로 자리잡으면, 전투원 수도 늘려야지.’
돌아가자마자 금해준과 인력 문제를 상의해 봐야겠다고, 한건우는 생각했다.
투두두두···.
푸른 하늘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헬기가 도착한 것이었다.
***
서울 중구 명동 거리.
허공에 찢어진 틈 같은 것이 보였다.
균열 입구였다.
[B급 균열 - 라이칸스로프의 산맥]
- 공략 조건 : 라이칸스로프 왕이 숨기고 있는 수정을 얻는다.
- 잔여 시간 : 25시간 8분 32초
B급 균열이 발생했지만, 길거리는 제법 차분했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균열은 이렇게 대응하면 된다고, 교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였다.
균열 감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
재난 문자도 문제 없이 발송됐다.
정부 구조대도 뒷북을 치지 않고 빠르게 도착했다.
마침 인근에 있는 길드가 공략 신청을 했다.
정부 구조대 대원들은 균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민간인들을 통제하고,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균열은 공략 시간이 꽤 긴 것 같습니다?”
정부 구조대의 막내 대원이 물었다.
“균열 등급이 높으면 대체로 여유시간도 길더라. 수준을 맞춰 주는 건지 뭔지···.”
선임 대원이 대답했다.
한참 기다려야 할 듯해서 벌써 지겨웠다.
“그래도 금방 공략하고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레스가 들어갔으니까··· 아레스 엄청 세지 않습니까.”
“모르지.”
구조대 막내는 유명한 길드원들을 직접 보더니,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들떠 있었다.
“아까 보셨습니까? 은설아 플레이어 그리핀 타고 온 거. 진짜 대박입니다.”
“테이머니까 당연하지.”
선임은 심드렁했다.
“차은비 플레이어는 실물이 훨씬 이쁘고요. 제 친구들 다 차은비 팬인데···.”
막내의 호들갑에 장단 맞춰주기가 피곤했다.
선임 대원은 옛날 생각이 났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저랬던 것 같기도.’
대형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S급, A급···.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상급 각성자들이다.
일터에서 직접 만나면 신기할 수밖에.
하지만 그 기분은 얼마 안 간다.
구조대 일이 힘들어서냐고?
‘아니, 순전히 그놈들 탓이야.’
상급 각성자들은 99.9%의 확률로 또라이니까.
그리고 예외인 0.1%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선임 대원은 막내를 위해 충고했다.
“야. 괜히 나중에 실망이나 하지 마라. 차은비 얼마나 싸가지 없는 줄 알아?”
그때였다.
“으하하핫!”
선임 대원의 뒤에서, 크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대원은 바짝 굳었다.
“선생님, 여기 가까이 오시면 위험···. 엇!”
막내 대원이 펄쩍 뛰었다.
불쑥 다가온 남자는 엄청나게 유명한 거물이었다.
‘알파스의 길드 마스터 박이경!’
선임 대원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S급 각성자인 박이경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였다.
굵은 목에서 이어지는 두툼한 승모근과 어깨 근육이 위협적이었다.
그야말로 온몸이 살인병기였다.
S급 중에서 유일한 권사 클래스.
그러나 사실상 클래스는 무의미했다.
<신체 강화>와 <거인화>.
두 가지 막강한 특성을 가진 박이경은 인간보다 괴물에 가까웠다.
대형 길드 마스터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안 비키냐?”
박이경이 대원들에게 물었다.
“바, 박이경 플레이어 님···. 아시다시피 이 균열은 이미 공략중인 길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박이경 뒤에는 알파스의 길드원들까지 따라왔다.
누가 봐도 균열을 공략하러 온 모양.
대원들은 서로 난감하게 눈을 마주했다.
개인이나 용병대라면 상관 없지만.
한 길드가 먼저 균열 공략 중이면, 다른 길드는 들어가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정부도 질서 유지를 위해서 그걸 권장했다.
구조대는 공략 시간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때만 다른 길드를 입장시켰다.
‘아직 아레스 길드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러나 박이경이 이렇게 나오면 막을 도리는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선임 대원은 박이경의 주먹을 흘끔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맨주먹인데도 글러브를 낀 것처럼 큼직했다.
“저, 규정상··· 억.”
선임 대원은 눈치 없는 막내의 등을 쳤다.
그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길을 비켰다.
“고, 고생 많으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박이경은 당연하다는 듯 성큼 나아갔다.
알파스의 파티원들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