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참교육 (2) - 손님
우우웅-!
포털이 작동되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감각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이고, 온몸이 한 번 오싹해지는 느낌.
기분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로는 몇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그 먼 공간을 한순간에 훌쩍 뛰어넘어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우으으···.
“도착이야.”
가동 소리가 멈추자, 한건우가 이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고양이처럼, 그녀의 어깨가 튕기듯 들썩였다.
안 그런 척하더니 은근히 겁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부산 맞죠? 딴 데로 온 건···.”
“아마 맞을걸?”
한건우가 포털 바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여기는 부산의 블랙마켓이 있는 구포시장 지하였다.
사람들이 장을 보러 찾아오는 시장 아래에, 또다른 시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기다린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금해준이었다.
“어, 해준아.”
[형님, 방금 전화가 안 터지던데요. 별일 없으셨죠?]
“잠깐 포털 안에 있었어.”
[아하, 포털이셨···. 포털요?]
포털을 탔다는 건 서울을 벗어났다는 얘기였다.
“일이 있어서 부산에 왔어.”
[금방 돌아오시는 거죠?]
“오래는 안 걸릴 거야.”
한건우는 이 참에 확실히 정해놓기로 했다.
자기가 자리를 비웠을 때의 역할 분담이었다.
“앞으로 내가 자리를 비우면, 길드 결재는 네가 다 맡아. 그리고 전투에서는 진호가 내 대신이야.”
[임진호 플레이어가요?]
의외라는 듯, 금해준의 목소리가 커졌다.
임진호의 등급 때문이었다.
임진호는 임수호와 나란히 C급이었다.
객관적으로 낮은 등급은 아니지만, 문제는 파티원들이었다.
파티원들이 지나치게 쟁쟁했던 것이다.
파티의 리더가 되면 A급인 은설아와 S급인 차은비를 통솔해야 했다.
최하위 등급의 각성자가 파티 리더가 되는 경우가 있을까?
적어도 금해준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진호가 적임자야.”
한건우의 생각은 확고했다.
임진호는 아직 전략적인 판단력은 부족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직감적인 판단은 뛰어났다.
탱커로서 다른 파티원들을 두루 챙기는 것도 임진호였다.
그에 비하면 임수호는 전형적인 참모 스타일이었다.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약한 편이었다.
은설아는 나이도 나이지만, 마수들을 다루는 데 집중해야 했다.
다른 동료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차은비는 리더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그녀는 완전한 길드원이 아니었다.
중책을 맡길 수는 없었다.
다 떠나서, 파티의 리더는 보통 탱커가 맡는 게 나았다.
‘그게 가장 안정적이니까.’
하이브리드 역할인 한건우가 없다면, 대체자로는 임진호가 최선이었다.
[아하··· 생각해보니 임진호 플레이어가 적임자가 맞네요.]
금해준도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비슷한 결론을 낸 듯했다.
“내가 없다고 해서 마냥 기다릴 필요는 없어. B급 이하 균열이 열리면 공략해도 좋아. 미공략 균열은 나 없이는 들어가지 말고.”
[예, 오늘 하신 말씀은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비현이 다가왔다.
예의상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통화 내용은 대강 들린 모양이었다.
“한건우 씨는 믿을 만한 부하들을 두었군요.”
“너도 그렇지 않아?”
한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솜브라는 예나 지금이나 끈끈한 공동체로 알려져 있었다.
이비현의 부하들도 그녀를 꽤 따르는 것 같았다.
“제 부하들이 저에게 바라는 건 두 가지뿐이었어요. 보호해주거나, 복수해주거나.”
부하들이 힘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왔다는 소리였다.
이비현은 종종 지나치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한건우가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제대로 복수해주면 되겠군.”
“....”
한건우는 앞장서서 부산의 블랙마켓을 둘러보았다.
같은 지하공간이어도, 서울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렇게 대놓고 장사해도 되나 할 정도로.
작은 마수를 새장에 넣고 파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이계의 약초를 말려서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곳도 있었다.
심지어 분식, 꼬치구이 같은 길거리 음식까지 팔았다.
“어디 가는데요? 물건은 다 똑같다.”
“아가씨. 뭐 보러 왔어요?”
“다 아는데. 적당치 합시다.”
아침부터 호객이나 흥정도 활발했다.
‘어디였더라?’
한건우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찾았다.’
한건우는 모퉁이에서 상호 없는 가게를 발견했다.
“여긴 왜요?”
“미리 알아봐야지.”
매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전화기와 모니터만 몇 대 있고, 소파와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곳은 블랙마켓의 중개소였다.
하는 일은 여러 가지였다.
미등록자나 범죄자들이 찾는 물건을 구해주거나, 거래를 성사시키는 게 주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뭘 찾으러 오셨습니까?”
중개소 사장이 유들유들하게 인사하며 나왔다.
사장은 꽤 젊었고, 자세히 보니 낯이 익었다.
‘황 사장이 이때부터 일했구나.’
한건우는 평범한 손님 행세를 했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네, 얼마든지 말씀하십쇼.”
황 사장이 사람 좋게 웃었다.
한건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게··· 솜브라라는 조직에 있는 미등록자입니다. 부산에 와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비현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솜브라요? <그림자 사신>이 있다는 그 조직 말씀이시죠?”
“대충 맞는 것 같네요.”
한건우는 피식 웃었다.
원래는 <그림자 왕>이었는데, 언제 저런 이름이 붙은 건지.
“손님. 찾는 분이 <그림자 사신>인가요? 그러면 죄송하지만 의뢰 못 받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아··· 아닙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건지.
한건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의뢰서를 뽑겠습니다.”
황 사장은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가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황망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이런··· 손님, 한 발 늦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죠?”
“으음···.”
황 사장이 시간을 끌었다.
한건우가 지폐 몇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정보비용에 대한 선금이었다.
그러자 황 사장은 술술 입을 열었다.
“오사카에서 세력이 큰 야쿠자가 있습니다. 그 중 간부급 각성자와 부하 몇 명이 부산에 넘어와 있죠.”
“···야쿠자?”
뜬금없는 단어였다.
한건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일본에서 야쿠자는 그냥 조직폭력배였다.
균열 발생 이후 각성자들을 빠르게 끌어들이면서, 세력이 점점 커졌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민들을 괴롭히는 범죄 조직일 뿐이었다.
“얼마 전 그들이 솜브라에 동맹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하죠. 그러고 나서···.”
한건우는 이비현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한건우는 당황한 척했다.
<거짓 간파>를 발동한 건 물론이었다.
“지난밤에 그들이 부산에 있는 솜브라 조직원들을 습격했답니다. 대장도 이미 죽었다고 하고요.”
한건우는 처음에 솜브라의 대장인 척하던 근육질 부관을 떠올렸다.
외부에는 아직도 그렇게 알려져있던 모양이다.
“손님께서 찾는 분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생사 무관하고 찾으신다면야···.”
“그건 됐습니다.”
어차피 찾는 사람 같은 건 없었다.
이비현의 부하들을 죽인 게 누군지 찾으려 했을 뿐.
단순히 미등록자 조직 사이의 세력 다툼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스케일이 컸다.
‘은신처를 뺏으러 온 게 아니라면, 거기 가봤자 소용없겠군.’
놈들의 거점을 쳐야 했다.
한건우는 잔금을 마저 얹어놓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 야쿠자들은 어디서 지내고 있습니까?”
**
중개소를 나와서,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물었다.
“야쿠자 얘기. 너도 알았던 거야?”
“네. 혈맹 요청이 왔다고 해서 거절하라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됐을 줄은···.”
이비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몹시 후회되었다.
자신이 안이하게 대처해서 부하들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건우는 뭔가 더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동맹을 거절했다고 죽이기까지?’
이비현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한참 있다가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 그 중개상요, 더 추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심스러워서 그래?”
“네. 아무래도···.”
“놔 둬. 믿을 만한 것 같으니까.”
“....”
납득은 안 되었지만, 이비현은 한건우의 결정이 틀리는 걸 본 적 없었다.
그녀는 두 말 하지 않고 물러났다.
한건우도 황 사장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혼자서 10년 넘게 블랙마켓의 중개상을 하면서, 칼침 안 맞고 제자리를 지켰다.
‘적어도 뒤통수는 안 친다는 소리지.’
굳이 황 사장을 족칠 필요는 없었다.
목표는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손님,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 일본인들, 웬만하면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황 사장이 그답지 않게 오지랖을 부리는 걸 보니, 상당히 악질적인 놈들 같았다.
한건우는 황 사장이 알려준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는 고급 요트가 여러 척 줄지어 묶여 있었다.
이비현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는 상관없지만, 한건우 씨.”
“왜?”
“외국 조직이 관계된 거라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으니까···. 한건우 씨는 조심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
한건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가 걱정되니 빠지라는 소리야?’
한건우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꼭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이비현.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네.”
한건우는 선착장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위, 그림 같은 고급 요트가 한 척 떠 있었다.
척 봐도 굉장히 비싸 보였고, 수십 명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일본에서 온 야쿠자들은 바로 저 요트 안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오히려 잘 됐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남의 눈을 피하는 데는 제격이었다.
한건우는 선착장을 둘러모았다.
두 사람이 탈 만한 작은 모터보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면 되겠군.”
“네?”
몸이 근질거렸지만, 아직은 일렀다.
해가 지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기다려야 했다.
*
밤이 되자, 항구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한건우는 이비현과 함께 낮에 찍어둔 모터보트에 올라탔다.
시동 장치를 살펴보았다.
열쇠를 꽂아서 작동하는 전자식이었다.
탁!
한건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빛을 띄는 전류가 모터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인드라의 뇌전>이었다.
모터 보트에 시동을 걸면 엄청난 소음이 나기 마련.
그러나 밤바다는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특성 발동 : 침묵]
-접촉한 사물의 소리를 없앨 수 있다.
유적 사냥꾼의 리더가 쓰던 특성이었다.
이비현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
모터보트가 검푸른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유령이 탄 배처럼 조용했다.
‘생각보다 항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네.’
이비현은 육지를 돌아보았다.
낮에 본 것보다 훨씬 먼 것 같았다.
대형 요트가 점점 가까워졌다.
요트의 선체에 딱 붙어서, 한건우는 모터의 시동을 껐다.
이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렸다.
한건우는 요트 선체에 손을 갖다댔다.
<진동 감지>로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
‘말소리는 거의 안 들리는군. 보초는 없나?’
아무래도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고립된 만큼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철저하게 보초를 세울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꾸르륵, 꾸륵···.
모터보트를 둘러싼 바닷물에 묘한 기류가 생겼다.
한건우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돌면서 솟아올랐다.
꿀럭, 꿀럭.
바닷물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용솟음쳐 일어났다.
물기둥에서 팔과 다리가 생겨나고, 입을 벌렸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었다.
‘물 골렘?’
소환사가 있는 것 같았다.
꾸르르르르···..
꾸르륵···.
해수면에서 수십 개의 물 골렘이 일어났다.
조그만 모터보트가 휘청였다.
‘이런.’
보이는 사방은 바닷물이었다.
물 골렘의 재료가 무한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쉬익!
이비현이 시미터를 휘둘렀다.
그러나 맹독의 칼날은 물 골렘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다.
그르러러···.
물 골렘들이 입을 벌리고, 한건우와 이비현을 덮쳤다.
한건우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특성 발동 : 쇼크 웨이브]
-마력 파동으로 충격파를 만든다.
파아악!
차아아아···.
무수한 물방울이 흩날렸다.
물 골렘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수면에서는 아까보다 더 많은 물 골렘이 솟아났다.
“헉···.”
긴장한 이비현이 숨을 삼켰다.
“손님이 오셨군요.”
위쪽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놋쇠 그릇을 긁는 듯했다.
요트의 높은 갑판 위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한건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