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참교육 (1)
“뭘 그리 두려워하나?”
태일제는 원유선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조짐이 뭔지, 태일제도 알고 있었다.
최근 중국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특수안보부도 그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최근의 서울지부장 인사가 그 증거였다.
특수안보부에서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인, <광휘의 성기사> 김도경.
중국에 파견 나가있던 그가 갑자기 복귀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파격 승진까지 하면서.
‘그놈들, 뭔가를 대비하고 있어.’
태일제는 그렇게 판단했다.
미래가 두렵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충분히 분석해서 맞서면 되니까.
원유선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태 사장, 이거 하나만 묻자. 일성에도 예지 능력자 있지? 아니, 있었지?”
“...!”
태일제의 얼굴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했다.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원유선은 그의 태도를 보고 알아차렸다.
‘그 말이 맞았어. 예지 능력은 무력화된 거야....’
예지시나 미래시 등, 미래를 아는 특성을 가진 각성자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은 각성자 중에서도 매우 희귀했다.
한 나라에 몇 명이 나올까말까 했다.
각국 정부나 부호들, 대형 길드들은 늘 예언 능력자를 구했다.
낮은 등급이어도 좋으니 큰 돈을 내걸면서 제 곁에 두려고 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미래를 엿보고 싶었으니까.
사실 예지 특성의 한계는 뚜렷했다.
자유자재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 것을 다 얘기하려 하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 환인 길드에서 데리고 있던 예지 능력자가 고백했다.
-더 이상 안 보입니다.... 어느 날 예지시가 완전히 엉키더니, 그 후로는 전혀 안 돼요. 잠시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안 고쳐집니다.
원유선은 그를 의심하고, 심문했다.
다른 조직에서 스카웃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몰래 계약을 파기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고.
그가 억울해하며 호소했다.
-정말입니다! 저, 그리고··· 다른 예지 능력자들도 저와 똑같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원유선은 오늘 태일제를 만나면 이걸 떠보려고 했다.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일성 길드도 마찬가지지? 그 능력이 없어진 때가 올해 2월 아니야?”
“대답할 수 없네.”
태일제는 딱 잘랐다.
그들은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순수한 친구는 아니었다.
우정 비슷한 감정은 있었다.
그러나 길드의 이해타산이 먼저였다.
서로 그걸 잘 알았다.
“어휴. 피도 눈물도 없는 영감···.”
원유선이 투덜거렸다.
태일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태일제와 원유선은 1세대 각성자가 아닌가.
그야말로 천지가 뒤집히는 걸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위기와 난관을 뚫고 이 자리까지 왔다.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기만 한다면.
그러나 한 가지 미심쩍은 사실이 태일제를 계속 괴롭혔다.
원유선의 말처럼, 올 2월에 예지 능력자들이 힘을 잃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바로 한건우가 자연 각성한 무렵과 일치했다.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는 그 젊은 각성자와.
‘우연일까?’
태일제가 산 아래 도심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한건우의 길드 건물이 우뚝 서서 빛나고 있었다.
**
“한건우 씨.”
이비현은 대뜸 한건우를 부르더니, 한참 말이 없었다.
“말 해.”
“저도··· 한건우 씨에게, 어··· 의뢰를 드릴 수 있나요?”
그녀가 간절한 눈으로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뜻밖의 이야기에 한건우가 반문했다.
“의뢰?”
“네. 제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서요. 물론 대가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이비현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네가 해결 못하는 일이 있다고?”
한건우는 도리어 흥미가 생겼다.
요즘 솜브라의 사정을 한건우도 잘 알고 있었다.
솜브라의 조직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전에 없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다른 미등록자 조직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과거에도 흔했고, 현재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
조직들 간의 구역 싸움이었다.
그런 무모한 도전은 금방 정리되었다.
솜브라의 조직원을 건드린 자는,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습격을 받곤 했다.
물론 이비현이 처리한 것이었다.
<그림자 맹시>는 본래 암살자를 위한 특성이었다.
그녀가 불시에 습격했을 때, 일대일 상황에서 당해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비현이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부탁하는 이유가 뭘까.
“저희 부산 출장소가 적에게 습격당해서··· 점거된 것 같아요.”
“부산?”
정보 조직은 대부분 부산이나 인천에 출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포털을 타면 전국을 금방 이동할 수 있다지만, 규모가 커지면 지방 출장소가 필요했다.
“네. 저희 부관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있었는데, 모두 죽었어요.”
이비현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부관이라면 한건우도 아는 자였다.
맨 처음 솜브라를 찾아갔을 때, 리더인 척 속이던 덩치 큰 남자였다.
이비현이 솜브라의 리더라는 건 아직도 대외비였다.
아마 부산 출장소에서도 그 부관이 리더를 자처했을 것이다.
“그럼 상대방은 자신들이 솜브라를 먹었다고 생각하고 있겠군.”
“아마도요.”
“누군지는 알아?”
“아니오, 마음에 걸리는 조직이 한둘이 아니고, 부하들이 모두 동시에 사망하는 바람에···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부산 출장소에 믿을 만한 부하들을 보내면서, 이비현은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대상을 지정할 수 있는 마석 팔찌였다.
부하들의 남은 생명력에 따라 마석의 색이 변하도록 되어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건 바로 오늘 새벽.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섯 개의 마석이 연이어 부서져버렸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비현은 뼈아프게 확신했다.
‘습격이야.’
정부가 단속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다른 미등록자 조직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미등록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었다.
정부의 눈을 피해 은신처를 마련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조직은 손쉬운 방법으로 은신처를 구했다.
바로 다른 조직의 은신처를 습격해서 점거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약한 조직이 피해자가 되었다.
평소에는 조직에 문제가 있을 때 이비현 혼자서 해결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들이 아닌데.’
죽은 부하들은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각성자 다섯 명이 연이어 죽은 것도 아니고 한번에 죽었다.
훨씬 강한 각성자가 온 것이 분명했다.
적이 누군지, 몇 명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녀는 한건우에게 뛰어왔다.
한건우는 지금 그녀가 아는 가장 강한 플레이어였으니까.
“좋아, 당장 출발할 수 있지?”
“네? 그럼요.”
이비현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가 이렇게 선뜻 나서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어. 대가는 받을 테니까.”
“그건··· 당연하죠.”
한건우와 그녀는 항상 비즈니스 관계였다.
공짜로 일을 맡기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에는 역할이 반대가 됐지만.
어쨌든 차이는 없었다.
한건우는 그녀와 함께 길드의 비품 창고로 내려갔다.
-삐익.
길드원만 열 수 있는 생체 인증으로 잠금을 열고 들어갔다.
이곳에는 전투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각종 아이템과 무기, 포션과 스킬 주문서···.
“와···.”
창고만 봐도 길드의 엄청난 자본력이 느껴졌다.
이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솜브라랑은 도저히 비교가 안 돼···.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구나.’
한건우는 아머 수트를 입고, 그 위에 로브를 걸쳤다.
아머 수트 위에 로브를 입었더니, 안 그래도 큰 덩치가 두 배는 커 보였다.
신원을 숨기기 위해 검은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날카로운 눈만 내놓고 전신이 가려졌다.
‘자동 회복이 있지만, 가끔 더 빠른 회복이 필요해.’
한건우는 MP와 HP를 회복하는 포션 몇 개를 챙겼다.
총기 아이템인 <데스 트루퍼>에 들어가는 마력 탄창도 챙겼다.
아공간 무기집이 차곡차곡 찼다.
스킬 주문서는 챙기지 않았다.
어느새 상당수의 특성이 개화했다. 웬만한 스킬 주문서는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난번 특수안보부의 비밀 연구소를 덮칠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특성도 안 드러내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정부가 현장을 조사할 게 뻔했으니까.
‘이번엔 굳이 특성을 숨길 필요가 없어.’
게다가 상대편 역시 미등록자일 것이다.
미등록자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아무래도···.
‘죽여도 정부에 추적되지 않는다.’
한건우가 뭔가 조그만 물건을 집어서 이비현에게 건넸다.
이비현은 엉겹결에 그걸 받았다.
“이건 네가 써.”
“...?”
새끼손가락만한 유리병이었다.
살짝 은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바실리스크 독니에서 뽑은 맹독이야.”
“아···.”
이비현은 고장난 것처럼 굳었다.
그녀는 남에게 뭘 받는 게 낯설었다.
“네 시미터를 강화하는 데 쓰라고.”
이비현이 못 알아들은 줄 알고, 한건우가 덧붙였다.
이비현의 주 무기는 맹독 시미터였다.
바실리스크의 맹독으로 강화한다면 훨씬 강력해질 것이다.
한건우는 창고 문을 닫고 걸어갔다.
이비현은 고맙다고 할 타이밍을 놓치고, 다급히 그를 뒤따라갔다.
한건우는 로브에 달린 두건을 깊이 눌러썼다.
이비현과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공식 포털을 탈 수는 없었다.
“동묘로 가야겠군.”
“네.”
그들은 동묘의 블랙마켓으로 향했다.
블랙마켓의 불법 포털을 타기 위해서였다.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물었다.
“유영원 대장은 안 가나?”
“같이 가고 싶어하셨는데, 제가 본진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어요.”
“같이 움직이지 않는군.”
“둘 다 죽으면 곤란하니까요.”
암흑 균열에서 둘 다 죽을 뻔한 후부터, 이비현은 그런 원칙을 세웠다.
그들은 솜브라라는 조직의 기둥이었다.
유영원과 이비현이 동시에 죽거나 다치는 일은 최대한 피했다.
그러면 그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위험해질 테니까.
똑똑.
한건우가 블랙마켓 상가의 낡은 유리창을 두드렸다.
겉보기에는 시장 안의 작은 경비실처럼 생긴 곳이었다.
그곳이 바로 불법 포털이 있는 창구였다.
“....”
작은 유리창이 말없이 열렸다.
의례적인 인사조차 없었다.
이비현이 나섰다.
“부산, 두 명.”
“....”
낡은 트레이가 튀어나왔다.
현금을 내라는 뜻이었다.
공식 포털이라면 각성자 등록증이나 신분증 제출은 물론이고, 이동 목적까지 물어보았다.
물론 여기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비현이 미리 세어 놓은 현금 다발을 올렸다.
가격은 합법 포털보다 더 비쌌다.
드르륵!
트레이가 재빨리 들어갔다.
현금을 세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세요. 바로 가동합니다.]
그들은 창구 옆에 붙은 낡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
허공에 균열 입구처럼 보이는 게 보였다.
바로 포털이었다.
‘인공 균열과 같은 원리라고 하던가?’
균열이 이세계와 지구를 연결하는 것처럼, 포털은 멀리 떨어진 공간 사이를 연결했다.
초기에는 안전성을 못 믿겠다며 절대 안 타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는 포털 없는 생활은 상상도 못 하게 되지만.
한건우는 무심코 이비현을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은근히 긴장한 눈치였다.
처음 타는 것도 아니면서. 내심 이런 걸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때만 해도 포털 관련해서 이상한 루머가 많았지?’
포털을 탔다가 팔다리가 분리되어서 서로 다른 도시로 간 사람이 있다느니.
이계로 실종된 사람이 있다느니···.
포털에 관한 괴담이 판을 쳤다.
물론 모두 헛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 들어가서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사고 나면 100퍼센트 사망이니까.”
“...!”
한건우는 바짝 굳어버린 이비현을 붙잡고 포털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