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바실리스크 광산 (4) - 신흥 강자
콰아앙-!
쿠르르르···.
눈먼 바실리스크가 거세게 요동쳤다.
거대한 몸통과 꼬리가 동굴 벽에 부딪치며 진동을 만들어냈다.
겁먹은 사람은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최후의 몸부림이었으니까.
승기를 잡은 건 한건우의 파티 쪽이었다.
슈우- 치잉-!
한건우는 창으로 바실리스크를 난자했다.
일부러 치명상은 입히지 않았다.
‘파티원들 경험치를 좀 먹여줘야지.’
이미 자신의 유효타가 너무 많았기에, 조금 조절하려고 했다.
콰지익-!
드드드···.
길드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바실리스크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차은비는 후방에 물러나서 길드원들을 한 눈에 보면서, 깎이는 HP를 보조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퍼억! 퍽!
특히 부서진 방패를 던져버리고 메이스를 잡은 임진호가 활약하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돌 같은 피부는 칼 같은 예기에는 강하지만, 둔기로 박살내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까앙!
강철 메이스가 바실리스크의 앞발을 내리쳐 부쉈다.
한건우는 임진호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근력이 상당히 올라왔군.’
타고나길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인 임진호였다.
체력과 근력 위주로 스탯을 올리게 한 보람이 있었다.
비록 민첩과 마력은 부족하지만.
그 정도 불균형은 괜찮았다.
‘뚜렷한 단점이 없는 플레이어는 장점도 없기 마련.’
플레이어 세계에서는 그게 상식이었다.
거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통하는 말이었다.
한건우를 제외한다면.
슈우우- 챠악!
그리핀은 한 줄기 화살처럼 낙하했다.
바실리스크가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머리를 부술 듯이 돌격했다.
인공 균열에서 몇 번이나 연습한 그 낙하 공격이었다.
“잘하네.”
한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응원의 말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임수호가 잠잠해진 듯했다.
임수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들고 동굴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
한건우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엄청나게 큰 종유석이 매달려 있었다.
수만 년의 역사가 쌓여서 만들어졌을 법한 크기였다.
그는 임수호가 뭘 하려는지 바로 깨달았다.
한건우가 차은비에게 지시했다.
“차은비 씨. 광역 힐은 접고 수호 MP만 보조해요.”
“네.”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차은비는 손쉽게 대상을 전환했다.
그녀가 임수호에게 MP 회복을 실시간으로 퍼부었다.
“헉.”
놀란 임수호의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마치 뛰고 있는데 등 뒤에서 돌풍이 밀어주는 느낌.
벅찰 정도였다.
트드드···.
임수호가 동굴 천장에 만들고 있던 얼음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는 가장 크고 날카로운 종유석을 얼음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동굴 천장에 거대한 고드름이 만들어졌다.
그냥 허공의 수분으로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컸다.
부피가 점점 커졌고,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져 꽂힐 듯 위태로웠다.
위이잉-!
한건우는 창을 휘둘러서 바실리스크가 꼼짝 못하도록 몰아갔다.
드드드- 쩌억!
수만 년을 묵은 종유석이 얼음의 창이 되어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한건우는 거기에 위력을 더했다.
‘수호가 이왕 힘들게 준비한 건데.’
치명타로 만들어 줘야겠지.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일정한 공간의 중력을 가중한다.
슈웅- 콰아아-!
자유낙하에 중력 가중까지.
유성이 떨어져 바닥에 박히듯이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
한건우 말고는 아무도 그 궤적을 눈으로 쫓아가지 못했다.
키이이잇!
옆으로 쓰러진 바실리스크가 괴성을 질렀다.
만신창이가 된 바실리스크의 몸은 거대한 얼음의 창에 꼬치구이처럼 꿰뚫린 채였다.
키이익, 키익.
한때는 균열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을 앞둔 사냥감일 뿐이었다.
한건우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킬은 누가 따도 상관없는데.’
경험치는 마수의 HP를 깎은 기여도에 나누어서 분배되니까.
그러나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한건우는 창을 고쳐잡았다.
뚜벅뚜벅, 바실리스크에게 다가갔다.
슈우우- 차악!
한건우의 검은 창날이 허공을 갈랐다.
투웅.
바실리스크의 목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베인 자리에서 푸른 피가 흘러나왔다.
마창 게이볼그를 아래로 들고 선 한건우는 마치 사신 같았다.
한건우의 창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옆으로 누운 바실리스크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넣고, 죽 깊이 베어냈다.
‘마정석을 꺼내려는 건가?’
차은비는 그렇게 추측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다.
A급 마정석인 심장을 안 챙길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마정석을 꺼내고 나서도 한건우는 멈추지 않았다.
창으로 바실리스크의 뱃가죽을 쑤시고 뒤적이자, 길드원들은 당황했다.
“거, 건우 형?”
임수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건우를 불렀다.
한건우는 바실리스크의 갈라진 뱃가죽 속에 주먹을 쑥 집어넣었다.
“허억.”
징그러운 것에는 웬만큼 면역이 된 임수호였다.
그에게도 한건우의 기이한 행동은 조금 충격이었다.
한건우는 바실리스크의 뱃속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움켜쥐고 쑥 꺼냈다.
점액질에 뒤덮여 있었지만, 매끈한 흑진주 같은 구슬이었다.
이것이 바로 미공략 균열의 핵이었다.
바실리스크가 뱃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부수면, 이 균열에서는 더이상 마수 리스폰이 일어나지 않는다.
몬스터 웨이브도 끊긴다.
더이상 ‘균열’이 아닌, 평범한 이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핵은, 그나마 찾기 쉬운 편이었다.
“뭐예요?”
가까이 다가온 차은비가 물었다.
한건우는 대답 없이 핵을 동굴 바닥에 내려놓았다.
콰직!
마창 게이볼그의 창날이 핵에 정통으로 박혔다.
부서진 핵은 검은 연기가 되어 흩날렸다.
차은비의 눈이 커졌다.
“이게··· 핵이었군요.”
“맞습니다.”
차은비는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궁금한 게 많은 눈이었다.
어떻게 한건우는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행동하는 걸까?
‘참 알 수 없는 남자야.’
차은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
길드가 완전체 파티로 나간 첫 균열.
목표를 깔끔하게 달성했다.
다친 사람도 없었다.
장비만 좀 부서졌을 뿐.
계속된 전투로 지쳤지만, 모두 밝은 얼굴이었다.
“돌아가면 난리 나겠네, 안 그래?”
“그러게.”
임진호는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전국에 수십 개 존재한다는 미공략 균열.
그 중 하나가 파훼됐다는 건 국가적으로 굉장한 소식이었다.
이 근처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만세를 부를 것이다.
게다가 길드가 얻는 건 명예뿐만은 아니었다.
“이 마석 광산이 앞으로 우리 길드 거라니···.”
길드 명의로 미공략 균열을 파훼하면, 그 길드가 우선적으로 관리권을 가졌다.
임수호는 동굴 벽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오색으로 빛나는 마석 원석이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매니저 님이 좋아하겠군.”
한건우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균열 벽을 유심히 살폈다.
그가 찾는 것은 마석이 아니었다.
‘빙하기 균열에서 본 것 같은 이계 유적지는 없나?’
빙룡이 지키고 있던 고대의 무덤 같던 유적.
거기서 희귀 아이템인 <예언 석판>을 얻었다.
아직도 그 정체는 몰랐다.
여기도 그런 게 있나 하고 샅샅이 살펴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그전처럼 숨겨져 있을지도.’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마석을 채굴하면 채굴팀이 이 동굴을 온통 헤집어놓을 테니.
뭔가 있다면 그때 발견되고도 남겠지.
‘특이사항이 있으면 절대 건드리지 말고 보고하라고 해야겠군.’
균열을 나가는 출구가 보였다.
한건우는 미뤄놓았던 메시지 창을 켰다.
[맹독 바실리스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670]
[코볼트 주술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55(x3)]
[코볼트 주술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50(x7)]
···
[코볼트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30(x39)]
[코볼트 전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25(x17)]
···
[코볼트 투석병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25(x6)]
[코볼트 투석병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5(x8)]
···
[코볼트 노예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10(x7)]
···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다른 길드원들도 메시지 창을 확인하고 있는데, 은설아만 멀뚱멀뚱 서 있었다.
한건우는 은설아를 손짓해서 불렀다.
“설아야, 이리 와.”
“네.”
은설아가 쪼르르 달려왔다.
이번이 처음이니까 잘 알려줘야 했다.
“메시지 창을 켜서 경험치를 확인해 봐.”
“네··· 앗!”
은설아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주르륵 이어지는 메시지 창을 본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킬에 기여한 마수는 다 표시되었다.
경험치는 더 적겠지만, 메시지 개수 자체는 한건우와 비슷할 것이다.
“이제 경험치는 전부 스탯 점수로 바꿔.”
“네!”
한건우는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은설아의 스탯 창이라면 다 외우고 있었다.
‘체력이 70, 근력이 40, 민첩이 59···.’
은설아의 신체적 스탯은 이 정도였다.
A급 각성자지만 신체 스탯은 별로 높지 않았다.
‘마력이 177. 각성 때부터 마력은 타고났고.’
드루이드 클래스, 즉 테이머에게 적합하게 키우려고 했다.
이 다음에는 뭘 올리면 된다고 지시해 주려는 참이었다.
“저, 그런데 이건 언제 키워요?”
“뭐?”
“친화력이요.”
한건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친화력이라니?”
“체력, 근력, 민첩, 마력 밑에 친화력요.”
“?”
한건우는 말문이 막혔다.
플레이어는 오직 자기 자신의 스탯창만 볼 수 있었다.
그게 이렇게 답답한 건 처음이었다.
한건우가 부하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안 물을 수 없었다.
“...그거 정말이야?”
“네.”
“....”
은설아가 괜히 거짓말을 할 아이는 아니었다.
더욱이 농담 같지도 않았다.
각성자들이 재미 삼아 얘기하던 소문이 떠올랐다.
-테이머는 보통 각성자와 다르대. 숨겨진 스탯이 하나 더 있다잖아.
누가 처음 말했는지는 몰라도, 아무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헛소리였다.
테이머도 마력을 바탕으로 테이밍을 한다는 게 상식이었으니까.
‘친화력이라.’
미지의 스탯.
이름을 볼 때 마수와 관계가 있는 능력으로 보였다.
“설아야. 그 친화력이 지금 몇이야?”
“39요.”
“음···.”
은설아의 스탯 중에 가장 낮은 수치였다.
한건우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은설아가 얻은 스탯 점수의 반절을, 새로운 스탯에 몰아보기로.
‘뭐가 달라지나 보자.’
일종의 실험이었다.
**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위.
여름 밤바람이 진한 숲 내음을 몰고 왔다.
균열 발생 이후, 등산이나 캠핑 같은 스포츠는 거의 사라졌다.
그 덕분일까.
문명이 생겨나기 전의 울창한 자연림이 회복되어 있었다.
소수의 재벌들만이 각성자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그런 자연을 누리곤 했다.
산 정상의 바위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흔히 말하는 재벌은 아니었다.
재벌보다 더 부유하고, 훨씬 강력한 사람들이었다.
타앗!
바둑판 위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자네 실력이 예전같지 않군.”
대한민국 1위 길드 <일성>의 길드 마스터, 태일제였다.
“이 영감이 남의 깊은 생각을 뭘 안다고.”
장난스럽게 받아친 사람은 원유선.
길드 서열 2위 <환인>의 길드 마스터였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으나, 태일제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거대 길드를 움직이는 S급 각성자 두 명의 회동.
그러나 그들은 한가롭게 바둑을 두기만 했다.
“원 대표, 자네도 머리가 다 굳었군.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네.”
“태 사장이 먼저 은퇴하면 따라가려고.”
태일제는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은 평범한 필부 같았다.
일성과 환인은 과거 1, 2위를 다투었던 사이였다.
길드 간의 경쟁은 아직도 치열했다.
흑색선전을 하기도 하고, 서로 사업을 방해하는 건 기본이었다.
세간에서 그들은 철천지 원수이자 앙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사실 사적으로 친하다는 사실은, 소속 길드원들도 잘 몰랐다.
둘이 대화할 때는 수행원도 곁에 두지 않았다.
“태 사장. 그 친구 얘기 들었어?”
“어떤 걸 말하나. 요새 시끄러운 일이 한둘이어야지.”
태일제가 점잔을 빼자, 원유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알잖아, 그 어린 친구. 이름이 한건우던가.”
“조금은 알지.”
태일제는 한건우의 길드를 떠올렸다.
길드 <아레스>.
떠오르는 신흥 강자였다.
한건우가 아무리 강해도 겨우 스무 살.
전투 경력도 없고 조직 운영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그 길드의 성장세가 무섭도록 가팔랐다.
젊은 길드 마스터 한건우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단 한 번의 헛발질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벌써 미공략 균열을 몇 개나 깼는지.
나라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자, 국민들의 지지가 뜨거웠다.
언론에는 아레스 길드 이야기가 안 나오는 날이 없었다.
길드 아레스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탑급 길드라는 표현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얼씨구? 그 친구 옆에 차은비를 붙여놨더만. 난 그거 보고 알았는데···.”
“뭘 말인가?”
“태 사장이 탐을 내는 놈이란 걸 말야.”
“흠....”
태일제는 한참 바둑알을 고르며 말이 없었다.
“태 사장, 그러다 부하 뺏긴다? 조심해.”
“조심이야 하고 있지.”
원유선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알파스>가 한참 클 때, 내가 아끼는 부하를 한 명 스파이로 붙였거든. 그런데 아주 뺏겨버렸어. 신흥 강자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모양이야.”
“흐음.”
걱정은 고맙지만, 태일제의 마음은 평온했다.
차은비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태일제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었다.
차은비가 일성 길드 같은 곳을 버리고 갈 리가 있나.
그녀를 빼앗길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지금 내부에 눈 돌릴 때가 아니지.”
“....”
원유선이 화제를 돌렸다.
그녀와 태일제의 가장 큰 근심거리로.
“그걸 생각하면, 떠오르는 신성을 견제할 때가 아니야. 오히려 키워놔야 할 판이니···.”
능청스럽던 원유선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그녀는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