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바실리스크 광산 (3) - 경험치 덩어리
가파른 내리막길.
동굴의 통로는 점점 어둡고 좁아졌다.
사람 서너 명이 어깨를 맞대고 겨우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 켤게요.”
임진호가 미리 준비한 조명 아이템을 꺼냈다.
한건우는 빛을 밝히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특성만 두세 개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명 아이템을 켜도록 내버려두었다.
화악-!
꽤 밝은 조명이 비춰졌다.
동굴 벽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건우는 선두에서 앞서가며 생각에 잠겼다.
맹독 바실리스크 광산.
이 균열은 미공략되기 전에는 A급이었다.
‘A급 균열이라면 공략 경험이 두 번이나 있지.’
이비현을 만나서 처음으로 들어갔던 <블랙 타란튤라의 둥지>.
암흑 계열의 미공략 균열이었고, 원래는 A급이었다.
그리고 금해준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고대신의 늪지대> 균열.
D급에서 A급으로 격상된 변이 균열로, 금해준의 혼을 쏙 빼놓았던 곳이다.
블랙 타란튤라, 그리고 고대신 히드라···.
‘이미 A급 균열의 주인을 두 번이나 잡아봤어.’
맹독 바실리스크라고 해서 다를 것 있을까.
다만 조금 까다로운 점이 있을 뿐.
스으으-
한건우는 발록의 화염 채찍을 갈무리해서 아공간 무기집에 집어넣었다.
무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채찍도 좋지만, 역시.’
스르릉-.
마창 게이볼그.
이 차갑고 묵직한 손잡이를 잡았을 때, 가장 안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균열의 주인급 마수를 잡을 때에도 이 창을 썼다.
마창 게이볼그, 그리고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 특성이 큰 활약을 했다.
‘천명환 그놈은, 이 무기를 얻고도 고작 랭킹 32위에 머물렀다니.’
대단해 보이던 천명환이지만, 지금 다시 보니 도리어 한심했다.
지금의 천명환은 회귀 전과 같은 A급이긴 했지만, 100위권 랭커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였다.
아무리 정치질을 하고 열심히 상사 뒤를 닦아도, 전처럼 승승장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건우 형, 이제 창으로 바꾸는 거야?”
뒤따라오던 임수호가 관심을 갖고 물었다.
다른 이들도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그래. 적의 체급이 다르니까.”
“체급?”
“상대가 인간이거나, 인간보다 작은 마수라면 채찍도 쓸만하지.”
“응, 코볼트처럼···.”
아다만티움으로 강화된 채찍을 휘두르기만 해도, 적의 몸을 반으로 가를 정도로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균열의 주인급 마수는 대개 어떻지?”
“보통··· 엄청나게 크지.”
임수호도 용병 일을 해봤으니 잘 알고 있었다.
마수의 크기와 힘은 정비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덩치가 큰 마수는 피부도 두꺼워. 게다가 맹독 바실리스크는 비늘이 무척 단단하니, 채찍보다는 창이 훨씬 효율적이지.”
“아하.”
그때 한건우가 주먹을 들었다.
걸음을 멈추라는 표시였다.
“....”
멀리 보이는 통로 끝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강한 마수에게서 풍기는 마기였다.
S급 플레이어인 차은비도 인상을 찌푸렸다.
눅진한 마기를 느꼈던 것이다.
그게 뜻하는 건 한 가지였다.
“보스는 저 앞에 있다.”
한건우는 은설아를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표시였다.
“응?”
은설아는 갸웃하면서도 그리핀과 나란히 다가왔다.
“설아야. 이번엔 이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
“아.”
은설아는 한건우가 말한 때가 왔나 싶었다.
‘지금인가?’
은설아는 이번 레이드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플레이어로서, 길드원으로서 들어가는 첫 균열이었다.
자기를 선택해준 한건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 없이 철저하게 준비했다.
우선, 어떤 마수를 데리고 갈까가 문제였다.
고민 끝에 은설아가 택한 것은 샤벨 타이거였다.
동굴 형태의 균열이라고 하니, 비행 마수인 그리핀보다는 샤벨 타이거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번 레이드에는 그리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다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물론, 그리핀은 굳이 날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강한 마수라는 것을 체감하긴 했다.
‘이걸 가르쳐주려고 하셨던 걸까?’
그렇게 생각해봐도 납득이 잘 되지 않던 차였다.
역시 한건우는 다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설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용감하게 물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싸우면 될까요?”
“아니, 내가 그리핀을 타게 도와줘, 전처럼.”
한건우는 은설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울릉도에서 그리핀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지상으로 창을 던졌다.
그 때를 떠올린 은설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푸르르르!
그리핀이 깃털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은설아 아닌 다른 사람을 태우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은설아는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흰둥아, 부탁해. 응?”
은설아가 목덜미를 두드리며 살살 달랬다.
딱!
그리핀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소리를 내며 부리를 다물었다.
조금 뻗대더니, 기둥처럼 튼튼한 다리를 구부리고 털썩 앉았다.
“진호야. 아까 걷던 속도로 천천히 따라와.”
그 말을 남긴 한건우는 그리핀 위에 말을 타듯이 올라탔다.
푸르르륵!
그리핀이 콧김을 뿜으며 항의 표시를 했다.
한건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탔다면, 목숨을 위협당했을 것이다.
[고맙다.]
한건우가 마수의 언어로 속삭였다.
그제야 그리핀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한건우는 그리핀의 목깃을 잡고 박차를 가했다.
타닥, 타다닥!
그리핀은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질주했다.
조명 아이템이 점점 멀어졌다.
앞쪽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물론 한건우에게도, 그리핀에게도 문제는 되지 않았다.
통로의 끝.
갑자기 커다란 공간으로 이어졌다.
타다닥- 파아악!
그리핀이 날개를 펴서 날아올랐다.
전속력으로 뛰어가면서 가속을 받은 터였다.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통로 바깥쪽도 여전히 어두운 동굴의 일부였다.
그런데 공간의 크기가 남달랐다.
아까 코볼트 일족과 전투를 벌인 공간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취이익-!
공격이 날아왔다.
적의 따스한 체온을 감지하는 바실리스크의 공격이었다.
파악!
한건우는 날아오는 공격을 창날로 쳐냈다.
덩어리진 액체 같은 것이었다.
치지지지···.
창날에 부딪친 부분에서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바실리스크의 맹독!’
균열의 주인인 바실리스크의 독니에서 나오는 맹독이었다.
입으로 쏘는 공격이었다.
드래곤 아머 수트를 입은 한건우에게는 별 타격이 없지만, 그리핀은 다를 수 있었다.
끼에엑!
그리핀은 난데없는 공격에 화가 나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파아아-!
그리피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동굴 안을 날았다.
그 정도로 천장이 높고 드넓은 공간이었다.
한 가지 조심할 게 있었다.
한건우는 바실리스크가 있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핀도 그쪽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핀의 시야가 위쪽을 향하도록 목깃을 바투 잡았다.
끼에에엑!
화가 난 그리핀이 영문도 모르고 툴툴거렸다.
[조금만 참아. 아래를 보지 말고.]
한건우의 말을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는 했다.
바실리스크와 눈이 마주치면, <석화 광선>이라는 강력한 정신계 저주가 작동한다.
균열의 주인의 필살기.
저주 저항으로 완벽히 커버되지 않을 건 분명했다.
취익!
또 한 번, 맹독 공격이 쏘아졌다.
그리핀은 속수무책으로 피해다니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 노여움이 한건우에게 전해졌다.
‘그래.’
한건우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수의 타고난 공격성에 불꽃이 튀는 순간을.
한건우는 미리 <아이기스의 보호> 특성을 발동했다.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핀이 부리를 크게 벌렸다.
끼에에에에에-!
바실리스크의 유일한 약점.
수탉의 계명성이었다.
‘이거지.’
한건우는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수컷 그리핀이 계명성을 쓰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키이잇?
바실리스크가 바짝 굳었다.
이제껏 다른 생명체들을 돌처럼 굳게 만들어 먹고 살아왔다.
이번에 굳은 건 자신이었다.
휘익!
한건우는 그리핀의 목깃을 놓았다.
그가 수십 미터 아래의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
깜짝 놀란 그리핀이 급히 날개를 접었다.
한건우를 따라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한건우는 <그래비티 필드>를 펼쳐 충격을 완화하면서, 바닥을 앞으로 구르며 착지했다.
그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특성을 썼다.
[특성 발동 : 그림자 맹시]
스스스···.
한건우는 동굴 바닥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계명성에 잠시 굳어버린 바실리스크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 뒤쪽으로 접근했다.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있는 쪽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는 집채만한 도마뱀 같았다.
비늘은 칼로 찔러도 안 들어가도록 두껍고 딱딱했다.
‘이구아나의 확대판 같군.’
한건우는 <그림자 맹시>를 풀고, 바실리스크의 꼬리를 밟았다.
타다다다···.
한건우는 바실리스크의 꼬리를 타고, 그대로 등뼈 부분을 따라 올라갔다.
바실리스크의 척추를 따라서 뾰족하고 단단한 비늘이 꼿꼿이 서 있었다.
한건우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 이르렀다.
반쯤 눈을 감고 창을 높이 치켜올렸다.
푸욱!
마창 게이볼그에 뭔가가 찍혀나왔다.
창은 위치만 바꾸어, 그대로 다시 내리꽂혔다.
푸우욱!
키이이이!
바실리스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계명성으로 인한 경직이 풀린 모양이었다.
키이잇?
[내 눈이?]
바실리스크는 눈이 찔린 고통보다도 칠흑 같은 암흑에 당황했다.
“여기 있지.”
<석화 광선> 저주를 쏘던 눈알은 한건우의 창에 나란히 꼬치처럼 꽂혀 있었다.
한건우는 뽑힌 눈알을 털어 버리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일단 아공간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장영표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이다.
마수의 사체로 뭐든지 만드는 아이템 장인.
그를 데리고 왔으니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건우 형!”
통로 쪽에서 임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명 아이템의 은은한 빛도 보였다.
한건우를 따라 바닥에 내려와 있던 그리핀이 포르르 달려갔다.
주인인 은설아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왔군.”
길드원들은 너무 늦게 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빨리 오지도 않았다.
‘딱 적당한 타이밍이야.’
키에엣!
눈먼 바실리스크가 입을 벌렸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혀가 넘실거렸다.
바실리스크가 고개를 기민하게 움직였다.
눈이 멀었어도 혀로 온도를 인식할 수 있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생물체라면, 그 위치는 알아낼 수 있었다.
“좋아.”
치이-
바실리스크가 맹독을 뱉으려 했다.
임수호가 재빨리 조치했다.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치지지직-!
바실리스크가 뱉으려던 맹독은 얼음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독니에 머금어진 그 상태 그대로였다.
치이익!
바실리스크가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휘이이-!
돌처럼 딱딱한 비늘로 이뤄진 바실리스크였다.
휘두르는 꼬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위험할 수 있었다.
미처 길드원들이 회피하지 못한 상황.
임진호는 방패를 들고 버티면서 바실리스크의 꼬리를 막았다.
타아앗!
그그그극-!
집채만한 마수의 꼬리가 부딪쳤다.
큰 충격이었다.
임진호의 신발이 동굴 바닥을 긁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방패는 달랐다.
정면 충돌의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쩌억-!
“헉, 진호 형, 방패!”
“!”
한건우가 마켓에서 큰 돈을 들여 장만해준 방패였다.
꽤 괜찮은 아이템이었는데.
꼬리치기 한 방에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얼음으로 강화를 시켜줬어야 하는데!”
임수호가 아쉬워했다.
채앵!
임진호는 부서진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왼손에 메이스만 단단히 쥐었다.
한건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잘 됐군.’
어차피 임진호에게 곧 새 방패가 생길 테니까.
한건우는 길드원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놈은 <석화 광선>은 못 쏜다. 하지만 혀로 체온을 감지하고 있어. 입에서 맹독을 쏘고, 비늘이 단단하니 주의해.”
간단하게 상황 브리핑을 했다.
방심하지 않도록 정보를 되새기게 한 것이었다.
슈우웅-!
츠즈즈즈···.
다시 바실리스크가 꼬리를 휘둘렀다.
길고 두터운 꼬리가 동굴 바닥을 훑었다.
대비하고 있던 길드원들은 멀찍이 떨어지며 피했다.
은설아는 그리핀을 타고 훌쩍 위로 날아올랐다.
“혀로 체온을?”
임수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치지징!
바실리스크의 혀 자체를 얼린 것이다.
바실리스크는 크게 동요했다.
크이익?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 적의 체온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독니에서 흐른 맹독을 발사하려 해도, 주둥이가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으윽!
바실리스크가 고개를 휘저었지만, 얼음 결정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임수호는 무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극초저온에 가깝게 온도를 내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까드득!
바실리스의 혀가 스스로 과자처럼 바스라졌다.
슈우웅-! 슈욱!
눈이 멀고 혀를 잃은 바실리스크는 무작위로 꼬리를 휘둘러댔다.
맹독도, 석화 광선도 없었다.
바실리스크를 균열의 왕으로 만들어준 능력은 이제 모두 그 힘을 잃었다.
한 마디로···.
‘가성비 좋은 경험치 덩어리로군.’
한건우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