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바실리스크 광산 (2) - 블러드 러스트
파바바바-!
한건우의 온몸으로 파이어볼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바로 한건우가 입은 전신 아머 수트 위로.
<아머드 드래곤>.
아이템 제작자 장영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역작이었다.
‘이 정도인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코볼트 주술사들의 파이어볼 세례.
보통 사람이 맨몸으로 맞았다면 즉사할지도 모르는 공격이었다.
그래도 위험한 수준의 공격은 아니니,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피하거나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예 회피할 필요가 없어.’
작은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맞는 느낌이었다.
‘하긴, 빙룡에게 아무리 파이어볼을 날려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건우 형, 괜찮아?”
방패를 치켜들고 방어하던 임진호가 다급히 물었다.
마수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고 서 있으니, 걱정된 것이었다.
한건우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호야. 나는 먼저 앞장설게. 네가 지금처럼 파티원들 챙겨줘.”
“알겠어.”
임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탱커인 임진호가 방패와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거리에 상관없이 딜을 넣을 수 있는 임수호가 왼쪽 뒤에 섰다.
그리핀을 탄 은설아는 오른쪽 뒤에 따라갔다. 그리핀 자체가 근거리 딜러나 다름 없었다.
가장 후방에는 힐러인 차은비가 있었다.
그렇게 위치가 잡힌 걸 확인하고, 한건우는 탱커보다 훌쩍 앞서 나갔다.
“와라.”
한건우는 코볼트 떼가 우글거리는 쪽으로 향했다.
새로 강화한 무기를 써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쉬이익!
한건우가 아공간 무기집에서 채찍을 꺼내들었다.
전설급 무구인 <발록의 화염 채찍>.
검은 채찍의 끄트머리가 가닥가닥 갈라지고, 그 가닥 하나하나는 생물체처럼 움직였다.
게다가 채찍의 모양이 그전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차르르르···.
채찍의 가장자리에는 검은 철편과 무거운 추가 촘촘히 박혀있었다.
하나하나가 무서운 흉기처럼 보였다.
장영표가 아다만티움으로 세공한 것이었다.
“와.”
뒤에서 지켜보던 임수호가 감탄했다.
아다만티움으로 강화한 채찍의 위용은 무시무시했다.
같은 편의 무기인데도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큐우우···.
[저건 뭐냐.]
코볼트들은 수가 많았지만, 한건우 하나의 기세에 눌렸다.
크와악! 크와아!
[공격! 가까이 오기 전에!]
그러나 대형을 이룬 코볼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전사 계급의 코볼트들이 공격했다.
코볼트 전사들이 무기를 들고 파도처럼 튀어나왔다.
마석 돌도끼와 돌칼 같은 원시적인 무기였다.
크기가 아무리 커도, 동굴이라는 한정된 공간.
퇴로가 없는 곳에서 인원수로 몰아붙이는 전략이었다.
그야말로 물량공세.
크와아아아!
[죽어라!]
화르르-
스쉬이익!
<발록의 화염 채찍>에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입혀졌다.
불에 녹지 않는 아다만티움 철편이 열기에 달구어졌다.
타다다···.
한건우는 정면으로 달려가면서 채찍을 휘둘렀다.
차아악!
치익!
불타는 채찍이 달려드는 코볼트 전사들을 삼켰다.
코볼트 전사들은 철편과 추에 몸이 찢기고, 마력의 화염에 휩싸였다.
피이잉-! 피잉-!
멀리서 코볼트 투석병들이 새총처럼 생긴 슬링을 당겼다.
팅-!
아까와 마찬가지.
방어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도 타격이 없었다.
‘드래곤 껍질이 좋긴 좋군.’
파이어볼 같은 마법 공격뿐 아니라, 물리적인 공격에도 끄떡이 없었다.
매끄러운 용갑에 흠집도 나지 않았다.
달려오던 코볼트 전사들 중 몇몇은 한건우의 채찍을 피해서 엇갈려 지나갔다.
그들은 뒤따라오는 길드원들의 손에 처리되었다.
코볼트 전사들이 끝도 없이 줄줄이 밀려왔다.
그들의 운명은 앞서 온 전사들과 같았다.
한건우가 송곳처럼 대형을 뚫고 나갔고, 길드원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코볼트 전사들의 시체만 수북히 쌓였다.
“이건 뭐··· 아무도 없는 들판을 걷는 것 같은데?”
임수호가 말했다.
분명히 마수 떼가 밀려오는 동굴 한가운데를 돌파하고 있는데.
그냥 이동하는 것과 같은 속도였다.
‘방어구 하나 달라진 게 이렇게 편하구나.’
왜 방어 아이템이 마켓에서 그렇게 비싼지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지켜보던 코볼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칼받이로 내보낸 전사들이었다.
“이상한데.”
임진호가 말했다.
“뭐가?”
“주술사들은 뭘 하고 있지? 아까처럼 파이어볼을 쏘던지 할 줄 알았는데···.”
임진호의 지적에, 임수호도 바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꺼림칙한 점이 있었다.
이 균열은 코볼트들의 홈 그라운드였다.
근접전을 하는 전사들을 앞에 내보냈으니, 멀리서는 원거리 공격으로 지원을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투석병들만 공격하고, 주술사들은 잠잠했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 걸까?”
임수호가 말하는 순간.
우우우우...!
수상쩍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동굴 멀찍이서, 코볼트 주술사들이 한데 모여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코볼트 주술사들이 마법진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전사들이 목숨 바쳐 시간을 끄는 사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주술을 준비한 것이었다.
우우우!
늑대 떼가 동시에 하늘을 보며 하울링을 하듯이, 코볼트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석화> 저주.
그 저주를 받으면 몸이 돌처럼 굳어지게 된다.
정신계 상태이상 저주였다.
‘바실리스크 균열 아니랄까봐.’
이 균열의 주인, 맹독 바실리스크의 주 무기도 <석화 광선>이 아닌가.
한건우는 <아이기스의 보호>로 충분히 저주를 막을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아도 돌이 되지는 않겠지만.’
드래곤의 방어구에는 기본 저주 저항이 있었다.
저주는 상당히 약화되겠지만, 움직임이 느려지거나 이동에 지장이 생길지도 몰랐다.
지금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차은비 씨!”
한건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은비를 불렀다.
솨아아아···.
<석화> 저주가 바람처럼 밀려왔다.
차은비는 준비하고 있던 특성을 광역으로 펼쳤다.
[특성 발동 : 신의 가호]
‘가호’ 계열의 최고급 특성으로, 치유와 버프를 주는 특성이었다.
그걸 마치 보호막 스킬을 펼치듯 전방으로 넓게 펼쳤다.
농축된 마기가 은빛 빛무리가 되어 오로라처럼 펼쳐졌다.
길드원 전원을 족히 가릴 만큼 넓은 막이 생겨났다.
가장 앞에 있는 한건우까지 커버했다.
치지이익!
코볼트 주술사들이 준비한 정신계 저주는 <신의 가호>를 넘지 못하고 스러졌다.
“와···.”
임수호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코볼트 주술사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푸욱!
한 늙은 코볼트 주술사가 돌칼을 집어들고 스스로의 목을 찔렀다.
“저건 뭐야.”
<신의 가호>의 성능에 감탄하고 있던 임수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으으···.
늙은 코볼트 주술사의 목에서 푸른 피가 흘렀다.
진득한 피는 바닥의 마법진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법진은 주술사의 푸른 피를 삼켰다.
그 대가로, 코볼트 군대에게 강력한 광폭화 버프를 쏟아냈다.
‘블러드 러스트!’
한건우의 눈이 빛났다.
코볼트 주술사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버프 주술이었다.
일족의 명운을 걸고 싸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크와아아!
대기 중이던 코볼트 전사들과 투석병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눈알이 툭툭 튀어오고, 부푼 근육에 핏줄이 돋아나는 게 생생하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두두두···..
동굴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균열 안에 있던 모든 코볼트가 무기를 들고 뛰쳐나온 것이다.
붉게 빛나는 수백 쌍의 눈이 보였다.
“저게 다 몇 마리야.”
임수호가 중얼거렸다.
셀 수가 없었다.
투두둑!
임수호는 허공에 얼음의 창을 띄웠다.
격돌에 대비한 것이었다.
임진호도 방패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가 메이스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들 형제는 S급 힐러의 힘을 다 알지 못했다.
차은비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옅어졌던 <신의 가호>의 은빛 광채가 다시 뚜렷해졌다.
차은비를 중심에 두고, 은빛의 빛무리가 동굴 전체로 원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그녀의 단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 파동에 휘말려 흩날렸다.
파아악!
치지이잉!
“!”
한 순간 모두의 눈에 빛나는 광채가 지나갔다.
코볼트 주술사가 피를 바쳐서 시전한 <블러드 러스트>가 상쇄되었다.
코볼트 무리에게서 광폭화 버프가 사라진 것이다.
크르릉?
그 반동으로 코볼트 떼는 더 큰 혼란에 휩싸였다.
‘항상 기대보다 낫군.’
한건우는 채찍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채찍 끄트머리를 타고, <아그니의 화염>이 긴 꼬리를 늘어뜨렸다.
휘이익!
한건우는 높이 도약해서 코볼트 떼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쉬이이이익!
한건우가 화염으로 빛나는 채찍을 휘둘렀다.
길다란 화염의 꼬리가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코볼트 십여 마리가 쓰러져 나갔다.
잔뜩 겁을 먹은 코볼트 떼는 주춤거리며 도망가려 했다.
한건우의 초인적인 모습에 가장 놀란 이들은 임수호 형제였다.
‘건우 형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물론 한건우가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S급 플레이어니까.
길드 전투력 측정 때, 유적 사냥꾼들을 역으로 사냥했을 때.
그리고 인공 균열에서 훈련할 때도.
형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같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도 건우 형한테는 안 되겠는데?
-당연한 말을.
형제끼리 그렇게 농담하기도 했다.
‘그건 애들 장난이었네.’
지금 와서 보니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수들 앞에서의 한건우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전쟁의 신···.’
길드의 이름이 이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그 강하다는 염제 신광우를 죽였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임수호는 한건우를 어릴 적부터 알았다.
지금도 길드 마스터지만 사적으로는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차원 높은 곳에 올라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수호야, 딴 생각 하지 말고.”
임진호가 동생에게 경고했다.
“아.”
전투 중에 잡념에 빠지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임수호는 얼굴을 붉히고 전투에 집중했다.
수십 개의 얼음 송곳이 휘몰아치듯이 쏘아졌다.
파바박!
도망치려던 코볼트들의 뒤통수와 등에 얼음 송곳이 박혔다.
키이이익!
은설아의 그리핀도 간만에 무차별적인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로 코볼트의 몸통을 물고 흔들다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리핀은 사냥을 좋아하는 마수였다.
은설아도 그 감정에 동조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핀의 등에 탄 채로, 도망가는 코볼트가 어디 있는지 살폈다.
코볼트 일족의 푸른 피가 동굴 바닥에 고여 냇물처럼 흘렀다.
콱!
한건우는 워커발로 코볼트의 머리를 짓밟았다.
마지막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던 코볼트였다.
한건우는 넓은 동굴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코볼트는 안 보였다.
그들 다섯 명이 이곳에 살던 코볼트 일족을 모두 학살한 것이었다.
아무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그의 시선이 높은 동굴 천장에 이르렀다.
동굴 천장의 종유석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은은한 마기도 느껴졌다.
‘마석이군.’
이 동굴은 통째로 마석 광산이었다.
‘금해준이 엄청나게 좋아하겠군.’
한건우는 사업가의 자질을 타고난 재벌 3세 매니저를 떠올렸다.
“이제 다 잡은 건가?”
임진호가 물었다.
주변에 살아있는 적이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니, 잠시 착각한 것이다.
“진호 오빠, 저희 아직 바실리스크도 못 만났고, 핵도 못 찾았잖아요.”
은설아가 그리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임진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균열의 주인은 코볼트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균열의 이름부터가 <맹독 바실리스크 광산>이 아닌가.
한건우는 동굴 벽의 통로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제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저, 한건우 씨.”
차은비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다.
아까 두 번에 걸친 특성 발동 때문이었다.
워낙 강하고 광범위한 시전이어서, 한 번에 많은 MP와 HP를 소진한 것이다.
그나마 그녀 스스로 회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왜 그러시죠?”
“제가 곧바로 바실리스크의 <석화 광선>을 막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조금만 쉬면서 회복하고 가면 안 될까요?”
차은비는 합리적인 편이었다.
괜히 자존심을 내세워서 무리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해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미공략 균열이었다.
마수가 언제든지 리스폰될 수 있었다.
이미 마수를 많이 잡았으니, 리스폰되기 전에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차은비 말고는 방법이 없다면, 그녀의 말대로 해야겠지만.
“그건 차은비 씨에게 시킬 게 아닙니다.”
“그··· 정말요?”
차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실리스크의 <석화 광선>도 저주의 일종이었다.
저주를 막는 건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인 줄 알았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가죠.”
다른 길드원들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건우를 선두로, 그들은 아래쪽 통로를 타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