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바실리스크 광산 (1)
한건우가 눈을 번쩍 떴다.
“뭐, 마정석 부화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장영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예. 원래는 어미 마수가 다른 마수를 잡아먹고, 흡수한 마정석의 기운을 알에 넘겨줍니다. 그걸 대체하는 거죠.”
“그걸 만들어 봤나?”
한건우는 겉으로는 침착을 유지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드는 걸 보긴 했습니다.”
“어디에서?”
장영표가 턱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제가 처음 각성했을 때요. 그때 대장장이 일을 배우려고 아이템 제작소를 몇 군데 돌아다녔죠.”
“그랬나.”
처음 듣는 얘기였다.
회귀 전 장영표와 나름대로 친한 편이었지만, 이런 과거 사연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깨달았죠. 다른 사람에게는 배울 게 하나도 없다는 걸요. 그리고 혼자 일을 시작했습니다.”
장영표는 장난기도 하나 없이 당당하게 그런 말을 했다.
그의 그런 괴짜스러운 자신감이, 한건우는 싫지 않았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니까.
“그 중 한 군데에서, 부화기를 주문받아 만드는 걸 봤습니다.”
“만들 수 있나?”
장영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걸 묻냐는 듯했다.
“만드는 과정을 한 번만 보면, 뭐든지 따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아··· 일단 아다만티움 일이 처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지.”
“예. 언제든지.”
장영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우는 더 이상 장영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물러났다.
“형님, 어서 나가시죠!”
금해준이 손부채질을 하며 한건우에게 소리쳤다.
그는 이미 문앞에 가 있었다.
땀으로 목욕한 듯,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
한건우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어휴, 역시 형님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를 보고, 금해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얼마 후, 길드원 전원은 용갑으로 된 방어구 아이템을 얻게 되었다.
빙룡의 비늘과 가죽, 그리고 뼈를 사용한 방어구.
마감은 완벽하고, 모양까지 유려했다.
감히 가격을 매길 수조차 없었다.
길드원들의 반응은 수족관에서 꺼낸 활어처럼 생생했다.
“형, 이것 봐, 세상에···!”
임수호는 거의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그는 용의 비늘 무늬가 살아있는 검은 망토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갑이라니.”
평소 말이 없는 임진호였다.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연신 갑주를 매만지기만 했다.
“진짜로 제가 입어도 되는 거예요?”
기분이 좋아진 은설아가 빙글빙글 돌았다.
얇게 무두질한 드래곤 가죽에서 차르르 윤기가 났다.
모자가 달린 새하얀 망토를 입은 은설아는 인형 같았다.
그리고 남의 일처럼 구경하고 있던 차은비는 깜짝 놀랐다.
“네? 저도요?”
그녀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난 정식 길드원도 아닌데···.’
파견 때만 쓰고 돌아갈 때 반납해야 하겠지만.
그 사실을 감안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차은비는 망토와 부츠를 살짝 들어보았다.
그녀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가볍잖아? 게다가 이 저항력은···.’
힐러 클래스인 그녀라서 더 잘 알 수 있었다.
일성 길드에도 이렇게 높은 수준의 방어구는 없었다.
‘이것만 입으면, 어느 균열이든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데?’
균열에서 가장 위험한 건 마수의 직접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균열 안의 환경도 만만치 않다.
찜통에 찌는 듯한 더위나 혹독한 추위, 또는 맹독이 서린 안개···.
그야말로 극한의 기후일 때도 있었다.
각성자의 몸은 일반인보다 강하지만, 가끔은 각성자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피부를 입은 듯한 이 방어구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강의 마수, 드래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이 사람의 길드는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차은비는 긴장한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탁 탁.
한건우가 손끝으로 탁자 위를 쳐서,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린 방어구는, 아시다시피 빙룡의 사체로 만든 겁니다.”
길드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최고의 방어구를 드린 건, 앞으로 위험한 일이 많을 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임진호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한건우는 임진호를 흘깃 바라보았다.
임진호가 진짜 좋아할 물건은 따로 있는데, 아직 최종 완성이 되지 않았다.
‘빨리 만들어지면 좋을텐데.’
한건우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우리 길드는 이제부터 미공략 균열을 파훼할 겁니다.”
“...미공략 균열요?”
길드원들은 뜻밖의 이야기에 술렁였다.
“빙하기 균열 같은 곳이에요?”
은설아가 손을 들고 물었다.
“맞아.”
한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반 균열은 <시스템>의 영향을 받고, 잔여 시간 내에 공략 조건을 달성하면 균열이 닫힌다.
미공략 균열은 공략에 실패한 균열이었다.
그러면 균열 안의 마수들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미공략 균열이 되면, 이계와 연결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수들이 계속 리스폰되고, 몬스터 웨이브가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정부가 <피라미드>를 지어서 균열 입구를 막았지만, 그걸 보수하느라 들어가는 세금이 어마어마했다.
인명 피해, 비용···.
그 원흉인 미공략 균열을 파훼하는 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게 가능만 하다면.
“저기, 파훼···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은설아가 임수호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임수호는 자기가 아는 대로 열심히 설명했다.
“내가 알기론, 우선 균열 안에 있는 마수들을 남김없이 죽여야 해. 그리고 리스폰을 일으키는 핵을 찾아서 파괴해야 한다던데?”
한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대답이었다.
한건우는 그가 처음으로 파훼했던 암흑 균열을 떠올렸다.
암흑 균열은 요령만 알면 쉬운 편이었다.
솔스톤만 가지고 있으면 곤충형 마수들을 쉽게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때 어둠 속에 숨어있는 모든 벌레 마수를 불러모아 한번에 해치웠다.
‘균열의 핵도, 보스 몬스터인 블랙 타란튤라 그 자체였지.’
그러나 빙하기 균열은 달랐다.
보스 몬스터였던 기갑 매머드를 잡고, 다른 마수들을 다 죽였지만 파훼되지 않았다.
그 핵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해자와 포탑으로 막고 있을 뿐이었다.
상당수의 미공략 균열이 이와 같았다.
핵의 위치를 모르면,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차은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핵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측정기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죠.”
“같은 계열의 미공략 균열이 파훼된다면 그 정보를 듣고 가면 되겠지만···.”
차은비가 말을 흐렸다.
한건우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핵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아는 곳으로만 가면 돼.’
회귀 전, 그건 특수안보부의 업적이었다.
원래는 정치인이나 정부 인사들이 모두 특수안보부에 찬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냉혹한 일처리에 내심 반발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때 마침, 특수안보부는 미공략 균열을 하나씩 파훼해나갔다.
특수안보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들은 점점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제아무리 수상한 명령을 해도,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될 정도로.
이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기회는 우리 길드가 차지할 테니까.’
오히려 상황이 더 나았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곳은 가지 않고, 성공한 곳만 골라서 갈 테니까.
“몇 군데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어, 정말요?”
열심히 말려 보려던 차은비의 말문이 막혔다.
차은비는 입을 다물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아레스 길드는, 위치가 조금 애매했는데···.’
전투력 측정에서 1위를 하고, 길드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투입되는 자본금도 엄청났다.
하지만 막 태어난 신흥 길드에 불과했다.
국내 10위권 길드를 꼽아 보거나, 전도유망한 길드를 얘기할 때.
그런 순위권에는 들겠지만, 아직 최상위 길드로 꼽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 얘기를 듣고, 차은비의 생각이 조금 변했다.
‘진짜로 미공략 균열을 연달아 파훼하는 데 성공한다면··· 지금 체제가 무너질지도 몰라.’
일성, 환인, 알파스.
국내의 뿌리깊은 3대 대형 길드.
한 마디로 고인물, 아니 썩은물.
‘어쩌면 3강 체제에서 4강 체제로 갈지도....’
한건우는 바로 그걸 노리는 거겠지.
차은비는 어쩐지 흥미가 생겼다.
그때 금해준이 유쾌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미공략 균열이 파훼되고 나면, 거기서 마석 채굴장도 돌릴 수 있는 거죠?”
금해준의 눈빛은 해맑았다.
한건우가 실패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럼.”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해준은 더욱 밝게 미소지었다.
**
경기도 안산의 <피라미드> 안.
균열로 통하는 입구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마수가 바글거렸다.
마침 몬스터 웨이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코볼트다.”
맨 앞에 선 임진호가 방패를 치켜들었다.
코볼트는 흔한 마수였다.
키는 성인 남자의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개처럼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흉측하고 깡마른 몸으로 이족보행을 했다.
각각의 개체는 약했다.
그러나 코볼트는 절대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크롸르륵!
으르르··· 커엉!
코볼트 떼가 달려들었다.
임진호의 뒤에 숨은 임수호가 손을 높게 들었다가 내리쳤다.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콰지직!
푸욱! 푹!
강력한 얼음 송곳이 맨 앞에 선 코볼트들을 꿰뚫었다.
“수호야··· 너?”
임진호는 깜짝 놀랐다.
어쩐지 임수호의 특성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 몰래 특성이 추가 개화라도 했나 싶었다.
“어, 어라?”
임수호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임수호는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건우가 해답을 주었다.
“빙룡의 용갑에 영향을 받은 거야.”
“아하···.”
얼음 특성을 쓰는 임수호였다.
빙룡의 용갑으로 만든 망토는 특성 강화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임수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도 잠시.
코볼트 떼가 어둠 속에서 끝도 없이 밀려왔다.
한건우는 은설아에게 눈짓을 했다.
테이밍이 걸리느냐는 것이었다.
“안 돼요.”
은설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코볼트는 크기는 작지만 트롤이나 오크와 비슷한 인간형 마수였다.
지능이 높은 인간형 마수는 테이밍이 잘 걸리지 않았다.
은설아는 조금 풀이 죽었다.
“그거 잘 됐군.”
“네?”
파아아악!
한건우의 손에서 <아그니의 화염>이 쏟아졌다.
화염 방사기처럼 일자로 뻗어져나간 불꽃이 코볼트 떼를 휩쓸었다.
크롸아악!
[아파!]
캬아악!
[뜨거워!]
한건우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들의 비명을 들었다.
염제를 죽이고 특성이 진화한 이후, 불꽃을 다루는 감각이 극도로 선명해졌다.
불꽃의 넘실거리는 방향과 온도까지.
생각한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10초만 있다가 들어와.”
한건우는 가장 먼저 균열 입구로 뛰어들었다.
슈우우-
채 눈을 뜨기도 전에, 한건우의 양팔에서 화염이 뻗어나갔다.
파아아아악!
크이익-!
[뭐야!]
균열 입구에 떼지어 몰려있던 코볼트 떼가 한번에 타죽었다.
마수 고기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건우는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역시 동굴이군.’
균열 안은 넓은 석회동굴이었다.
형형색색의 마석 종유석과 석순은 꽤 장관이었다.
동굴 저편에서 수백 쌍의 안광이 빛났다.
살기등등한 코볼트의 안광이었다.
이곳은 원래 B급 균열이었다.
균열 이름은 [맹독 바실리스크의 광산]
‘탐이 날 만한 이름이지.’
무시무시하게 들리지만, 웬만한 길드라면 욕심을 낼 법했다.
귀한 맹독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걸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건 ‘광산’이라는 단어.
누구나 마석 광산이 있을 거라고 기대할 테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미공략 균열이 된 이후에도 파훼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던 곳이다.
슈우우-!
한건우의 지시대로 10초를 기다리고, 길드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캬아악!”
[쏴라!]
피유우웅-!
피유우-!
동굴 저편에서 수백 개의 불덩이가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코볼트 주술사들의 파이어볼이었다.
한건우는 조금 무료한 표정이었다.
파이어볼을 피하지도 않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