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드워프의 대장간
이능력 특수전단의 훈련장.
부하 대원이 죽었다는 소식이 권석진 대장에게 전해졌다.
훈련기구에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그는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박 중사가 치료 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권석진 대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사람을 혼동한 게 아닌지 다시 알아봐.”
“확실합니다··· 장례를 준비하겠답니다. 박 중사가 유가족도 없고 해서···.”
참모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약제사나 힐러가 치료 중에 사고를 낸 건 아닌가?”
“힐러 말로는, 연구소 화재사고 때 실험 약물을 뒤집어썼던 것 같다며···.”
“무슨 개소리야. 치료소에 직접 박 중사를 데려다준 게 난데!”
권석진 대장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쉽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 그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죽었다니, 갑자기 왜?’
그날 연구소를 떠난 후, 보초로 남긴 박 중사에게 무전을 했다.
응답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곧바로 차를 돌려 왔지만, 이미 늦었다.
건물에는 불이 붙고, 연구소 안 사람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있는 상황.
박 중사는 연구소 앞 공터에서 기절한 채 발견되었다.
관절이 다쳤을 뿐, 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한 마디로 절대 죽을 상처는 아니었다.
다친 관절과 근육만 회복되면 바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치료소 힐러도 그렇게 말했다.
“힐러 말로는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답니다. 처음에는 티가 안 나는데 차츰 진행되는 독액 같은 경우가···.”
권석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납득 안 가는 것 투성이였다.
특히, 치료 중에 박 중사의 얼굴도 못 보게 하지 않았나.
환자 회복에 좋지 않다며, 동료들의 면회마저 거부되었다.
돌이켜 보니 그것도 이상했다.
“지금 박 중사 시신이 어디 있나?”
*
군 치료소의 한켠, 장례식장과 화장장이 있었다.
권석진 대장이 화장장 안에 밀고 들어갔다.
“박 중사 어디 있어.”
직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권석진이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그 앞을 막아섰다가는 몸이 성치 못할 것 같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화장장 직원 중 한 명이 무심코 안쪽을 돌아보았다.
퍼억!
권석진 대장은 그 직원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자동차에 치인 것처럼 뒤로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박 중사의 시신은 화장로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박 중사···.”
박 중사는 환자복을 입은 그대로 누워있었다.
옷을 갈아입히거나 하는 별다른 조치도 없었다.
권석진 대장은 울컥했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코피가···?”
죽은 박 중사의 코 아래에 피가 굳어있는 게 보였다.
힐러들의 말대로 독액 때문인 걸까?
권석진 대장은 무릎을 꿇고 박 중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머리 부분,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로 생긴 희미한 상처가 보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흰색의 긴 상흔이었다.
“....”
권석진 대장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뒤따라온 참모가 물었다.
권석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과민했던 것 같군.”
“제가 남아서 화장까지 지켜보겠습니다. 부대로 먼저 돌아가십쇼.”
“박 중사 마지막 가는 길인데, 나도 있다 가야지.”
“알겠습니다.”
화장장 직원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화장로에 시신을 들여보내자, 고온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권석진 대장의 얼굴은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
“우리 건물에서 가장 튼튼한 곳이 어디지?”
한건우가 묻자, 금해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튼튼한 건 어디든 마찬가집니다만?”
세계적인 건설기업인 LK건설의 기술력으로, 최고급 자재로 세운 빌딩이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안정적인 모양새.
금해준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건물에 손상이 갈지 모르니···.”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우리 아이템 제작자에게 실험실 겸 작업장을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작업 스타일이 좀 과격한 편이라.”
장영표가 사고를 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한건우였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 장영표 제작자 말씀이시군요. 좋은 생각 있습니다.”
금해준이 묘안을 냈다.
“뭐지?”
“지하 벙커에 작업장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벙커라면, 비상용 벙커 말야?”
“네. 한국에 핵이 터지거나 드래곤이 습격하거나··· 그런 비상사태에도 버티도록 설계해 놨으니, 내부에서의 충격도 어느 정도 버틸 겁니다.”
“흠··· 괜찮군.”
“그런데 아무래도 지하라서 어둡고 답답할 텐데요.”
“아마 더 좋아할 거야.”
“그럴까요?”
금해준은 의아해했지만, 한건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장영표의 스타일은 잘 알았다.
한건우는 장영표를 회의실에 불러왔다.
“이 건물 지하 벙커에 실험실을 마련해준다면, 쓸 의향 있나?”
“예? 그게 정말입니까?”
장영표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는 회귀 전에도 시골에 두더지 굴 같은 지하 벙커를 파고 살던 괴짜였다.
장영표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노트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건?”
“흠··· 예산 담당하시는 분이, 매니저 님이죠?”
예산이라는 단어에, 금해준이 바짝 긴장했다.
금해준은 장영표가 건넨 노트의 내용을 훑었다.
“흠··· 마수의 힘줄과 마석, 화로와 연료···.”
그건 당장 필요한 장비와 재료를 적은 목록이었다.
금해준이 집중하느라 인상을 썼다.
“저, 처음이라 조금 필요한 게 많은데요, 제 사제 장비도 가져올 겁니다.”
장영표가 머리를 긁으며 덧붙였다.
어쩐지 남에게 손을 빌리는 것처럼 민망했다.
“이걸로 되겠어요?”
“예?”
금해준은 LK그룹의 연구팀이 쓰는 천문학적인 예산에 익숙했다.
그의 눈에는 소박한 금액으로 보였다.
“길드를 위해 필요한 게 있으면 다 주문해요. 결재는 사후에 올려도 괜찮으니까.”
“허어···.”
장영표의 작은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퍽 감동한 눈치였다.
*
드넓은 지하 벙커는 거의 드워프의 대장간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장영표가 말한 대로 그의 개인 장비는 물론, 제작 중이던 아이템까지 모두 옮겨왔다.
장영표는 도통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한구석에 침상을 갖다놓고, 이곳에서 먹고 자고 했다.
장영표가 밤을 지새며 가장 먼저 완성한 것은, 한건우를 위한 아머 수트였다.
“이, 이런 아이템, 아니 아티팩트를··· 직접 수제로 만드셨다고요?”
금해준이 뒤로 넘어갈 듯 놀랐다.
“예, 뭐.”
장영표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검댕이 묻은 얼굴 사이로 하얀 이가 보였다.
금해준은 아이템 보는 눈이 높았다.
플레이어 시절, 최고급 갑주를 맞춰 입던 그였다.
금해준도 이런 수준의 아이템은 처음 보았다.
[아이템 : 아머드 드래곤]
대장장이 클래스의 각성자는 자신이 만든 아이템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하군.”
한건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건 아이템이 아니라 아티팩트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한건우의 전신에 딱 맞게 감싸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아머 수트.
빙룡의 비늘과 발톱, 가죽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데다 가볍기까지 했다.
“드래곤 아머이니, 열기와 냉기, 그리고 독에도 상당한 저항력이 생길 겁니다.”
장영표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드래곤 한 마리를 통째로 가공할 수 있다니.
그것도 이러쿵저러쿵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만들라고 했다.
'여기는 천국이야!'
장영표의 직장 만족도는 최고 그 이상이었다.
"오."
한건우는 몸을 움직여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관절 부위의 움직임이 몹시 자유로웠다.
탄성도 좋아서 옷처럼 입고 다니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흰색의 비늘을 검은 무광으로 물들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건우의 길드 <아레스>의 마크도 붙어있었는데, 그건 탈부착이었다.
“이런 걸 여러 개 만들 수 있나?”
한건우가 물었다.
다른 길드원에게도 방어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럼요. 생김새는 좀 다를 거고요.”
작업장 한쪽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금해준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꽤 솜씨 좋은 인물 스케치였다.
금해준은 누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한건우에게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아머 수트.
임진호에게는 더 두툼하고 헬맷까지 갖춰진 전신 아머.
임수호에게는 검은색 망토와 팔다리 각반.
은설아와 차은비에게는 흰색 망토와 부츠를 만들어줄 모양이었다.
모두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을 이용한 방어구였다.
“오··· 제 것도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금해준은 신이 났다.
드래곤 가죽 자켓을 입은 자신의 그림을 본 것이다.
"어!"
장영표가 문득 벽시계를 보았다.
그가 화기 방어구를 챙겨입고, 벙커의 맨 끝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곳은 내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아까부터 심상치않은 열기가 전해져 왔다.
“벌써 시간이 됐나?”
한건우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뭡니까?”
어리둥절한 금해준도 따라가려 했다.
내열 벽 뒤에는 도자기 화덕 같은 둥근 흙무덤이 있었고, 그 위에는 큰 솥이 올려져 있었다.
일종의 작은 용광로였다.
한건우는 어제 거기에 초고온의 화염을 쏟아부었다.
장영표가 손을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마스터, 불 좀 더 피워주십쇼!”
한건우는 화덕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파아아아-!
화덕 안쪽으로 고온의 화력이 쏟아졌다.
“으헉!”
놀란 금해준은 멀치감치 뒤로 물러났다.
훅 끼치는 열기가 상당했다.
금방 온몸에서 땀이 솟아났다.
각성자인 그가 이럴 정도면, 일반인은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다.
솥 위에서 아다만티움 덩어리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염제 신광우가 7룡성의 용광로에서 순도 높게 제련해놓은 것이었다.
장영표는 그 덩어리를 녹이고자 했다.
한건우가 주문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드래곤의 비늘과 달리, 아다만티움은 굉장히 무거운 금속이었다.
가벼워야 하는 아이템도 있지만, 무게가 필요한 아이템도 있는 법.
그러나 장영표는 큰 걱정이 있었다.
‘아다만티움을 녹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라던데···.’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무기 아이템은 아무리 뜨거운 불에도 녹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저 아다만티움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이후, 처음으로 녹이는 것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하는 데 실패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은빛을 띄던 금속 덩어리가 비누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덩어리는 곧 황금빛으로 변해 물처럼 넘실거렸다.
“좋아, 좋아···.”
솥을 지켜보는 장영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솥 한쪽에 연결된 길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타고 내려갔다.
치지지지지지···..
액화된 아다만티움이 판 위에 넓게 펼쳐졌다.
“됐어!”
장영표는 주먹을 쥐고 부르짖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소리없이 기뻐했다.
그가 조금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건우는 물었다.
“다 된 건가?”
“아아, 조금 식혔다가 망치로 두들기려고 합니다. 아이템을 제작해야죠.”
“얼마나 걸리지?”
“식히는 데만 하루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영표는 지금부터 아이템이 완성될 때까지 아예 잘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니까.
24시간 내내 들여다볼 계획이었다.
장영표는 아예 의자까지 가져와서, 아다만티움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열정에 한건우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차은비 보고 종종 들르라고 해야겠군.’
열정은 좋은데,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한건우는 힐링 포션이라도 건네려 했다.
그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건우의 손끝에 빙룡의 심장이 만져졌다.
마수의 알도 함께 들어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왜 그러십니까?”
장영표는 아다만티움 표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혹시 마수의 알에 대해 좀 아나?”
“예? 마수의 알이라뇨?”
그제야 장영표가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마수의 알을 부화시키는 법 말이야.”
한건우는 물으면서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장영표는 아이템 제작자이지, 마수 전문가는 아니니까.
그런데 뜻밖에 구체적인 대답이 술술 나왔다.
“그거요.... 우선 알을 품어줄 어미 마수가 있어야죠. 어미 없이 균열 밖에서 부화시키려면, 마정석 부화기가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