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연구소 (2) - 전직 부대원
흰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 검은 전투복을 입은 권석진 분대장.
한건우는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 실수로 대원분들이 괜히 고생하셨네요. 앞으로 실패작은 사회에 방생 안하고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연구원이 턱끝으로 조승재를 가리켰다.
‘실패작?’
한건우가 눈썹을 꿈틀했다.
아마 조승재는 마기 증폭 시술이 안정되기 전, 초기 단계의 실험대상인 모양이었다.
일종의 베타 테스터라고 할까?
“흐읍, 흑···.”
조승재는 얼굴에 천이 덮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흰 천이 펄럭거렸다.
양 손목과 목에는 마력 저감장치까지 채워져 있으니, 마치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짐승 같았다.
“아닙니다. 연구원 분들이 항상 고생 많으십니다.”
권석진 분대장은 무표정했지만, 태도는 깍듯했다.
연구원들의 실험 실패로 사고가 나서 1개 분대가 출동한 것이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권석진은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특수전단에 있을 때는 그런 태도가 좋아 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였다.
‘누구도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군.’
조승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각성자들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도 조승재에게 여럿 죽어나갔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그걸 사소한 일로 취급하는 듯했다.
회귀 전, 원래도 그렇지 않았나.
이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제 사건.
그건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묻어버렸군.’
한건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권석진 분대장 연구원에게 물었다.
“지하실까지 동행해 드릴까요?”
연구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마력 저감장치도 채워져 있으니까요··· 경비원 불러서 데려가겠습니다.”
“네, 그럼 저희는 이만.”
권석진 분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부하와 함께 돌아섰다.
뚜벅, 뚜벅.
두 쌍의 군홧발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멀어져갔다.
출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대원이 권석진에게 경례를 하는 게 보였다.
‘권석진 대장···.’
한건우는 권석진의 분대가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여기서 그와 맞닥뜨린다면, 아마도 그를 죽여야 할 것이다.
“....”
어차피 지금의 권석진은 한건우를 모른다.
한건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한건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미루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조승재를 넘겨받은 연구원이 권석진의 등뒤에 대고 인사했다.
가축의 고삐를 잡은 듯한 태도였다.
퍽!
연구원이 조승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멀쩡해진 척하더니 뒤통수를 때려? 넌 다시는 바깥 공기를 못 쐴 줄 알아.”
“저, 저한테 왜··· 사, 살려 주십쇼.”
다른 연구원도 가세했다.
똑같이 눈 밑이 시커맸고, 똑같이 불량한 태도였다.
“걱정 마라. 쉽게 안 죽이니까.”
“그래. 각성자 실험체 한 명이 얼마나 귀한데.”
“···?”
조승재는 뭐가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최근 몇 달 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조승재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실력이 변변치 않은, 별볼 일 없는 각성자였다.
그나마 용병 일로 돈을 벌었지만, 도박과 약물에 탕진했다.
‘강화 시술 생각 있어? 임상실험은 거의 끝났고, 마켓에 내놓기 직전이라 무료로 해준다는데. 원하면 소개해 줄게.’
용병대에서 만난 브로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자, 잠깐만요.’
시술 직전에 겁이 나서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조승재는 시술대에 사로잡혀 묶였다.
‘미친 놈들아, 풀어줘!’
‘주사해.’
연구원들은 조승재의 목에 거대한 주사장치를 들이댔다.
마취조차 없었다.
철컥!
‘크아악!’
고통스러운 시술 후, 그는 한 달 동안이나 갇혀있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연구소의 지하실.
온갖 가혹한 실험을 당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연구원들의 대화를 듣고 깨달았다.
이 시술은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런 뒷배가 없는 조승재는 그야말로 모르모트가 된 것이었다.
그나마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마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 지켜보려던 것이겠지.
결국 이렇게 잡혀들어오고 말았다.
자기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조승재는 자기의 망가진 인생이 억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죽여 버릴 거야···.’
조승재는 분노를 삼켰다.
연구원이라는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천에 덮여진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
한건우는 결심을 굳혔다.
‘오늘부로 이 연구소는 문을 닫는다.’
특수안보부의 손발을 하나둘씩 잘라나갈 것이다.
한건우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었다.
아직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일렀다.
아무도 한건우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작업해야 했다.
한건우는 연구소 안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훑었다.
큰 창고를 개조한 것이라서, 내부 공간은 넓었다.
층고가 높은 1층과 지하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출입구는 하나뿐이군.’
1층에는 실험실과 사무실이 주르륵 붙어 있었다.
실험실은 복잡한 약품과 장비로 가득했다.
지하층에는 좀더 은밀한 공간이 있었다.
실험 데이터가 저장된 것 같은 자료 보관실.
그리고 강화유리로 둘러싸인 감옥.
넓은 공간에 비해서 오가는 사람은 적은 편이었다.
연구원들은 거의 비각성자였다.
각성자도 있었지만, 전투 계열로는 보이지 않았다.
쓸만한 전투원은 몇 없었다.
순찰을 도는 각성자 경비원 여럿, 그리고 출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 하나.
연구소는 워낙 한적한 곳에 있는데다, 버려진 창고로 위장되어 있었다.
굳이 경계를 삼엄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한건우는 아무도 없는 실험실로 숨어 들어갔다.
화르르···.
한건우는 손에서 불꽃을 피워냈다.
‘우선 이쯤에서 작은 화재를 내고···.’
사람들을 이쪽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건우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퍼엉! 쿠과광-!
“?”
옆 실험실에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난 것이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불이 붙었는지, 가벽을 타고 뜨거운 열기도 느껴졌다.
“뭐야!”
“악, 뜨거!”
“이런··· 약품 치워!”
어이가 없었지만, 나쁠 것은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난리를 피워준 꼴이니까.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야, 장영표!”
“미쳤냐? 조심 좀 해!”
한건우의 귀에 그 이름이 쏙 박혔다.
‘장영표? 장영표가 왜 여기 있지?’
순간 놀랐지만,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한건우가 아는 장영표는 저런 대접을 받을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장영표라면 설령 실수로 이 연구소를 다 태워먹는다 해도 저렇게 문책받지는 않으리라.
“불 끄시죠, 선배님들.”
“이 꼴통 자식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한건우는 확신했다.
한건우가 찾아가려던 전설의 아이템 기술자.
총기 아이템 <데스 트루퍼>에 Y. P.라는 서명을 남긴 그 괴짜 장영표가 맞았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한건우는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장영표는 여기서 반드시 데리고 나간다.’
타다닥!
“나와요! 위험합니다!”
옆방에서는 각성자 경비원들이 불을 끄고 있었다.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가 실내를 채웠다.
그 틈을 타서, 한건우는 유유히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자료 보관실 앞.
경비원이 앉아있던 의자는 비어있었다.
불 소식을 듣고 뛰어나간 것 같았다.
‘기강이 형편없군.’
한건우가 혀를 찼다.
아무리 문이 잠겨 있다지만, 이런 중요한 곳을 비우다니.
[특성 발동 : 잠금 해제]
철컥!
이렇게 도둑이 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자료보관실 안은 낡은 PC로 가득했다.
문서 자료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기억의 석판> 특성이 있는 한건우라도, 무언가를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특수안보부의 연구소라면 뻔했다.
‘해킹을 우려해서, 서버나 네트워크에 연결하지 않고 구식 하드디스크에 자료를 저장하지.’
타닥, 턱.
한건우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분리하는 족족 아공간 창고에 집어넣었다.
숨겨진 자료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모든 자료를 챙길 수는 없었다.
그게 목적은 아니니까.
피유우-!
화살이 날아왔다.
“!”
한건우가 화살을 피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 선 남자가 한건우를 보고 외쳤다.
“누구냐!”
그 남자는 정문 경계를 서던 이능력 특수전단의 대원이었다.
혼자서 연구소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가 불이 난 곳으로 향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층을 살피러 내려온 것이었다.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아주 바보들만 있는 건 아니군.’
그 대원은 한건우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대원도 한건우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건우가 후드를 깊이 눌러쓴데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이인가?’
대원의 눈에 한건우는 무척 수상하게 보였다.
한건우가 대답이 없자, 대원은 곧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특성 발동 : 어스 애로우]
그 대원은 궁수 클래스였다.
석궁에 대지의 힘이 응축되어 모였다.
파아악-!
옆으로 움직여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보통 각성자라면 그랬으리라.
한건우는 오히려 대원의 앞쪽으로 굴렀다.
대각선 앞 방향이었다.
“엇!”
화살이 쏘아진 궤적은 절묘하게 피했다.
대원은 당황했다.
한건우가 지나치게 가까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대원도 평범한 궁수 클래스는 아니었다.
이능력 특수전단 대원이 아닌가.
몸을 쓰는 근접전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훅-!
대원은 석궁을 왼팔에 들고, 수평으로 휘두르며 페인트 공격을 했다.
한건우가 뒤로 피하면서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을 때를 노린 것이었다.
휘익-!
대원은 몸을 낮추고 강하게 사이드킥을 날렸다.
터업!
“윽?”
대원은 보기좋게 한건우에게 발이 잡히고 말았다.
발차기를 정확히 예측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건우가 잡은 발을 비틀어 돌리면서 옆으로 무릎을 꿇으며 돌았다.
후우욱- 퍼억!
“···크윽···.”
대원의 몸통이 단단한 바닥에 처박혔다.
한건우에게 잡혔던 발목은 이미 부러진 듯 너덜거렸다.
대원은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 자세, 이 대응법은···.’
한건우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이능력 특수전단에서 배운 무술과 같았다.
한건우의 자세는 부대의 무술 교관처럼 완벽했다.
‘아니, 심지어 한 수 위야.’
대원의 머릿속에 경고 메시지가 떴다.
‘전직 부대원이야···!’
그건 진실이었지만, 지금은 큰 오해일 뿐이었다.
전적으로 한건우가 의도한 대로였다.
대원은 이를 악물었다.
옆으로 구르면서 거리를 벌려서, 누운 채로 석궁을 발사했다.
피잉-!
턱!
“허억!”
아무리 특성을 쓰지 않은 일반 화살이었다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손으로 쳐낼 수는 없었다.
퍼억!
한건우는 놀란 대원을 발로 차서 반 바퀴 굴렸다.
한건우는 엎드린 대원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양쪽 날개죽지 밑으로 손을 넣어서 위로 꺾었다.
우드득!
“크윽···!”
대원의 양 어깨가 그대로 부서졌다.
그는 꿈틀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스으으···.
위층에서 내려온 매캐한 연기가 지하까지 깔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대원의 등 뒤로, 한건우가 말했다.
“여기 있는 게 나을 거다. 밖으로 나오지 마.”
철컥.
한건우는 자료실 문을 잠그고 나왔다.
그는 조승재가 갇혀있는 유리 감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