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60화 (60/238)

#60전쟁의 신

‘다들 왜··· 진심이지?’

한건우는 당황스러웠다.

<거짓 간파> 특성은 아무 때나 쓰지 않았다.

MP 부담이 크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거짓이라고 확신할 때만 썼는데···.’

이제까지 한 명도 <거짓 간파>에서 거짓으로 나온 경우가 없었다.

물론 한건우에게 나쁠 건 없었다.

그는 차은비가 필요했으니까.

차은비는 향후 15년간 한국에 나오지 않는 S급 힐러였다.

사실 한건우도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차은비를 죽여버리고 내가 힐링 특성을 흡수할까?’

그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그다지 내키지도 않았지만, 현실적인 부담도 있었다.

들키지 않고 죽이기에는 너무 거물이었으니까.

게다가 힐링 특성을 흡수한다 해도, 따로 힐러가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한건우는 안 그래도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다른 파티원들까지 일일이 신경쓰면서 싸울 수는 없었다.

‘역시 서포터는 필요해. 그리고 웬만하면 최고의 서포터가 좋지.’

그녀의 능력도 쓸 겸.

특수안보부에게 역 정보를 흘려서 교란도 시킬 겸.

여러모로 쓸모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건 한건우의 입장일 뿐.

차은비가 갑자기 왜 우호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차은비는 어쩌면 중립, 아니 중립보다 한 발짝 더 온 거다.

'갑자기 왜?'

그녀가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녀를 아무리 관찰해봐도 속마음은 알 수 없었다.

그 많은 특성 중에도 독심술 같은 건 없었으니까.

***

며칠 후, 길드 건물.

은설아와 임수호, 임진호가 회의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잠잘 때만 빼고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집과 길드 말고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길드 건물에 출퇴근하는 건 행정요원뿐이다.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은 출퇴근 의무는 없었다.

평소에는 자기 할 일을 하다가, 훈련이나 소집 때만 응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건우의 길드는 조금 달랐다.

“설아야, 넌 학교 안 가니?”

임수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전 안 가요.”

“물론 각성자는 학교에 안 가도 되지만··· 가고 싶은 생각 없어?”

“전혀요.”

은설아가 똑부러지게 대꾸했다.

하지만 뭔가 안쓰러웠던 임수호는 계속 물었다.

“건우 형이··· 아니 길드장님이 학교 가라고 안 해?”

“제가 싫다고 하니까, 대신 과외 쌤이랑 공부해서 검정고시라도 보래요.”

“아, 과외···?”

임수호가 호기심을 보였다.

한건우의 길드원들은 가방끈이 짧은 편이었다.

각성자 사관학교를 나온 차은비는 논외로 하고.

고졸인 한건우와 금해준이 가장 학력이 높았다.

물론 대학에 가는 사람이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지만···.

“우리 셋 다 초졸 아니야?”

“끄응···.”

임진호가 핵심을 찌르자, 임수호는 신음을 흘렸다.

“왜요. 오빠도 공부하고 싶어요?”

“아니··· 이제 와서 무슨···.”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잖아요.”

은설아가 어디서 들은 말을 했다.

열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나이든 만학도 취급을 당했다.

임수호가 푸스스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저 형이랑 같이 살아남는 데 바빴네.’

임수호에게는 그저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한건우라는 귀인을 만나서 이렇게 살아는 있지만.

‘건우 형이 아니었으면··· 우리 둘 다 7룡성의 투견장에서 죽었겠지?’

어릴 적 친했던 한건우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만 해도 감동이었다.

한건우가 S급 플레이어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임수호 형제는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었다.

오직 한건우 덕분에.

그런데 의문도 있었다.

‘건우 형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줄 이유가 뭘까?’

아무리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안 됐다.

형제는 며칠 간 고민했지만, 뚜렷한 답은 안 나왔다.

결론은 한 가지로 흘렀다.

‘건우 형이 괜히 데려왔다고 후회하지 않게, 우리가 무조건 잘 하자.’

그런 점에서는 쌍둥이 형제의 마음이 통했다.

덜컥!

회의실 문이 열리고, 금해준이 들어왔다.

그는 손에 서류를 잔뜩 들고있었다.

“흠···.”

글자 읽기를 싫어하는 임진호가 작게 침음했다.

금해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금해준이 회의실 탁자 위에 서류를 좌르륵 펼쳤다.

“자, 이제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뭘 말입니까?”

“우리 길드의 이름 말이죠.”

이건 상상하지 못한 주제였다.

“길드 이름요?”

은설아도 귀를 쫑긋하며 탁자로 가까이 왔다.

금해준은 진지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길드명 없이 허가를 받은 길드는 우리뿐일 겁니다.”

한건우가 백지 문서로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식 길드명 없이 진행되었다.

전투력 측정 때도 마찬가지였다.

측정 기록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아직 기록판에는 ‘NONAME’으로 남아있었다.

언론 보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건우 길드’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예요?”

임수호가 주르륵 펼쳐진 서류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금해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예전부터 상표 등록을 해놓은 겁니다. 우리 길드 이름 후보죠.”

“상표··· 등록이요?”

“예. 나중에 길드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할지 많이 고민됐거든요. 그래서 그럴싸한 이름이 생각나면 그때그때 등록해놨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임수호와 임진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금해준의 눈이 빛났다.

자신의 행동이 쑥스러우면서도 내심 자랑스러운 듯했다.

‘정말 재벌집 아들이란···.’

임수호는 그의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상표권 등록이란 게 뭔지는 잘 몰라도, 만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임수호가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졸부가 된다 해도, 금해준처럼 거침없이 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임수호는 서류더미를 넘겼다.

자신이 소속된 길드 이름이니, 멋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르 메이에르··· 프리미어··· 더 퍼스트··· 에이스··· A1?”

임수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모두 ‘최고’라는 뜻을 담고 있죠. 최고의 길드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약간 옛날 아파트 이름 같기도 하고···.”

“<일성>이랑 너무 비슷한 것 아닐까?”

어느샌가 뒤에 서있던 한건우가 말했다.

“앗, 마스터께서 오셨군요. 맘에 드는 이름 있으면 골라주시죠.”

금해준이 반색을 했다.

한건우는 큰 관심은 없었다.

“이름 같은 건 어찌 되었든 상관없어. 전에 보니까 설아가 이름 잘 짓던데.”

은설아가 테이밍한 마수들의 이름을 지어준 게 생각났다.

흰둥이랑 뭐··· 검둥이였던가?

그러나 한건우와 은설아 말고는 다들 표정이 안 좋았다.

“...마스터께서 골라주시죠. 길드의 이름에는 철학과 나아갈 방향이 담겨있는 거니까요.”

금해준이 적극적으로 권했다.

한건우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금해준이 너무 많은 이름을 선점해버려서 남들은 뭘로 이름을 짓나 할 정도였다.

수십 개의 고만고만한 이름을 지나치자, 좀 낯선 단어들도 나왔다.

신화에서 따온 신의 이름 같았다.

인드라, 아그니···

한건우가 가진 특성에 들어간 신들도 보였다.

“난 저게 괜찮네.”

한건우가 가리킨 자리에는 이런 이름이 있었다.

[아레스(Ares)]

“이게 무슨 뜻이죠? 영어인가···.”

임수호가 묻자, 금해준이 설명했다.

“신화에 나오는 강력한 전쟁의 신의 이름입니다.”

“멋있는 것 같아요.”

“저도.”

분위기를 보고, 금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름이 정해진 것 같네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금해준이 만족스럽게 서류를 갈무리했다.

그때 한건우는 고요한 문 밖을 바라보았다.

‘또 왔군.’

솜브라의 리더, 이비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제 제2의 길드원 같을 만큼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건우는 복도로 나가서, 기둥 뒤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기둥의 그림자에서 이비현이 스르륵 나타났다.

이제 이비현은 놀라지도 않았다.

“의뢰하신 것 관련해서, 중간 보고 드리려구요.”

이비현이 회의실 안쪽을 흘깃 보았다.

그녀가 싫어하는 차은비는 오늘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벌써?”

의뢰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건우는 반신반의했다.

독점 계약의 약발이 먹힌 걸까?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무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네. 어디서 말씀드릴까요?”

“따라와.”

한건우가 개인 공간인 집무실로 갔다.

이비현은 고양이처럼 발소리 없이 따라왔다.

“먼저 그 유적 사냥꾼 무리인데요.”

이비현에게는 그들이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인상착의와 특징을 설명해주고, 그런 그룹이 있는지 은밀히 찾아보라 했을 뿐.

“사실 요새는 범죄자들 중에서도 유적 사냥만 전문으로 하는 집단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수소문하니 금방 꼬리를 잡았어요.”

남들이 공략하는 균열 안에 따라들어가서 몰래 아이템을 가로채거나 약한 각성자에게 강도 짓까지 하는 집단.

막타를 가로채서 마정석을 뺏거나 하는 얌체 짓도 했다.

균열 발생 초반에는 그런 자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한때는 균열 공략보다 유적 사냥꾼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들다는 얘기까지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길드의 경계도 강화됐고, 정부에서도 단속이 심해졌다.

전직 유적 사냥꾼들은 사설 용병단으로 전직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짓을 하던 자들을 길드나 정부에서 받아줄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이비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들이 실종되었거나 안 보인다는 얘기겠지.’

모두 한건우에 의해 잿가루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건우의 예측은 빗나갔다.

“···그들이 전원 F급 각성자들이라는 겁니다.”

“뭐라고?”

한건우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그들과 싸웠고, 어렵지 않게 이겼다.

하지만 절대 F급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F급은 범죄를 당하면 몰라도, 각성자 세계에서 범죄 집단이 되기에는 너무 약했다.

“재각성을 한 건 아니고?”

“그건 아닐 겁니다. 원래는 다른 무리에서 화살받이 역할을 했던 자들이라고 하구요.”

하긴 그럴 리 없었다.

재각성이란 건 드물고,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한 무리가 단체로 재각성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문양 관련해서··· 요즘 사설 용병이나 도둑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비현이 손끝으로 자신의 목 옆부분을 두드렸다.

“마기 증폭 시술이요.”

“···!”

그들의 목에 나 있던 이빨 자국 같은 모양.

그건 시술의 흔적이었던 모양이다.

“마기 증폭 시술을 받으면 하급 각성자도 재각성한 것처럼 강해질 수 있다고 해요.”

“음···.”

“관심 있는 사람이 많은데, 광고를 하기는커녕 시술 받은 사람에게 물어봐도 절대 말하지 않는대요.”

한건우가 그들의 목에 있던 자국을 떠올렸다.

“그 이빨 자국 같은 모양이, 시술 자국이라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본 적 있어.”

회귀 전에 한두 번 봤던 사설 용병들, 그리고 그 유적 사냥꾼들의 목에서.

한건우는 미심쩍었다.

‘그런 게 있다면 미래에 널리 알려질 만도 한데?’

블랙 마켓에도 종종 불법 스탯 강화 약물이나 시술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사기였다.

효과는 미미하고, 부작용이 너무 커서 위험했다.

멋 모르는 어린 각성자들이나 혹할까.

그런데 이 시술은 달랐다.

부작용이 심한지는 몰라도, 효과가 있기는 했다.

한건우는 그들과 직접 싸워보았으니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놈들이 죽은 건, 시술과 관련이 있는 건가.’

유적 사냥꾼들의 새까매진 목, 그리고 몸 속에서 피어난 독 연기.

한건우가 ‘누가 보냈느냐’고 추궁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배후를 말하지 말라는 조건이 걸려있는 거야.’

보나마나 그 배후는 특수안보부의 끄나풀일 테고.

그걸 말하지 못하게 했다는 건···.

한건우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마기 증폭 시술이라는 것 자체가 특수안보부와 연관이 있어.’

범죄 집단을 약물로 강화해주고,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조종하고.

정말 그들다운 발상이었다.

‘그 시술을 하는 곳을 찾아내서 박살내야겠군.’

그렇게 특수안보부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드디어 구체적인 목표가 보였다.

한건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비현의 정보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찾아봤습니다. 최근에 갑자기 강해진 각성자가 있는지요. 같은 시술을 받은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시키려고 했던 일을 미리 해오다니.

한건우는 그녀가 일하는 게 점점 마음에 들었다.

“결과는?”

“한 명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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