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함정 (3) - 거짓 간파
한건우는 새로 얻은 특성을 살펴봤다.
고작해야 도굴 짓을 하는 유적 사냥꾼들.
나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인물은 없었다.
한 마디로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상성이 맞는 쓸만한 특성 한둘 쯤은 나오겠지?’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오.”
[특성 : 침묵]
- 접촉한 사물의 소리를 없앨 수 있다.
아까 리더가 쓰던 능력 같았다.
마력 기관단총을 쏘는데, 음량을 끈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소음기 아이템을 달았나 했더니, 이런 특성이었다니.
‘이건 괜찮은데.’
흡수를 못 하고 넘어갔으면 억울할 뻔했다.
그외에도 소소한 수확이 있었다.
[특성 : 부패의 시간]
- 대상의 부패나 부식을 빨라지게 한다.
[특성 : 믿음의 방패]
- 아군 전체에 물리적 방어막을 형성한다.
···
아니, 소소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적들이 가지고 있을 때는 대수롭지 않은 특성일지 몰라도, 한건우의 손에 있으면 달라질 테니까.
한건우가 특성창을 확인하는 동안, 임수호 형제는 이것저것 아이템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와는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독 연기가 남아있을지 몰랐다.
“이 단검은 꽤 괜찮은데?”
“건틀렛은 별로. 다 부서졌네.”
워낙 험하게 살아온 형제였다.
죽은 자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만지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아 맞다. 아까 그 총!”
임수호가 죽은 리더 쪽으로 뛰어갔다.
리더는 쓰러진 채로 마력 기관단총을 쥐고 있었다.
“장갑 껴. 독이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알겠어.”
임수호는 마수 가죽으로 된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총을 집어들었다.
“와, 좋은데?”
총기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검은색으로 빛나는 미끈한 총신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건우 형. 이런 총기 아이템이 흔해? 아까 하마터면···.”
임수호는 말을 흐렸다.
그는 이 총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느꼈다.
한건우가 그때 안 왔다면, 자칫 위험할 뻔했다.
“앞으로 절대 만용은 부리지 마.”
한건우가 따끔하게 충고했다.
임수호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놈들이 드래곤에 손상을 입힐까봐···.”
“저런 기계로는 비늘에 흠집도 못 낼걸.”
마창 게이볼그 정도 되면 모를까.
창날로 드래곤의 뱃가죽을 갈라서, 염동력 특성으로 심장을 조심조심 꺼내느라 꽤 고전했었다.
그 후 빙룡의 심장은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다.
바로 한건우의 손에.
한 시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침입자들은 애초에 헛수고를 한 것이다.
“알겠어··· 앞으로 반드시 명심할게.”
임수호가 기관단총의 손잡이를 한건우에게 내밀었다.
한건우는 총을 잡고 아이템 창을 확인했다.
[데스 트루퍼]
‘죽음의 포병이라.’
진짜 탄환이 나가는 클래식한 총기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그렇다고 일반 탄창을 쓰는 건 아니었다.
마력 탄환을 계속 공급해야 하니, 그것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검이나 활, 창 같은 아이템은 균열에서 보상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총기는 달랐다.
이런 건 기술자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간단한 아이템을 만들기도 어려운데, 총기형 아이템이라니.
만들기 까다로을 게 뻔했다.
이 총은 그 중에서도 독특했다.
강한 건 둘째치고, 쓸데없이 멋을 부려놓아, 총신과 손잡이에 고전적인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이건···?”
한건우는 총을 휙 뒤집어보았다.
역시 손잡이 아래쪽에 서명이 있었다.
‘Y. P.’
회귀 전 한건우가 잘 알던 아이템 기술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럴 인간이 아닌데?’
한건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기술자는 자존심과 고집이 대단했다.
적어도 도굴꾼에게 아이템을 팔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왜 뭐, 문제 있는 아이템이야?”
임수호가 물었다.
“아니, 아마 현존하는 최고의 총기 아이템 중 하나일 걸.”
“와··· 어쩐지.”
한건우는 죽은 리더의 허리춤을 뒤졌다.
마력 탄창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때 설원 건너편을 본 임진호가 말했다.
“또 몬스터 웨이브야.”
빙하기 균열의 마수들이 새카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한건우는 주변의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정부나 공사 관계자가 들어오면 바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시체들은 어떻게 한다?’
고민은 짧았다.
아직 살인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한건우는 익숙지 않은 특성을 써보았다.
[특성 발동 : 부패의 시간]
프스슥!
스스스스···.
시체들이 한순간에 잿빛 가루가 되어서 허공으로 날렸다.
썩어들어가는 건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허억!”
임수호가 얼굴이 새하얘져서 비명을 질렀다.
이런 능력은 처음 보았다.
잘못 스쳤다간 몸의 일부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감까지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데?’
한건우는 부패의 속도에 놀랐다.
특성창의 설명을 다시 한 번 보았다.
- 대상의 부패나 부식을 빨라지게 한다.
‘시체를 부패시키는 것뿐 아니라, 물건을 부식시킬 수도 있다는 건가?’
내친 김에 그것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한건우는 부서진 건틀렛 하나를 주워들고 <부패의 시간> 특성을 썼다.
쩌억-.
푸스스스···.
아무리 싸고 흔한 건틀렛이라지만, 그래도 마력이 담긴 아이템이었다.
금속제 건틀렛이 힘없이 쩍 쪼개지더니, 순식간에 녹이 슬었다.
“뭐야···?”
임수호가 놀라는 가운데, 건틀렛은 마치 몇천 년만에 땅 속에서 파낸 고대 유물처럼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흔적도 남지 않고 부스러져 잿빛 가루로 날렸다.
마치 영상을 엄청나게 빨리감기한 것처럼.
“그런데··· 이 자들이 들어오는 걸 누가 봤으면 어쩌지? 우리를 의심한다면.”
임진호가 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문제 없어. 도굴하러 왔다가 마수에게 잡혀먹었나 보다 하겠지.”
한건우는 해자 아래의 마수 시체들을 가리켰다.
과연 저 안에서 사람 몇 명 정도 잡아먹혔다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건우 형, 그런 특성도 있었어?”
임수호는 그런 것보다는 한건우의 능력에 관심을 가졌다.
“음, 뭐.”
한건우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그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에는 일렀다.
자신의 특성이 몇 개나 되는지도. 그리고 각성자를 죽이면 특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도.
아직은 내부 정리가 먼저였다.
***
다음날 아침, 길드 회의실.
임수호 형제가 며칠 만에 길드로 돌아왔다.
한건우는 회의를 시작했다.
“어젯밤, 우리 길드가 관리하는 미공략 균열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론을 먼저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네에?”
금해준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얼굴빛이 사색이었다.
그가 소파에서 등을 떼고 바짝 앞으로 당겨앉았다.
“···설마 설마 드래곤 사체를 털린 건, 그건 아니죠···?”
금해준의 머릿속엔 이미 최악의 가능성까지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랬으면 나가 죽어야겠지.”
“후우우···.”
금해준은 겨우 안심이 되어서 등을 소파에 쭉 붙였다.
요즘 금해준은 자나깨나 빙룡의 사체 생각뿐이었다.
드래곤의 사체를 활용해서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하루종일 알아보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걸 빼앗길 뻔하다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어디서 온 침입자였나요?”
금해준과는 반대로, 은설아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건 이제 알아보려. 중장비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전문 유적 사냥꾼들 같아.”
“유적 사냥꾼이요?”
은설아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각성자 세계에 대해 아직 지식이 짧았다.
이것저것 배우고는 있었지만, 한건우에게 듣는 게 제일 정확했다.
“다른 사람이 균열을 공략할 때, 몰래 균열 입구에 숨어 들어가서 이계 유적이나 아이템만 주워서 나오는 놈들이지.”
“음··· 도둑들 같은 거네요?”
유적 사냥꾼들은 당연히 정식 길드가 아니라 도굴꾼 집단이었다.
균열 안에서 몰래 강도 짓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평이 좋지 않았다.
“그래. 원래는 미공략 균열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놈들인데.”
“그런데 왜 들어왔을까요?”
“아마 나름대로 들은 게 있었을거다. 우리 길드가 미공략 균열 안에 귀중한 걸 숨기고 있다고, 어디선가 말이 새어 나갔겠지.”
“아하···.”
은설아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도 이제 어엿한 길드원이었다.
아이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은설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금해준이 흠칫 놀랐다.
‘LK 기술팀 측에서 새어나간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 없어.’
연구원들은 엄격한 비밀유지 계약을 맺고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동종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산업 스파이 짓을 해도 이득이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세상 일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
금해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을 탓했다.
“···길드 문서 보안을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수호와 임진호 형제도 한 마디씩 했다.
“그놈들, 유적 사냥꾼치고는 실력이 좋았어요. 전 거의 죽을 뻔했어요.”
“죽을 정도였나··· 위험한 건 사실이었습니다.”
한건우는 자기 옆에 앉은 차은비를 주시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회의석상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
미공략 균열이 습격받았다는 말을 듣고도, 그녀는 태연했다.
관심 없다는 듯 조용히 홍차만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전에도 길드원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살짝 겉돌던 그녀였다.
‘차은비, 어떻게 나올 거냐.’
그녀가 특수안보부에 협력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흘린 정보를 덥썩 무는 자들이 나올 것이라는 것도.
이번에도 곧바로 낚시에 걸려든 이들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특수안보부가 범죄조직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건우는 이비현에게 추가 의뢰를 했다.
죽은 유적 사냥꾼들의 인상착의, 사용한 장비,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빨 자국 같은 흉터.
그 정도면 충분히 단서를 찾아내겠지 싶었다.
다음번 균열이 터지면 공략할 계획을 짜고, 회의를 끝냈다.
차은비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한건우의 뒤를, 차은비가 바짝 따라왔다.
“마스터.”
“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차은비를 집무실로 데려가서, 커피를 한 잔 타주었다.
그녀는 믹스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차은비는 여전히 한건우를 마주보지 않았다.
그건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의심받을까봐 미리 변명을 하려고 드는 걸까?’
어디 무슨 변명을 하려고 하는지, 한건우는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
한건우가 반응을 안 보이자, 차은비가 한숨을 쉬면서 설명했다.
“어젯밤 침입은, 아무래도 제가 말을 흘려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구에게 무슨 말을 흘렸다는 거죠?”
한건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차은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가 외부인에게, 미공략 균열에 귀중한 게 있다는 걸 말했어요.”
“....”
한건우는 대답 없이 듣기만 했다.
“설마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모르고 말한 건데··· 제가 완전히 판단을 잘못했어요.”
차은비는 눈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한건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여기서 차은비가 이렇게 나온다고? 전혀 추궁한 것도 아니고, 의심받는 상황도 아닌데.’
오히려 지나치게 담백하게 나오니 이상했다.
한건우가 물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죠?”
차은비는 여기서 한 번 더 한건우를 놀라게 했다.
“솔직히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일 거예요. 제 입장이 변하는 건 아니어서.”
“뭐라고요?”
“그런데 저 때문에 피해가 가는 건, 저도 싫어요.”
줄곧 시선을 피하던 차은비가 한건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외부인’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미리 알려주세요. 여기 있을 동안은 따를게요.”
“!”
이건 새로웠다.
스파이 짓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하겠지만, 한건우에게 협조하겠다는 뜻 아닌가?
한건우는 남몰래 <거짓 간파> 특성을 쓰고 있었다.
결과를 확인한 한건우는 속으로 신음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