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함정 (2) - 이빨 자국
설원 멀리서 침입자들을 보는 시선이 있었다.
“수호야, 저기 봐.”
“진짜 들어오네?”
며칠 전부터 빙하기 균열 안에 머물고 있던 임수호와 임진호였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막대한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해자에 뛰어든 마수만 잡다가, 곧 감질이 났다.
형제는 해자를 넘어가서 마수들을 직접 사냥하기 시작했다.
“수호야, 그거.”
“응.”
툭.
임수호는 곧바로 가죽 팔찌를 당겨서 끊어버렸다.
아룡종의 가죽으로 된 아이템으로, 두 개 중에 한 짝이 끊어지면 다른 짝도 저절로 끊어지게 되어있었다.
다른 짝은 물론 한건우가 가지고 있었다.
원래 한건우는 신호만 보내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임수호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그냥 기다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두터운 늑대 털가죽 갑옷을 입은 임진호와 달리, 임수호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얼음 특성이 있어 이 정도 추위에는 면역이 있었다.
“음....”
임진호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놈들, 우리가 상대해볼까?”
2명 대 12명.
쪽수로 상대가 안 되었지만 임수호는 자신감을 보였다.
얼음이 가득한 빙하기 균열.
임수호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그동안 늘린 스탯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건우 형은 신호를 보내라고만 했는데.”
“싸우지 말고 숨어만 있으라고는 안 했잖아?”
“하지만···.”
임진호는 동생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침입자들의 행동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침입자들이 중장비를 메고 빙벽을 타고 내려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드래곤 비늘에 흠집을 낼 게 뻔했다.
임진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막자.”
[특성 발동 : 빙정난류]
슈우욱-!
텅- 투두두-
얼음 결정이 탄환처럼 되어 날아갔다.
형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침입자들은 당황했다.
“크흑!”
“막아!”
몇 발은 명중했지만, 곧 상대편의 법사가 쉴드를 켰다.
설원 건너편에 있는 임수호 형제를 보고, 침입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저 놈들, 이쪽 길드원 같습니다. 둘 다 C급이고요. 한 놈은 얼음 특성자고, 한 놈은 돌진 특성자입니다.”
그들은 임수호와 임진호의 정체를 바로 파악했다.
고유 특성까지도 알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리더가 코웃음을 쳤다.
“2명뿐이야? 먼저 저놈들부터 잡고 간다.”
C급 각성자들이면 만만치 않았지만, 침입자들 쪽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깊은 해자를 사이에 두고, 원거리 전투가 되었다.
임수호가 우뚝 서서 자리를 잡았다.
그가 손을 펴자, 바람의 성질이 바뀌었다.
“뭐지?”
피유우우-!
파바바바박!
몰아치는 눈보라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휘몰아쳤다.
커다란 우박이 침입자들을 향해 쏟아졌다.
“으윽!”
“숙여!”
임수호의 <빙정난류>는 딱 맞는 환경을 만나자 힘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마치 블리자드의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투두두두···.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타앙! 타다다다-!
상대편의 리더가 기관단총을 쏘았다.
엎드려서 몸을 숨기고 삼각대로 받치고 있는 게, 제법 전문적인 자세였다.
임진호는 미리 펼친 방패로 자신과 동생을 보호했지만, 일반 총기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다.
마수에게도 효과가 있는 마탄이었다.
“수호, 조심해. 총기형 아이템이야.”
“저런 건 처음 본다.”
침입자들은 꽤 팀워크가 좋았다.
법사는 쉴드를 치고, 궁수들이 석궁을 쏘며 지원 사격했다.
피이잉-! 피잉-.
오히려 이쪽이 밀리는 상황.
임진호는 방패로 화살을 막으면서 고전했다.
‘저놈들, 원거리에서 더 센 것 같은데···. 차라리 가까이 건너가야 하나?’
그때, 리더 놈이 심상치 않은 탄환 한 개를 장전하는 게 보였다.
-....
“조심해!”
총이 발사되는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호는 임수호를 밀어서 옆으로 굴렀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쿠콰아아-!
등 뒤의 바닥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푹 꺼졌다.
임진호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런 건 내 방패로는 절대 못 막아.’
게다가 장전이나 발사되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으니, 사소한 움직임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탄환을 장전하는 게 보였다.
임수호가 얼음을 움직여 빙벽을 세웠다.
임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는··· 도저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온통 넓은 설원.
저 무서운 탄환을 피할 곳이 안 보였다.
침입자의 리더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콰르르릉-
파지지지직!
설원에 시퍼런 뇌전이 내리쳤다.
“크어억!”
“윽!”
전격을 맞은 유적 사냥꾼 무리는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그들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굴었다.
겨우 자세를 잡는 그들의 앞에, 한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도,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S급 각성자.
길드 마스터 한건우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아직도 <인드라의 뇌전>이 맺혀 있었다.
“으아아-!”
한 명은 그를 피하려다 발을 헛디뎌 깊은 해자 아래로 추락했다.
크르렁!
크르르르르···.
해자 아래는 샤벨 타이거의 땅이었다.
아래쪽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자, 유적 사냥꾼들이 사색이 되었다.
한건우가 해자 건너편의 임수호 형제에게 말했다.
“신호만 보내라니까.”
“건우 형! 조심해!”
임수호가 소리쳤다.
유적 사냥꾼의 리더가 슬금슬금 기어서 마력 기관단총을 잡고 겨냥하고 있었다.
기관단총의 조준쇠 사이로, 그 리더와 한건우의 눈이 마주쳤다.
리더의 검지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찰나의 순간.
한건우는 그때를 기다렸다.
[특성 발동 : 위상 전환]
-시선이 마주친 상대방과 공간 좌표를 바꾼다.
파앗-
투웅-!
소리 없는 탄환을 맞은 사람이 쓰러졌다.
임수호 형제는 사색이 되었다.
“건우 형?”
그러나 탄환을 맞은 사람은 한건우가 아니었다.
“흐···?”
그 리더는 자기 자신이 쏜 탄환을 맞은 셈이 되었다.
“흐억!”
쓰러진 리더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방어구를 입은 몸통이 온통 너덜너덜했다.
‘이건 꽤 유용하군.’
사실 <위상 전환> 특성을 전투에 쓰기는 어려웠다.
MP와 HP 소모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이밍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본인이 더 위험해진다.
일대일 전투가 아니라면 적들이 바글바글한 근처로 이동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건우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상대방과 위치를 바꾸니, 한건우의 주변은 온통 적 투성이였다.
다들 궁수들이었다.
“주, 죽여라!”
그들은 단도를 들고 한건우에게 덤볐다.
“도굴꾼치고는 용감하군.”
스르릉.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뽑아들었다.
휘이잉-.
한건우가 한 손으로 창을 빠르게 돌렸다.
슈우웅-! 칭-! 치그르르-.
원심력을 받은 창날이 단도를 든 손을 무력화시켰다.
뒤로 물러나 석궁을 당기는 궁수들도 있었다.
타닥- 슈웅-!
한건우는 단 한 걸음에 그 거리를 좁혔다.
궁수들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다.
한건우는 바로 그들의 목숨을 끊지는 않았다.
알아낼 게 있었으니까.
그들의 석궁을 뺏어 해자 밑으로 던지고, <인드라의 뇌전>으로 한 번 더 지졌다.
궁수들은 기절해서 픽 쓰러졌다.
그리고 건너편의 임수호에게 신호를 했다.
쿠구구···!
임수호는 얼음 다리를 만들었다.
해자를 건너오려는 것이었다.
남은 건 검사와 권사들이었다.
그들은 가져온 중장비도 내팽개치고 균열 입구 쪽으로 내빼려 했다.
그그그그···!
도망가려는 그들의 앞을 얼음 벽이 막아섰다.
유적 사냥꾼들은 우왕좌왕했다.
채앵!
“살려 주십시오!”
한 놈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 모두들 동요했다.
한건우는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챙! 채앵!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돈 욕심에 들어온 도굴꾼들이었다.
목숨만이라도 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건우는 그들을 무시하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리더에게 다가갔다.
“누가 보냈고, 어디서 왔지.”
“....”
“상세히 말하면 살려주마.”
파지직!
“!”
한건우의 손끝에 푸른 전격이 일어났다.
유적 사냥꾼 리더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건···.”
리더가 뭐가 말하려는데, 한건우는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의 목 언저리가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물러서!”
한건우는 뒤에 있던 임수호 형제에게 경고했다.
리더의 코에서 짙은 검은색 연기가 퍼졌고, 그의 입은 시커먼 거품을 물었다. 까뒤집혀서 충혈된 흰자위만 보였다.
‘독이야.’
한건우는 <공간 왜곡>을 펼쳤다.
리더의 몸 주위를 밀폐시켜서 독 연기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건우는 주위에 기절시킨 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비슷한 사정이었다.
“억!”
“이게 다 뭐야?”
임진호와 임수호가 놀라 숨을 삼켰다.
그때 한건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차피 가만 놔둬도 죽겠군.’
한건우는 <공간 왜곡>을 풀고, 창으로 리더의 가슴을 찔렀다.
푸욱!
이미 마탄에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몸이었다.
리더는 단말마의 비명도 못 지르고 숨이 끊어졌다.
파지지직!
한건우의 손끝에서 강렬한 전류가 쏟아져나갔다.
전류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적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독으로 죽게 둘 바에, 특성도 흡수할 겸 직접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임진호와 임수호는 놀란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형이 화가 많이 났나?”
“그럴 만도 하지.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 사체를 훔치러 왔는데 나 같아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한건우를 보고, 임수호 형제는 눈치를 보았다.
한건우가 분노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건우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악마의 권능(유일) 발동 : 탐식]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특성 흡수 중
...
오랜만에 빛나는 권능 창이었다.
시스템에서 ‘죽인 자’로 인정하는 기준이 뭔지, 한건우는 궁금했다.
타인을 죽이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직접 때리거나 찔러서 죽이는 건 물론이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서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전투 중에도 마찬가지다.
직접 타격을 가하지 않더라도 전투에 휘말려서 죽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상당히 단순했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특성을 써서 죽이거나, 물리적으로 타격을 가해서 죽인 경우만 인정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전부는 아니군.’
그래서 침입자 12명 전원의 특성이 흡수되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깔끔하게 내 손으로 다 죽일걸.’
지나간 일이지만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한건우는 혀를 차면서 리더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어중이떠중이 유적 사냥꾼이 아니었다.
동원한 장비가 상당히 전문적이었고, 마치 훈련 받은 부대원들처럼 팀워크가 좋았다.
‘<염제>처럼 특수안보부와 관련이 있는 범죄조직이겠지.’
이 참에 특수안보부의 꼬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다 죽어버리는 바람에 심문은 못 하게 되었다.
스파이가 생포되면 자폭하는 것처럼, 이들은 석연치 않게 죽어버렸다.
한건우는 리더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독으로 온통 검어진 채였다.
임수호 형제도 가까이 다가왔다.
임수호가 시체의 목 부분을 가리켰다.
“이건 뭐야, 이빨 자국인가?”
“뭐?”
임수호가 가리킨 쪽을 보니, 조그만 이빨 자국 같은 게 보였다.
마치 조그만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이빨 자국은 아니고··· 흉터나 문신 같기도 해.”
“....”
분명히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다.
한건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회귀 전, 어떤 용병조직 대원들이 이런 걸 갖고 있었어.’
그 용병들은 공통점도 있었다.
등급에 비해서 눈에 띄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임수호 형제는 흩어져서 다른 시체들도 살펴보았다.
“이 사람도 똑같은 게 있다.”
“여기도···.”
한건우는 유적 사냥꾼들의 시신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솜브라와 독점 계약을 맺길 잘했군.’
벌써 시킬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