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함정 (1)
이비현이 반쯤 넘어온 것 같았지만, 한건우는 한 발짝 더 나갔다.
‘말만으로는 모자라지.’
그녀를 움직일 당근을 하나 더 주기로 했다.
“그 대신, 독점 계약을 하자. 1년 단위로 선입금을 줄게.”
“네? 독점이라뇨.”
“앞으로 모든 의뢰는 솜브라에 독점으로 맡긴다는 소리야. 개인적인 일이든, 길드의 일이든.”
“앗···.”
이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건 서로 윈윈이 되는 제안이었다.
한건우는 이제 이끌어야 할 조직이 생겼다.
사소한 걸 직접 알아보러 다닐 시간은 없었다.
특히 정부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려면, 미등록자 조직인 솜브라를 통하는 게 나았다.
한건우 대신 발품을 팔아서 정보를 알아보거나, 남몰래 구할 물건이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솜브라의 인력을 이용할 일은 많았다.
그리고 또다른 의미도 있었다.
‘선금을 주고 독점 계약이라니. 파트너 관계란 게 말뿐은 아니구나.’
이비현은 한건우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졌다.
선입금을 받는다면 조직이 훨씬 안정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건우의 길드가 커갈수록, 음지에 있는 솜브라의 힘도 커질 수 있었다.
“저희는 당연히 좋습니다.”
이비현은 너무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유영원 대장님은··· 설마 이렇게 될 것까지 예측하고서 그 균열에 들어간 걸까?’
솜브라의 전임 대장 유영원은 자신이 본 미래를 입밖에 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순전히 이비현의 상상이었다.
유영원이 거기서 실종되지 않았다면, 한건우와 이비현은 얽힐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한건우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유영원은 아마 암흑 균열에서 거미 마수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싫었다.
솜브라는 암살자 조직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겠지.
‘이건 꼭 붙잡아야 할 기회야.’
이비현은 한건우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
차은비는 휴대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부재중 통화 목록에 반갑지 않은 이름이 보였다.
‘이 사람 좀 안 만나고 싶은데···.’
특수안보부의 천명환에게 직접 연락이 온 것이다.
차은비도 대충 알고는 있었다.
특수안보부에서 최상급 각성자들 몇몇을 전담 마크해서 관리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랑 한건우 플레이어를 맡은 담당자가 천명환 선배인가 보네···.’
하필 싫어하던 선배와 자꾸 엮일 게 뭐람.
그러나 차은비로서는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친정인 일성 길드는 특수안보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특수안보부는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들로 꽉 채워져 있지 않은가.
동문들에게 밉보이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차은비가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전화하셨어요?”
[차 부장···. 아니 이젠 부장은 아닌가? 바쁘지도 않을 건데 왜 전화를 바로 안 받지?]
차은비는 짜증이 팍 솟았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천명환은 안심할 수 없는 놈이었으니까.
전화를 걸어놓고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하, 신생 길드라서 더 바쁘죠···. 헉.”
아니나 다를까.
떡하니 천명환의 차가 보였다.
은신 스킬로 숨기고 다니는, 시커멓고 기분나쁜 차였다.
검은 차의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차 부장, 잠깐 타지.”
“···네.”
차은비는 싫은 티를 안 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왜 뭐 씹은 표정이지? 월급이 줄었나?”
“···무슨 일이세요? 직접 저를 찾아오시고.”
하지만 차은비도 알고 있었다.
한건우에 대해서 캐내려고 온 것이겠지.
천명환도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희 길드 마스터, 한건우 말이야.”
“네.”
“얼마나 강한 것 같나?”
천명환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는 정부에 있는 한건우의 기록을 다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매우 미심쩍은 사실을 발견했다.
각성센터의 측정실에 갔을 때였다.
한건우의 최초 측정기록이 기기 오류로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결과 등급만 나오고, 세부적인 기록은 하나도 안 보였다.
“무슨 말씀을··· 한건우 플레이어는 S급 아닌가요. 말할 필요도 없죠.”
천명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S급’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그의 해묵은 열등감이 자극되었다.
“차 부장이니까 물어보는 거야. 다른 S급들과 비교해서 어떤지 알 거 아닌가.”
“....”
생각에 잠긴 차은비가 눈을 위쪽으로 돌렸다.
길드 허가 때, 전투력 테스트에서 한건우가 싸우는 걸 봤다.
그 후에 인공 균열에서 훈련하는 모습도 봤다.
사실 그녀도 납득이 안 가는 면이 있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됐고, 각성자 사관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그 엄청난 활용 능력은 뭐지?’
다른 사람들은 S급이니까,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S급 각성자는 원래 초자연적일 정도로 강하니까.
웬만한 각성자들도 크게 이상하다고 못 느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차은비는 달랐다.
본인이 S급이었고, 전투 계열 S급 각성자들은 거의 알았다.
그 중에서 처음부터 저렇게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점이 그뿐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특성이 3개 이상인 것 같기도···.’
각성자의 능력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 어려웠다.
특성인지 스킬인지는 여러 번 봐야 추측할 수 있는 정도였다.
활용 범위가 정해져 있는 스킬과 달리, 특성은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한건우가 같은 길드원이라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건우는 길드 마스터였다.
‘S급 플레이어가 개화한 특성이 2개도 아닌 3개 이상이라면···.’
그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차은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천명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뭐, 상당히 강하죠.... 특히 경력이 짧은 걸 고려하면.”
천명환이 답답해서 이마를 찌푸렸다.
“하, 그런 대답은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도 하겠다.”
“하하···.”
차은비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난 한건우 플레이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
정확한 특성도, 클래스도.
천명환이 아무리 캐내려 해봤자, 몰라서 말을 못해줄 지경이었다.
“한건우가 쓰는 무기 말이야. 어떤 거지?”
“무기요?”
한건우가 다루는 무기는 여러 개 있었다.
기본적인 장검은 물론이고, 투척용 단검, 석궁까지 막힘없이 다뤘다.
“그 창 말이야.”
“아, 그거요.”
창날이 검은색이고, 중심이 잘 잡혀있는 창이었다.
마력을 불어넣을 때 은빛 룬 문자가 나타나는 것도 보았다.
무슨 무기인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보기 드물게 훌륭한 창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얘기하려다가, 그녀는 멈추었다.
‘천명환 선배가 몇 년간 무슨 창을 찾고 다니지 않았나?’
“그 창 이름이 혹시 마창 게이볼그, 아니었어?”
천명환은 태연한 체하지만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차은비는 아무것도 모른 척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템 이름은 확인해본 적이 없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알아볼게요.”
“후우··· 알겠어.”
사실 알아낸다 해도 말해주기 싫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차은비 본인도 잘 몰랐다.
“저, 선배.”
차은비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왜.”
“저도 이제 소속이 바뀌었잖아요. 이렇게 만나는 거...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리는데요.”
사소한 반항이었다.
천명환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게 지금, 앞으로 비싸게 굴겠다 이건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천명환은 참았다.
너무 함부로 다루면 차은비가 엇나갈지 모르니까.
“그래, 아무리 임시여도 충성심이란 게 있다 이거지.”
“....”
천명환이 비웃음을 잔뜩 담아 비꼬았다.
“한건우에 대해서는 차 부장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더이상 물어보지 않겠어.”
차은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나 천명환은 노골적인 요구를 했다.
“그런데 나도 보고서 올릴 꺼리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얼굴을 봐서라도 길드 현안 몇 가지만 알려줘. 사소한 거라도 좋아. 외부에서 모르는 거라면.”
“아니, 선배님···.”
천명환이 이 정도로 뻔뻔스럽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저렇게 대놓고 말하니 오히려 거절하기 어려웠다.
‘뭐, 이런 것까지는 말해도 상관 없겠지.’
차은비는 자기가 아는 것 중에서 몇 가지를 흘렸다.
“지금은 길드원 데리고 내부 훈련 중이고··· 곧 홍대에 있는 미공략 균열에 다시 들어간대요.”
“거긴 뭐 하러? 지금 <피라미드> 공사 중이잖아.”
“몰라요. 5일 후에 외부 기술팀 불러서 뭘 가지고 나온다는데요?”
차은비는 그게 뭔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드래곤의 사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잘 모르는 척했다.
‘이런 거라도 미리 보고하면 충분히 선배 체면은 세우겠지? 설마 뭐··· 길드에서 아이템 파밍 하는 걸 방해할려고?’
그러나 그건 차은비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
새벽 3시, 홍대의 미공략 균열.
공사중인 가건물 근처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LK그룹 산하 건설사에서 <피라미드>라 불리는 구조물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아직 정식 피라미드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임시로 덮어진 상태였다.
미공략 균열이 생긴 주변의 상권은 초토화되기 마련.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사를 갔고, 상점은 임대도 못 놓고 비워졌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노숙자 한둘만 신문지를 덮고 잠들어있었다.
“이놈들, 야간 보초도 안 세웠군.”
“정부가 아니라 신규 길드에서 맡아서 그런지··· 허술한 것 같습니다.”
열 명이 넘는 각성자 집단이 복면을 하고 나타났다.
몇몇은 중장비와 마력 총기를 들고 있었다.
유적 사냥꾼들이었다.
그들도 미공략 균열에 들어가는 건 꺼렸지만, 이번엔 욕심이 났다.
“통로는 확인됐나?”
“공사용 출입구 쪽은 생체 인증이 필요합니다. 외벽에 구멍을 뚫어보시죠.”
유적 사냥꾼 리더는 키가 작고 잔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어깨에는 마력탄을 발사하는 기관단총을 걸친 채였다.
“특이사항은?”
“아직 마수가 외부로 튀어나오지 않은 걸로 봐서, 마수 경계 시스템을 갖춰놓은 듯 합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는 빼고.”
리더가 비아냥거렸다.
오히려 내부는 걱정하지 않았다.
마수 경계 아이템은 마수만 탐지하고, 인간은 걸리지 않으니까.
‘타이밍만 잘 맞추면 빈집털이다.’
몬스터 웨이브 때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믿을 만한 정보에 따르면, 이 안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 있다고 했다.
한건우 길드가 무리해서 미공략 균열의 관리권을 받은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라고.
마석 광산이면 어차피 하루이틀에 채굴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도굴하러 들어가 봐야 의미없었다.
하지만 들고 나올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침입자들은 익숙하게 조를 나누어 작업을 시작했다.
맨 앞의 둘이 외벽에 중장비 기계를 들이댔다.
딱 봐도 소음이 어마어마할 듯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리더가 그 장비에 손을 얹자, 거짓말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음량을 0으로 줄여버린 것만 같았다.
-···.
중장비가 고요하게 임시 피라미드 외벽을 파고 들어갔다.
다른 부하가 부숴진 외벽에 임시 보호막 아이템을 붙였다.
“주변에 목격자가 될 만한 놈들 처리해.”
리더가 냉혹하게 명령을 내렸다.
푸욱! 푹!
근처 골목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있던 노숙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흑마법사로 보이는 각성자가 주문을 외었다.
스스스···.
노숙자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시체는 단 몇 분만에 오래된 무덤에서 파낸 백골처럼 변하더니, 회색 가루로 변해 푸스스 흩어졌다.
그동안 임시 피라미드 외벽에는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만들어졌다.
침입자들은 하나씩 안으로 들어갔다.
피라미드는 외부 침입에 취약한 편이었다.
일부러 미공략 균열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특수한 경우를 빼면 말이다.
휘이이이···.
피라미드 중심에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방어구 사이로 냉기가 스몄다.
미로 같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가자, 공간의 틈이 보였다.
“저기가 균열 입구입니다.”
“바로 들어간다.”
슈우우-.
“윽···!”
균열 안쪽은 대낮처럼 밝았다.
새하얀 설원의 빛이 눈을 찔렀다.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빙하기 균열이었다.
균열 입구를 둘러싸고 거대한 골짜기가 원을 그리며 파여있었다.
그 밑에는 무수한 마수의 시체가 보였다.
수 차례의 몬스터 웨이브가 지나간 흔적이었다.
“지형적으로 방어에 유리하게 되어있는데요?”
“그렇군.”
그 깊은 해자를 한건우가 팠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쪽에 포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수를 보면 반응하는 포탑이었다.
포탑은 인간의 침입 앞에서는 잠잠했다.
타다닥-.
크르르르···.
“마수가 있습니다!”
깊은 해자 아래에서, 샤벨 타이거 두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빙벽을 내려가는 건 쉬웠지만 올라오기는 어려운 듯했다.
샤벨 타이거의 발톱은 쉽게 올라오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포탑이 멈추었나···?”
살아있는 마수가 나타났는데 왜 포탑이 잠잠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어서 돈이 될만한 걸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대장님, 저, 저기 밑에 보십시오!”
한 명이 해자 아래쪽을 가리켰다.
“뭐가 있다는···.”
“어?”
흰 빙벽의 색깔 때문에 눈에 띄지 않던 거대한 형상이 드러났다.
비현실적인 위용에 유적 사냥꾼들마저 숨을 삼켰다.
“아이스 드래곤···?”
“으헉!”
그들은 겁을 먹고 바짝 엎드렸다.
당장이라도 드래곤 브레스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휘이이이-.
“....”
설원에서는 찬바람만 불어왔다.
그때 리더는 드래곤의 머리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고, 한 가지 확신을 했다.
그가 어깨에 얹은 기관단총을 장전했다.
주위에서 말릴 틈도 없었다.
철컥- 투두두두-!
소음을 없애는 특성을 쓰지도 않았다.
드래곤의 머리 주위 빙벽에 마탄이 박혔다.
“미, 미치셨···.”
리더를 말리려던 부하들이 말을 멈추었다.
드래곤은 미동조차 없었다.
잠을 자고 있다기엔 너무 조용했다.
“콧구멍을 봐. 숨도 안 쉬고 있잖아.”
“....”
유적 사냥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쳤다.
그들 사이에 벼락 같은 깨달음이 번졌다.
대박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월척이었다.
드래곤 뼈도 아니고, 멀쩡히 얼어붙은 드래곤 시체라니.
리더가 흥분 어린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간 없다. 드래곤 하트만 꺼내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