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파트너 관계
‘이 여자, 각성자야. 그런데 왜 기운을 숨기고 있지?’
갑자기 나타난 독특한 분위기의 여자.
차은비는 그 여자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여자는 자신의 기운을 눌러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S급인 차은비가 아니었으면, 각성자인 줄도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철저히.
“왔어?”
한건우가 반갑게 여자를 맞이했다.
그는 바로 훈련을 멈추고, 화염의 날개를 접고 땅으로 내려왔다.
“언니! 방금 나 봤어요? 잘 하죠?”
은설아도 약속이나 한 듯이 착륙했다.
‘···언니? 대체 누구지?’
차은비는 어리둥절했다.
새로 나타난 여자는 이들과 꽤 친해 보였다.
임진호나 임수호가 있으면 살짝 물어볼 텐데.
그들 형제는 오늘따라 안 보였다.
한건우가 그 여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여기서 얘기해도 돼. 다 내부인이니까.”
그 여자, <솜브라>의 리더 이비현은 차은비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은요?”
“?”
설마 자기를 말하는 건가?
차은비는 황당해서 머리가 띵했다.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이렇게 무례한 태도라니.
한건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가 정식으로 두 사람을 소개했다.
“자, 이쪽은 우리 길드원으로 새로 온 차은비 플레이어.”
“....”
이비현은 차은비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심지어 의례적인 목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저게 인사를 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차은비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길드와 파트너 관계에 있는 이비현 씨.”
“아···.”
그게 다인가 싶었다.
한건우의 소개를 들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일까?
게다가 이비현은 사막에 사는 부족처럼 얼굴을 꽁꽁 가린 채였다.
차은비의 반응은 까칠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안 보여주고 인사를 한다니 우습네요.”
이비현이 차갑게 받아쳤다.
“제 얼굴을 보시는 건 자유지만, 그 뒤의 안전은 장담 못 합니다.”
“···지금 뭐라구요?”
차은비는 귀를 의심했다.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야? S급 각성자인 나를?’
차은비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다.
바꾸어 말하면, 별 볼 일 없는 플레이어라는 얘기였다.
대단한 사람이라면 얼굴을 가려도 대충 알아봤을 테니까.
‘나이들어 은퇴한 랭커라면 내가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차은비의 눈이 매서워졌다.
없을 것 같지만, 정말 간혹가다 차은비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었다.
차은비가 전투 계열 플레이어가 아닌 힐러이기 때문이었다.
전투능력이 없을 거라고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차은비는 보통 힐러들과는 달랐다.
각성자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였다.
멋 모르고 덤비는 자들을 참교육해줄 정도는 되었다.
“어디 한 번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시던가.”
차은비가 쏘아붙였다.
두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주쳤다.
불길한 전운이 감돌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금해준이, 은설아 뒤에 숨어서 슬슬 피하는 게 보였다.
‘이런···’
한건우는 조금 곤란해졌다.
두 사람이 그야말로 상극일 거라고 생각은 했다.
서로 다른 의미로 사회성이 부족했으니까.
내향적이고 방어적인 이비현.
자기 중심적이고 톡톡 튀는 차은비.
도저히 잘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첫 인사부터 불이 붙을 줄이야.’
앞으로 둘이 마주칠 일이 있을텐데, 피곤하게 생겼다.
“차은비 씨.”
한건우가 낮은 목소리로 차은비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히 경고의 의미였다.
“···!”
차은비는 아차 싶었다.
한건우는 그녀의 길드 마스터였다.
비록 임시로 몸담은 길드지만, 어쨌든 소속은 여기로 되어있었다.
이비현은 길드 마스터 한건우의 가까운 지인 같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예의를 갖추는 게 맞았다.
차은비가 먼저 고개를 까딱 숙였다.
“죄송해요. 초면에 실례했네요.”
그 모습을 보고, 이비현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한건우 씨, 길드 마스터가 됐다더니. S급 각성자도 밑에 두고 부리는군.’
이비현은 차은비를 보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차은비를 모르는 각성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간판에, 대형 길드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차은비.
하나하나 이비현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요소들이었다.
‘플레이어인지, 연예인인지···.’
이비현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한건우에게 귀띔을 했다.
“저는 저 사람 불편해요. 기밀사항은 따로 얘기드리죠.”
귓속말이지만 또렷이 들렸다.
아니,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저게 진짜 끝까지!’
차은비는 부아가 잔뜩 났다.
이번은 한건우의 얼굴을 봐서 넘어가지만, 기회를 잡으면 제대로 손을 봐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인공 균열 안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마치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였다.
“무섭다···.”
“그러게요.”
금해준과 은설아는 멀찍이서 웅얼거렸다.
‘언젠가는 일이 터지겠구나···.’
금해준의 미간에 근심이 어렸다.
*
“늦었지만 길드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이비현이 어색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고장난 로봇처럼 쭈뼛거리길래, 한건우가 물었다.
“왜 그래?”
“저기, 이건 개업 축하 선물···.”
이비현이 아공간 창고를 열더니 커다란 화분을 꺼냈다.
한건우는 식물을 유심히 살폈다.
“균열에서 자라는 이계 식물인가?”
“···그냥 화분이에요.”
“아.”
아마 유영원이 시켜서 보낸 것 같았다.
시킨 일을 해내서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비현이 물었다.
“마수의 알, 지금 상태는 어때요?”
“분명히 살아는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부화는 안 돼.”
암흑 균열에서 얻은 마수의 알.
회귀 전, 한건우는 마수의 알에 대한 정부 연구소의 연구자료를 본 적 있었다.
가장 신비로운 점은, 알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슨 기운을 넣는지에 따라 다른 종류의 마수가 나오는 것이다.
알의 크기가 클수록 강한 마수가 나온다고 했다.
원래 알을 부화시키려면 마수가 둥지에서 알을 품어야 했다.
그러나 테이머도 마수의 알을 부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한건우는 쉽게 생각했다.
테이머인 은설아만 데려오면 알을 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현실은 조금 까다로웠다.
‘잘 모르겠어요···. 안에 분명 뭔가가 들어있는데, 어떻게 나오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은설아는 자신 없어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 상태라서, 다른 마수와 달리 소통도 안 된다고 했다.
‘균열과 비슷한 환경을 맞춰주면 부화하려나?’
마수의 알을 인공 균열이나 미공략 균열에도 가져가 봤다. 이것저것 시험해 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환경만으로는 모자라고, 뭔가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보통 동물 알은 어떻게 부화시키더라?’
새나 파충류의 알은 어떻게 부화하는 건지 알아보았다.
중요한 건 온도라고 했다.
온도가 안 맞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해서 소중한 알을 삶거나 얼려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결국 솜브라의 이비현을 만났다.
‘전국 블랙마켓의 마수 판매상들과 접촉해서, 마수의 알을 부화시키는 방법을 좀 알아봐 줘.’
정보 의뢰였다.
오늘 이비현은 그 답을 들고 온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기에, 한건우가 물었다.
“혹시 유영원 전임 대장이 방법을 알고 있었나?”
“전임 대장님도, 마수의 알을 부화시키는 정확한 방법은 모르세요.”
“그래?”
한건우는 좀 민망했다.
그건 유영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암흑 균열에 들어가서 가지려 했던 알이었다.
그걸 가져가놓고, 지금 와서 어떻게 부화시키냐고 물어보려니···.
“불법으로 마수를 파는 자들에게 좀 알아봤더니, 특이한 얘기가 들리더군요.”
“어떤 얘기야?”
“이계에서는 마수가 한 마리 태어나려면, 다른 마수 한 마리가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대요.”
“그게 무슨 말이지.”
한건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수의 알은, 죽은 마수의 마정석을 흡수시켜야 부활한다는 거죠.”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알에 기운을 넣는다는 게, 마정석을 말하는 것일까?
“···!”
한건우는 한 가지 놀라운 생각이 났다.
‘그럼 드래곤 하트를 넣으면··· 알에서 드래곤이 나올 수도 있나?’
그게 된다면, 그리고 태어난 드래곤을 길들일 수만 있다면···.
‘죽은 드래곤 시체도 좋지만, 산 드래곤을 가지는 게 훨씬 더 좋겠지.’
한건우의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전에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었다.
“마수의 알 말이야. 다른 정보는 더 없어?”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이비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한건우 씨가 가져간 알, 크기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던가요?”
“타원형인데, 크기는 사람 얼굴 정도? 너도 봤잖아.”
“아, 그렇게 컸나요.”
이비현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때 이비현은 유영원을 구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렸다.
다른 기억은 희미했다.
“문제가 있나?”
“그 크기면··· 블랙마켓에도 풀린 적 없을 거예요. 보통은 계란만하거나, 커도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라던데.”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연구자료에서도 직경 15cm 정도의 알에서는 A급 마수까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였다.
15cm보다 훨씬 크니까, 최소 A급 마수는 나온다고 봐야 했다.
‘좋아. 해보는 거야.’
이비현의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한건우는 곧바로 약속한 대가를 지불했다.
아공간 금고를 열어서, 현금 다발을 건넸다.
이비현이 깍듯하게 대금을 받았다.
한건우와 거래를 튼 이후, 그녀가 이끄는 솜브라는 상당히 풍족해졌다.
솜브라에 들어오고 싶다며 접선해오는 미등록자도 속속 생겨났다.
한건우가 이비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이비현. 요즘도 암살 의뢰를 받나?”
“아니요.”
전임 대장 유영원이 솜브라를 이끌 때, 솜브라는 암살 조직에 가까웠다.
물론 유영원도 돈만 준다고 아무나 의뢰를 받아주지는 않았다.
미등록자에게 돈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한 맺힌 복수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유영원은 예지 능력을 통해 나름대로 의뢰를 걸렀다.
그러나 암살을 주 업무로 해서는 오래 갈 수 없었다.
정부의 추적을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한건우라는 큰손과 만났다.
솜브라는 정보 조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영원의 예지 능력이 사라진 것도 한몫 했다.
자본금이 어느 정도 생기자 조직에 여유가 생겼고, 의뢰의 질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자 선순환이 생겼다.
위험한 암살 의뢰는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뭐, 한건우 씨가 의뢰하면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건우가 말했다.
“앞으로 암살 의뢰는 아예 받지 않는 게 어때?”
“네?”
이비현이 경계의 촉을 세웠다.
물론 한건우는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부모처럼 여기는 유영원을 구해준 은인이었고, 조직의 중요한 고객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건우의 말만 듣고, 조직의 방향을 쉽게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의지하는 수십 명의 부하들이 있었으니까.
“그건··· 저희 내부 사정도 있어서요. 검토가 필요한 일 같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범죄 조직으로 남는 건 너희들에게 독이야. 미등록자들의 이미지도 문제고.”
“....”
한건우가 아픈 점을 찔렀다.
그건 이비현이 가진 모순이었다.
그녀가 정부를 거부하는 이유는 뚜렷했다.
정부를 등에 업은 특수안보부가 각성자들의 인생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자유를 억압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비현 본인이 명분 없이 남을 해친다면···.
정부나 그녀나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선택은 자유지만. 난 너희들을 파트너 관계로 끝까지 데려가고 싶거든.”
“지금도 파트너가 아닌가요?”
한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미등록자들은 언젠가 양지로 나와야 하고,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그때를 미리 준비하는 게 좋아.”
이비현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는 한건우가 미래 예지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건우는 이비현이 착각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그게 그녀를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이비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