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52화 (52/238)

#52전투력 측정 (1) - 소꿉놀이는 집에 가서

한건우는 <일성>의 길드마스터 태일제를 똑바로 응시했다.

“1년만 파견 보내주시면 됩니다. 물론 차은비 플레이어의 연봉은 저희 쪽에서 지급하고요.”

“허, 잠깐 빌리겠다는 것인가.”

길드끼리 파견 형식으로 길드원을 교환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서로의 길드에 필요한 클래스가 있는 경우였다.

꼭 교환이 아니더라도, 대형 길드는 대가를 받고 다른 길드에 길드원을 임시로 보내주기도 했다.

옆에서 듣던 차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나를··· 파견이라고?’

오늘 아침, 차은비는 길드마스터 태일제에게 한건우의 말을 전했다.

‘한건우, 그 자는 우리가 7룡성의 장부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같은 무게의 황금을 제시했는데... 모자라다는 반응입니다.’

‘그래, 뭘 더 달라고 하던가?’

‘···일성 길드의 힐러를··· 저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묵살할 줄 알았다.

그러나 태일제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한건우 플레이어와 밥 한 끼 하고 싶군.”

“아···.”

“오늘 점심에 약속 잡지? 자네도 함께.’

‘네? 아,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차은비는 기분이 묘했다.

마치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식탁 앞에서, 태일제는 몇 분 동안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건우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성 길드는 대형 길드였다.

차은비를 100% 대체할 자는 없겠지만, A급이나 B급 힐러 정도는 꽤 있었다.

당장 균열 공략에 큰 지장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한건우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바로 특수안보부였다.

‘일성 길드는 차은비를 내주기 싫겠지만, 오히려 특수안보부 측에서 압박을 넣었을 거야.’

특수안보부는 지금쯤 한건우를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한건우를 지켜보기 위해, 그 옆에 스파이를 심고 싶어할 게 뻔했다.

그게 특수안보부의 스타일이니까.

‘이 기회에 차은비를 내 옆에 심고 싶어하겠지.’

한건우가 그걸 유도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태일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스터!”

차은비는 깜짝 놀랐다.

태일제는 한번 내린 판단은 무르지 않는 성격이었다.

‘파견 형식이라면 우리 일성도 크게 손해볼 것은 없고, 그놈들의 비위도 맞출 수 있으니.’

한건우의 짐작처럼, 태일제는 특수안보부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7룡성의 장부를 회수하려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수안보부에서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일성 길드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태일제가 오늘 한건우를 만난 것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떠오르는 신성은 내 가까이에 둬야지.’

아직 뚜렷한 세력은 없지만, 한건우의 행보는 남달랐다.

과감하면서도 계산된 행보.

‘1세대 각성자들처럼 날것 같지도 않고, 2세대 각성자들처럼 수비적이지도 않고···.’

한건우는 그런 독보적인 존재였다.

태일제는 이 기회를 통해 한건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늘 제안에 응하면, 한건우도 알아챌 것이다.

태일제가 한건우를 동등한 길드 마스터로 인정한다는 것을···.

그러나 태일제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격이었다.

“물건은 직접 가져왔겠지요?”

“물론입니다.”

한건우는 자신의 아공간에서 물건을 통째로 꺼냈다.

7룡성에서 가져온 구식 금고였다.

거기엔 서류와 장부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 자리에서 해결하는 게 좋겠구만···. 차 부장, 밖에 김 비서 들어오라고 해.”

“앗, 네.”

차은비가 일어나서 바깥에 있는 비서를 불렀다.

그녀는 아직 당황한 채였다.

밖에서 정장을 입은 비서가 들어왔다.

그 역시 각성자의 기운이 풍겼다.

‘그 유명한 일성 길드마스터의 비서인가.’

태일제의 비서는 <진실의 눈>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냈다.

한건우가 가진 <거짓 간파> 특성과 거의 유사했다.

지금은 저 비서의 특성이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지 보려고 불렀군.’

금고의 잠금장치가 이미 열려있는 것을 보고, 태일제가 물었다.

“이 문서들의 내용을 읽어보았소?”

“예, 훑어보긴 했습니다.”

태일제는 흠칫했다.

그는 장부를 직접 펼쳐보고, 조금 안심했다.

모두 암호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암호화되어 있군···. 이 암호를 아시오?”

“아뇨, 전혀 모릅니다.”

"흐음...."

태일제는 잠시 시간을 끌었다.

비서가 진실을 탐지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그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혹시 사본을 만들어놓은 건 아니겠지요?”

“차은비 플레이어께도 말씀드렸지만, 사본은 없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요.”

한건우는 <기억의 석판>으로 이 서류를 통째로 머릿속에 기억했을 뿐.

사본을 만든 적은 없었다.

“잘 알겠소··· 김 비서?”

태일제는 김 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비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일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명령했다.

“준비한 대가를 드리게.”

“예, 마스터.”

비서는 금고 안의 서류와 장부를 모두 꺼냈다.

그리고 텅 빈 금고를 순금 금괴로 척척 채웠다.

그 동안, 태일제가 말했다.

“파견 문제는··· 굳이 문서화할 필요는 없겠지요. 차 부장이 제 앞가림을 못할 사람도 아니니. 차 부장은 오늘부터 한건우 플레이어의 길드로 파견을 가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차은비는 머리가 복잡했다.

연봉만 똑같이 받는다면 큰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신생 길드니까 자리도 안 잡혔을 거고··· 별로 내키지 않는데.’

게다가 순수한 파견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한건우 플레이어는 아무것도 모르고 요청한 거겠지만···.’

아마 특수안보부의 천명환 같은 사람은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천명환 선배가 이것저것 캐내라고 시킬 것 같은데···.’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태일제 마스터의 지시를 거부하는 건, 곧 일성 길드를 나가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힐러인 차은비는 프리랜서로 뛰기보다 안정된 소속이 있는 게 편했다.

일성 길드보다 더 나은 데가 있을까.

막대한 연봉과 복지, 각종 서비스까지···.

‘1년 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복귀해야지 뭐···.’

차은비는 풀이 죽었다.

**

수도권의 비어있는 넓은 부지.

높은 철조망 울타리로 막혀있어, 밖에서 보기에는 쉽게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다름아닌 시험장이었다.

길드 허가를 위한 전투력 측정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왜 군인들이 지키고 있죠?”

은설아가 물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군부대처럼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마 민간인들이 실수로 가까이 와서 다칠까봐 그런 걸거야.”

금해준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보기보다 운전 실력이 괜찮았다.

콰아악-!

피유우우-!

안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전투력 측정이란 거, 많이 어려울까요?”

은설아가 또 물었다.

아무래도 시험이라는 생각에 긴장한 것 같았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차은비가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A급 테이머가 이런 걸 겁내면 어떡해?”

“겁 안 났거든요?”

은설아가 센 척을 했지만, 그녀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초소 근처까지 왔다. 군인의 정지 신호에, 금해준이 차를 세웠다.

“각성자 등록증, 모두 보여주십시오.”

“넵!”

금해준이 미리 걷어놓은 등록증을 모두 냈다.

“자, 확인하겠···.”

군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블랙카드인 S급 등록증 2개.

블루카드인 A급 등록증 1개.

C급 등록증이 또 2개나 있었다.

금해준의 D급 등록증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 써진 몇몇 이름들이 어마어마했다.

“확인 됐죠?”

“아··· 예. 신분 확인 됐습니다.”

부릉-!

군인은 고급 SUV 차량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건우, 차은비···?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지?’

측정소 대기실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차은비는 야구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다.

항상 입고 다니는 흰색 정장 대신에 편한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녀를 알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한건우도 여기서 굳이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후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저건 뭐에요?”

은설아가 손가락으로 대기실 벽을 가리켰다.

복층 건물의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화면이 있었다.

화면에는 숫자가 빼곡히 쓰여있었다.

“아, 저건 모의전투 완료시간 기록이야.”

금해준이 대답해주었다.

그도 전투력 측정소에는 처음 와보지만, 미리 사진과 정보를 많이 찾아보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자주 와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헉, 오늘 온 길드가 저렇게 많아요?”

은설아가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 역대 측정시간이 다 나온 거야. 저기 볼래?”

금해준은 손가락으로 화면 맨 위를 가리켰다.

“저기 1등을 찍은 게 일성 길드야.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지.”

“어디, 어디요?”

은설아가 고개를 꺾어서 화면 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금해준이 설명을 할 동안, 다른 신청자들도 기웃기웃 그의 설명을 훔쳐듣고 있었다.

“11분 38초. 야···. 대단하다, 일성 길드. 그렇지?”

“저게 빠른 거에요?”

“오른쪽 위에 평균 시간 보이지?”

“음···. 평균은 20분이 넘네요?”

“그것도 성공한 길드만 센 거야. 실패한 건 아예 기록에 포함되지도 않으니까.”

“아하··· 그럼 저것만 완료하면 합격인 거죠?”

“아니, 모의전투 완료시간도 중요하지만, 따로 본심사도 통과해야 해.”

그들이 열심히 대화를 할 동안,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어린애까지 데려와서 겨우 5명 채우고···. 성공이나 할 수 있겠어?”

“?”

금해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길드 신청자들이었다.

척 봐도 열 명이 넘었다.

시비를 건 사람은, 길드 마스터 격의 남자였다.

덩치가 크고 수염이 무성했다.

“사람이 많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실력이 좋아야죠.”

금해준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덩치 큰 남자는 금해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실력은 무슨··· 어디 길드에서 잡일이나 하게 생겼는데?”

불필요한 모욕이었다.

그쯤 되자, 한건우와 다른 일행들도 슬슬 뒤쪽을 돌아보았다.

덩치 큰 남자는 금해준의 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평균 시간이 어쩌고, 실패가 어쩌고···. 함부로 떠들고 말이야.’

그 남자 일행은 벌써 몇 번이나 전투력 측정에 응시했다.

그런데 한 번도 모의 전투장을 통과하지 못했다.

미리 정부요원에게 본심사용 뇌물까지 먹여놓았는데.

아예 예심 통과를 못하니 뇌물도 소용이 없었다.

길드원을 모은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길드 허가를 못 받은 것이다.

‘길드 마스터만 되면 떼부자가 될 텐데.’

남자는 그런 마음으로 돈을 펑펑 써댔다.

길드만 통과되면 바로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겁 없이 사채 빚까지 끌어다 썼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당장 빚을 갚기 어려울 상황.

그런 상태에서 금해준의 말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아까 주차장에 고급 차를 몰고 들어올 때부터, 금해준 일행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린 놈이 비싼 차는 몰고 와서··· 금수저 자식인가?’

금해준은 눈썹만 살짝 찡그린 채, 더이상 반응을 하지 않았다.

금해준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더이상 시비를 걸어도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핫.”

덩치 큰 남자가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가 금해준 일행을 무시한 이유가 있었다.

‘겨우 대여섯 명 모인 걸 보니, 안 봐도 뻔하지.’

길드 신청 최소인원이 5명이긴 하지만, 그건 법적인 조건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20명 내외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었다.

척 봐도 다들 어려 보였다.

심지어 어린이까지 껴 있으니···.

“어이, 젊은 친구들. 소꿉놀이는 집에 가서들 해.”

남자가 일행 전체를 상대로 도발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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