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마지막 1명
임수호 형제는 차은비를 보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서로 놀란 얼굴을 마주쳤다.
‘일성 길드의 차은비 힐러잖아!’
각성자들 사이에서, 아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유명했다.
차은비 힐러는 웬만한 스타 연예인보다도 더 유명한 존재였다.
금발로 염색한 단발머리에 예쁘장한 하얀 얼굴, 그리고 트레이드 마크 같은 흰색 정장.
자정을 한참 지난 새벽인데도, 완벽한 착장이었다.
그녀를 연예인처럼 따르는 팬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건우는 그런 환상에 빠지기에는, 차은비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한건우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성 길드는 대형 길드 중에서도 특히 친정부 쪽이지.’
이 시간에 그녀가 한건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한건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딱딱하게 물었다.
“뭡니까.”
“여기서는 좀 그렇고, 따로 말씀하시면 어때요?”
‘아하.’
차은비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 보니 뻔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으면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누구의 사주일까.’
일성 길드 안에서도 차은비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장 직위는 달고 있지만, 직원보다 임원에 가까우니까.
그녀가 저렇게 직접 달려와 안달하는 걸 보니, 또 특수안보부 측의 지시를 받은 것이겠지.
한건우는 한 번 더 밀어냈다.
“제가 먼 곳을 다녀와 피곤하니, 나중에 시간을 정해서 보시죠.”
차은비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각성한 후로, 아니 각성자가 되기 전에도 이런 경험은 별로 없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차은비가 자존심을 버리고 억지로 웃으며 한건우를 붙잡았다.
“저, 한건우 씨, 바쁘신 줄은 알지만···.”
그때 임진호가 끼어들었다.
“건우 형,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대화 나누고 와.”
임수호는 형의 눈치를 보면서 안절부절했다.
“그래도··· 차은비 힐러 님인데···.”
한국의 유일한 S급 힐러인 차은비였다.
비굴하게라도 매달려보고 싶었다.
그때 차은비는 임진호의 잘린 팔을 눈여겨보았다.
“옆에는 각성자 분 같은데··· 균열에서 다치신 건가요?”
“아, 예···.”
임진호는 말을 흐렸다.
그도 차은비 힐러를 보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기는 했다.
그러나 S급 힐러에게 한 번 치료를 받는 데만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건 상식이었다.
게다가 일성 길드 소속인 그녀였다.
길드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는 없었다.
“한 번 보여주시죠.”
차은비는 놀랍게도 선뜻 손을 내밀었다.
임진호가 조심스럽게 팔을 감은 붕대를 풀었다.
“윽···.”
임수호가 옆에서 보고 숨을 삼킬 정도로, 팔의 상태는 안 좋았다.
잘린 부분을 따라서 시커멓게 죽은 부분이 번지고 있었다.
“악마종 헬하운드에게 물리셨죠?”
“네, 네···.”
상처만 보고도 정확히 맞추는 것이 놀라웠다.
스으으···.
차은비의 손끝에서 신성하게 보이는 은빛 빛무리가 생겨났다.
“엇···!”
잘린 곳 주변의 혈색이 점점 돌아왔다.
임수호와 임진호는 기적을 보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단 번지지 않게 임시로 치료는 해놓았어요.”
차은비가 임진호에게 자기의 사무실 명함을 내밀었다.
“다음에 여기로 연락하고 절 찾아오세요. 팔을 마저 회복해 드릴게요.”
“···!”
“힐러 님, 정말입니까?”
“그럼요. 한건우 씨 얼굴을 봐서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임진호와 임수호는 깜짝 놀라서 얼떨떨해졌다.
“....”
차은비는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더 밀어내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한건우는 임수호 형제에게 일단 자기 집에 가 있으라고 하려다가, 아차 했다.
‘집에는 지윤이가 있는데···.’
임수호를 지윤과 만나는 건 피하게 하고 싶었다.
“길드 건물에 가 있어. 바로 따라갈게.”
한건우는 회복실 위치도 알려주었다.
말이 회복실이지, 금해준이 욕심을 내서 거의 호텔급으로 꾸며놓은 공간이었다.
한건우는 차은비의 차에 탔다.
차은비의 스포츠카가 어느덧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건우가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용건으로 새벽부터 절 기다렸죠?”
“음··· 그냥 툭 터놓고 말씀드릴게요.”
“예.”
“7룡성 금고에서 찾은 물건들, 저희한테 넘기세요.”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시도인가.
한건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차은비가 덧붙였다.
“당연히 그냥 달라는 건 아니죠. 저희 일성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안 빼놓고 전부 넘기시면, 시세의 1.5배를 쳐드릴게요.”
“7룡성에서 나온 물건 중에,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 겁니까?”
한건우가 묻자, 차은비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말씀 못 드리죠. 그러니까 1.5배가 가능한 거구요.”
“피차 쓸데없는 것들은 빼시죠. 비밀금고에 있던 장부가 필요한 걸텐데.”
차은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희는 그냥 7룡성의···.”
“장부와 서류, 하나도 안 빼고 전부 넘길 수 있습니다.”
“!”
차은비가 놀란 표정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가 느긋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사본은 만들 시간도 없었고, 저에겐 필요도 없는 물건이니, 전부 다 넘기죠.”
“···.”
차은비가 의심하는 것 같아서, 한건우가 덧붙였다.
“계약서 스크롤을 써도 좋아요.”
“···네.”
일성 길드에서 그런 증거를 남길 리 없겠지만, 거짓이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한건우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리고, 아이템이나 귀중품이라면 시세가 있는데. 서류나 장부는 시세를 어떻게 매기죠?”
“같은 무게의 금으로 바꿔드려요.”
한건우가 보통 사람이라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전혀 상관도 없고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서류더미를 금으로 바꿀 수 있다면, 안 받는 게 이상한 딜이었다.
한건우는 생각에 잠긴 척 턱을 쓸었다.
‘차은비를 여기까지 보내서 이런 제안을 시킨 걸 보니, 특수안보부가 상당히 다급했군.’
한건우가 장부를 별 생각 없이 처분하거나 다른 데 넘겨버릴까봐, 몹시 애가 탄 게 보였다.
한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안 같습니다.”
차은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한건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모자라겠는데요?”
“어··· 금액이 모자라시다면.”
“제가 원하는 건 다른 겁니다.”
“뭐죠? 가능하면 맞춰 드릴게요.”
“제가 여는 길드에, 일성의 힐러를 한 명 보내주십시오.”
“···아.”
차은비는 난색을 표했다.
“···인사 문제는 제가 여기서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당연하죠. 그러니 일성의 길드마스터와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네?”
차은비가 당황해서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저는 차은비 씨가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때 차은비의 표정은 상당히 볼만했다.
***
다음날 오전, 한건우는 차은비의 메시지를 받았다.
[12시에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 마스터가 점심 대접하시기로.]
첨부한 지도를 확인하고, 한건우는 길드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소파에 임수호 형제가 앉아있었다.
푹 쉬고 기운을 차려서,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회복실을 넘어서 고급 호텔 수준이니···.’
회의실에는 임수호와 임진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길드의 투자자이자 매니저인 금해준.
1호 길드원으로 데려온 테이머 은설아.
한건우가 문을 열자마자 모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한건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쾌활하게 인사하는 것은 해맑은 금해준 뿐.
나머지는 아직 서로 낯을 가리며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한건우는 회의실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소개할게. 이쪽은 임진호, 임수호. 내 어린 시절 함께 지냈던 동생들이야.”
“반갑습니다! 금해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임진호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임수호는 고개만 숙였다.
그러고보니 금해준과 임진호, 임수호 셋은 동갑이었다.
곱상한 소년 같은 금해준과 쌍둥이 형제는 전혀 느낌이 달랐지만···.
“금해준 매니저 말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 초대를 받고 이 자리에 온 거다.”
“···.”
“다들 알고 있듯이, 나는 길드를 시작할 거야.”
모두 말없이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보통 길드라는 건 각성자들의 사업체지. 그러나 내가 만들 길드는 단순히 사업에 그치지는 않을 거야.”
“···?”
가장 눈을 또렷이 빛내고 있는 건 금해준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강해질 거고, 내 길드 역시 가장 강한 길드로 만들 생각이야.”
한건우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뜻을 밝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속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앞으로 어려운 길을 갈 수도 있고, 위험한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다만 길드의 시작만큼은 꼭 함께해 주면 좋겠다.”
한건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은설아였다.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다른 데 갈 생각 없어요, 절대로.”
임진호와 임수호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약속한 듯 동시에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금해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형님, 여전히 4명인데요···.”
그러다가 금해준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저도 전투원으로 세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급이 맞아야 하지 않나요?”
금해준은 플레이어 생활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접은 상태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D급에서 A급으로 조정된 변이 균열.
거기에 된통 당한 이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균열은 게임이 아니고, 목숨은 하나뿐이란 것을···.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해준아, 넌 앞으로 균열에는 안 들어가는 게 좋겠더라.”
“엇, 그러면요?”
“오늘 마지막 1명을 데려올 테니까, 길드 등록허가 신청 해놔.”
“넵!”
각성자 전투원 5인을 모으면, 길드 등록허가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정부의 모의 전투장에서 심사를 통과하면 되었다.
‘형님과 내가 있으니까 심사 통과는 쉽겠지. 그러면 미공략 균열 관리권이 정식으로 합법화된다! 그 안에 있는 드래곤 사체는 합법적으로 우리 길드 거···!’
금해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가득 떠올랐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그 얼굴을 보자, 한건우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거··· 반드시 딜에 성공해야겠는데?’
**
일성 길드의 마스터가 초대한 곳은, 북한산 근처의 한옥이었다.
간판도 없이 운영하는 고급 한식당이었다.
‘···옛날 사업가들 같군.’
균열이 생겨난 이후, 새로운 부호들이 많이 생겨났다.
상급 각성자나 길드 마스터, 혹은 균열 관련 사업자들이었다.
새로운 부자들은 기존의 부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런데 일성 길드는 비교적 구시대의 대기업과 비슷한 문화를 가진 편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일성 길드 마스터 본인이 본래 대기업의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오시느라 고생하셨네.”
일성 길드 마스터, 태일제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난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편안한 골프복 차림으로 한건우를 맞이했다.
옆에는 차은비가 복잡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항상 입는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됐다.’
차은비의 표정을 보고서 한건우는 벌써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협상의 여지는 있다는 거다.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할 거였다면, 그녀는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음식을 내왔다.
태일제는 가벼운 안부 인사를 몇 마디 던지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요, 우리 차 부장을 달라고요.”
태일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한건우를 살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 길드 입장에서 전혀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은, 잘 알 텐데요.”
한건우도 잘 알고 있었다.
일성 길드의 간판인 S급 힐러를 다른 길드에 내줄 리는 없었다.
7룡성의 비밀 장부와 서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입니다.”
“그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