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투견장 (7) - 부정을 태우는 불
한건우는 염제 신광우의 방으로 갔다.
이런 자들은 남을 믿지 못해서, 금고를 침실에서 멀리 두지 않는다.
7룡성의 금고는 그의 침실 쪽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염제 신광우의 침실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온갖 마수의 깃털과 뼈, 균열에서 나온 희귀한 이계의 물건들로 가득했다.
신광우의 침실 벽에서, 한건우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고철로 된 골동품 문고리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울퉁불퉁하고 특이했다.
‘여러 번 녹았다가 굳은 것 같은데?’
왠지 신광우라면,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좋아할 것 같았다.
한건우는 <아그니의 화염>으로 고철 문고리에 열을 가했다.
스으으···.
문고리가 녹으면서 잠금장치가 풀어졌다.
철을 자유자재로 녹일 수 있는 화염 특성이 있어야만 열 수 있는 잠금이었다.
끼이이-.
그 사이로 숨겨진 공간이 열렸다.
“···.”
요새 흔하게 쓰는 아공간이 아니고, 진짜 아날로그적인 비밀공간이라니.
신광우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숨겨진 비밀공간에는 세 개의 철제 금고가 보였다.
한건우는 금고를 부숴서 열려고 했다.
그런데 비밀번호 다이얼을 돌려서 여는 옛날 식이었다.
이러면 한건우에게는 오히려 쉬웠다.
[특성 발동 : 잠금 해제]
좀도둑의 잔재주 같은 특성이었다.
마력이 들어간 잠금장치에는 효과가 없어서, 쓸모가 없을 줄 알았는데.
철컥.
첫 번째 금고는 각종 맹독이나 영약 같은 아이템으로 꽉 차 있었다.
희귀한 아이템도 있고, 시중에 풀린 것들도 있었다.
‘이것만 해도 돈이 꽤 되겠군.’
철컥-.
두 번째로 연 금고에는 고전적인 보물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괴, 그리고 수표 뭉치.
균열 발생 이후, 많은 국가의 화폐는 종이조각이 되었다.
그전에 가치있던 것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변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그게 바로 황금이었다.
황금은 균열 발생 후에도 귀중한 가치를 지녔다.
아니,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가치가 올라갔다.
철컥.
마지막으로 한건우는 세 번째 금고를 열었다.
이곳에는 바로 한건우가 찾던 물건이 있었다.
‘역시, 장부가 있었구나.’
7룡성의 비밀 서류와 장부였다.
손으로 쓴 장부였다.
아마 밀거래와 상납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7룡성은 정부, 그 중에서도 특수안보부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해온 것 같았다.
정부 측에서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겠지만, 주는 입장에서는 다를 것이다.
비밀 장부에 그런 내용을 안 적어놓을 리 없었다.
한건우는 가죽 수첩을 들어서 넘겨보았다.
숫자 말고 단어는 대부분 암호로 기록되어 있었다.
몇 가지 정보만 맞추면 해독을 못 할 것도 없어보였다.
[특성 발동 : 기억의 석판]
-문자로 된 정보를 장기 기억에 저장한다.
이것 역시 전투와는 전혀 관련 없는 특성이지만, 이럴 때는 유용했다.
한건우는 특성을 통해 장부에 적힌 문자를 모두 기억했다.
어차피 지금은 정보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나중에는 사소한 정보가 큰 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데 미쳤다.
‘7룡성이 무너졌다는 걸 알게 되면··· 특수안보부 측에서 이 비밀 장부를 회수하러 올지도 모르겠군.’
한건우는 신광우의 물건들을 몽땅 챙겼다.
한건우는 아이템과 금괴, 수표가 든 금고에서는 내용물만 꺼냈다.
그리고 장부와 서류가 든 금고는, 금고를 통째로 휴대용 아공간에 넣었다.
한건우의 아공간 금고가 거의 빈틈없이 꽉 찼다.
‘금고가 아니라 창고를 가져올걸.’
한건우는 발코니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의 등에서 화염의 날개가 펼쳐졌다.
파아앗-!
7룡성의 탑은 텅 비어있는 듯했다.
탑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 층에 갇혀있던 각성자들도 이미 풀려났을 것이다.
그런 뒷처리를 위해서 임수호 형제를 보냈으니까.
한건우는 유유히 땅에 착지했다.
탑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쏟아졌다.
솨아아아-!
불꽃이 아니라 쏟아지는 폭포 같았다.
전설급 특성이 된 <아그니의 화염>은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
염제 신광우가 왜 그렇게 사물을 불태우는 데 빠져들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화염 특성을 제약 없이 사용할 때의 쾌감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쿠과과과···.
7룡성의 탑이 바닥부터 불타올랐다.
탑의 중심이 되는 골조에 불이 붙었다.
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
한건우가 염제와 싸우고 있던 동안.
임진호와 임수호는 먼저 탑 중간에 갇혀 있던 각성자들을 풀어주었다.
탑에 있던 직원들은 이미 대피했는데, 마력 감옥에 갇힌 각성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탑 위에서 느껴지는 심상치않은 소리에,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모두 나처럼 신광우와 계약을 한 사람들이겠지···.’
한건우에게 받았던 감옥 열쇠로, 한명 한명 감방 문을 열어주었다.
놀란 각성자들은 황급히 도망을 나갔다.
그런데 한 방은 이미 문이 열려있었다.
“어···?”
“이미 도망쳤나.”
가까이 다가가자, 쓰러진 사람의 두 다리가 보였다.
각성자 감옥을 지키던 경비원이 죽어서 엎어진 채였다.
"헉."
“여기 갇힌 게 누구였지?”
“그 네크로맨서···.”
“아.”
다른 선수들의 시체를 조종해서 살아남은 각성자였다.
어쨌든 알아서 빠져나간 것 같으니, 신경쓸 건 없었다.
형제는 탑을 빠져나와, 투견장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경기를 위해 갇혀있는 마수들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묵은 마수도 있고, 이제 막 잡혀온 마수도 있었다.
크르르르···.
슈욱-!
형제는 마석 사슬에 묶인 마수들을 하나하나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살던 곳에 풀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공격성 강한 마수들이 민가로 빠져나가면 위험했다.
마지막 마수를 얼음 창으로 꿰뚫었을 때쯤, 임수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건우 형을 도와주러 가야 하지 않을까?”
임진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한건우가 강하다 해도, 염제 신광우의 악명은 무시무시했다.
각성자들 사이의 전투는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으니까.
머릿속에서 계속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 가 보자.”
그들이 지상으로 나왔을 때, 충격적인 광경이 보였다.
“저건···.”
“헉.”
7룡성의 탑이 통째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횃불 같았다.
임수호 형제는 탑 쪽으로 달려갔다.
불타는 탑 앞에 서있는 한건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건우 형!”
“어떻게 됐어?”
그들은 한건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온통 불에 그슬렸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죽였어.”
“···아.”
임수호 형제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밝아진 얼굴을 보자, 한건우는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해냈어.’
한건우는 성공했다.
그들 형제의 비극을 막은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로 숨겨진 보상을 얻고 빠르게 강해진 것?
별다른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한 것?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건우가 아니었다면, 임진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10번째 <투견>에서, 동생 임수호의 손에 죽었으리라.
버서커 약물을 강제로 투여받은 채로···.
과거 임수호는 살아남아 풀려났지만, 그 속은 얼마나 썩어들어갔을까.
한건우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임수호가 왜 이능력 특수전단에 들어왔는지.
임수호는 유난히 미등록자들을 증오했다.
그는 염제 신광우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신광우를 잡는 작전에 출동했을 때, 임수호가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흥분했던 게 기억났다.
'그때 임수호를 작전에서 제외했어야 했는데....'
평소에 침착하던 임수호는, 그때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작전 위치를 벗어나, 혼자 안쪽으로 진입해버렸다.
복수심이 앞섰던 모양이다.
임수호는 한건우의 오른팔이자 가장 아끼는 부하, 그리고 평생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대원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대장님!’
‘들어가지 마. 타이밍을 기다려야 한다.’
한건우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대장은 그런 자리였다.
임수호가 죽지만 않았기를 바랐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힐러가 살릴 수 있으니까.
염제 신광우가 한건우의 손에 죽은 후, 임수호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는 온몸에 지옥의 겁화로 인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수호야···.’
힐러가 아무리 치유해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마치 일반인이 된 것처럼.
당시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계약이 완료되기 전에 ‘갑’과 ‘을’이 서로를 해하면 안 된다는 계약서 스크롤의 조항.
그때까지도 계약이 완료되지 않아서, 계약위반의 제약을 받았을 줄이야···.
한건우는 매일같이 임수호를 찾아갔지만, 수호는 눈도 뜨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다.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빠··· 어떻게.’
여동생 지윤은 그 후로 한건우에게 마음을 닫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건우를 용서하지 못했다.
특수부대의 대장으로서 어쩔 수 없던 선택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논리보다 복잡했다.
한건우는 수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윤에게 이해해달라고 하지도 못했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수호와 지윤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과거를 돌아보던 한건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걸로 안심할 수는 없어.’
염제 신광우 한 명을 죽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모든 게 싸이코 악당 한 명 때문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 악당만 해치우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니까.
그러나 세상 일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구조적인 문제였어.’
그런 악을 방치하고, 오히려 공생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정부의 실세였던 것이다.
알면 알수록, 악은 덩굴 줄기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쿠쿵···. 쿵-!
쿠과아아아-!
7룡성의 탑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한건우는 경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과과과과-!
한건우의 손에서 폭발적인 화염이 뿜어져나갔다.
<투견장>이라 불리던 넓은 경기장이 한순간에 불꽃에 휩싸였다.
붉게 넘실거리는 불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올랐다.
“와···.”
“이제 투견 같은 건··· 할 수 없겠네.”
임수호 형제가 중얼거렸다.
<아그니와 화염>은, 본래 모든 부정을 태우는 신성한 불이었다.
화염 속에서 7룡성의 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한건우는 임수호 형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포털을 탔기에, 금방 이동할 수 있었다.
통로로 나가는 동안, 임수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건우 형.”
“응?”
“저기, 지윤이는··· 잘 있어?”
“···!”
한건우는 소름이 돋을 뻔했다.
회귀 전에 임수호를 부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임수호는 똑같은 말투, 똑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윤이는 잘 있냐고.
한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냉랭해졌다.
‘웬만하면 지윤이랑 안 마주치게 하는 게 낫겠어.’
서로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지윤은 아직 학업에 집중해야 할 나이였다.
“어··· 뭐 그렇지.”
한건우가 대강 말을 돌리는데, 마침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샛노란색 스포츠카 앞에 선 금발 단발머리의 여자.
길드 <일성>의 차은비였다.
그녀가 이 새벽에 포털 입구에서 한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건우 씨, 잘 지내셨죠?”
“···?”
일성 길드의 정보력은 어디까지인지.
한건우가 함경북도에서 정부 포털을 타고 출발한 것까지 파악한 것이다.
“항상 제가 먼저 찾아오네요?”
차은비의 연기력이 발전했는지, 그녀의 미소가 덜 가식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