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성 먹는 플레이어-37화 (3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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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아니면 잡아먹히거나

한건우는 간만에 균열 깨기를 멈추었다.

휴식을 선언한 것이다.

휴식이라 해봤자 노는 건 아니고, 개인정비 수준이다.

일반인이라면 흉터나 부상을 걱정할 텐데.

각성자는 죽지만 않으면 전부 말끔하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몸 관리에 소홀한 각성자들이 많았지만, 한건우는 달랐다.

몸을 기계처럼 세심하게 점검했다.

특수부대 시절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좌우측 균형은 괜찮고. 유연성도··· 나쁘지 않아.’

이번 울릉도 전투에서, 새삼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느꼈다.

단순한 스탯이 높고 특성이 많아서 강하다는 게 아니었다.

그걸 실제로 활용하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졌다.

‘신체 스탯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고, 특성 연계도 익숙해졌어.’

가장 효자인 건, 뭐니뭐니 해도 자동회복이었다.

퍼내도 퍼내도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MP.

그 덕분에 아낌없이 특성을 퍼부을 수 있었다.

‘고대신이 된 마수의 고기란··· 과연 엄청나군.’

변이 균열이 언제 또 나오더라?

은근히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 미흡한 점도 많았다.

특히 민첩 스탯.

이제까지 <전격 쇄도>라는 보상 스킬을 적재적소에 잘 써왔지만, 슬슬 답답해졌다.

아무래도 스킬에 불과한 만큼 쿨타임의 한계가 치명적이었던 것.

한 번 쓰고 24시간이라니, 조금 심했다.

한건우는 그리핀 떼를 죽여서 얻은 경험치를 몽땅 민첩 스탯에 몰았다.

민첩 98 -> 134 (+36)

‘좋아.’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빠, 설아랑 셋이서 치킨 먹자.”

“그래.”

여동생이 배달시킨 치킨을 식탁 위에 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을, 지윤과 설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은설아는 그 사이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보였다.

은설아를 정성껏 돌본 것은 사실이다.

푹 재우고, 깨끗이 씻기고, 밥을 실컷 먹였다.

땟국물과 흙먼지 묻은 옷은 버리고, 새 옷도 사 입혔다.

아직 마르고 작긴 해도, 얼굴에 벌써 활기가 돌았다.

설아가 치킨을 뜯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그때 그 언니는 어디 갔어요?”

“언니?”

“그 망토 쓴 언니요.”

지윤이 유심히 듣고 있는 티가 났다.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봐, 한건우가 말을 돌렸다.

“나중에 볼 거야. 그 언니 얘기는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말자, 알았지?”

“네에.”

은설아는 한번 입이 트이자, 조잘조잘 말도 잘 했다.

‘이게 바로 딸을 키우는 기분인가?’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한건우였다.

뭔가 새로운 감정에 눈뜬 것 같았다.

은설아는 열다섯 살이고, 한건우는 회귀 전 35살이었으니.

딸뻘이긴 했다.

한편으론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런 애를 그때 내 손으로 죽였다고?’

아무리 임무였고, 시민들에게 위험할 수 있는 존재였다지만···.

‘쓸데 없는 후회는 그만하자.’

한건우는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지나간 과거가 뼈아픈 만큼,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했다.

치킨을 다 먹고, 은설아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은설아를 위해 미리 사놓았던 집이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여기서 지내면 돼.”

“...네? 진짜요?”

은설아는 귀를 의심했다.

같이 서울로 가자고는 했지만, 당연히 보육시설로 보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한건우와 지윤은 자신에게 너무 친절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더욱 더, 잠깐의 추억인 줄 알았다.

보육원에 있을 때, 잠깐 와서 잘해주던 어른들 같은 건 줄 알았다.

은설아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지윤이 그런 설아를 안아줄 동안, 한건우는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

한건우는 금해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건물 최상층으로 가는 중이었다.

미래의 길드 본사가 될 건물은, 현재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상자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인공 균열 설치는, 잘 됐어?”

“그럼요! 작동도 잘 됩니다.”

길드 건물의 최상층에, 인공 균열을 설치했다.

재벌 손자인 금해준을 구해준 대가로, LK그룹 회장이 약속했던 선물이었다.

LK 연구원들이 열정을 불태웠는지, 인공 균열의 시제품이 일찍 나왔다.

안전 테스트는 마쳤고, 정식 상용화만 앞두고 있었다.

한건우는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시제품에 오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한건우와 금해준은 인공 균열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스슥-.

느낌이 실제 균열과 거의 흡사했다.

안에는 너른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오.”

새파란 하늘 밑에 탁 트인 초원, 키가 작은 관엽수들, 그리고 가장자리의 돌 절벽.

이세계를 흉내내어, 작은 태양이 2개 떠 있었다.

이게 인공 공간이란 걸 믿기 힘들 정도였다.

불어오는 바람도 맑고 시원했다.

“형님, 초원 유형 균열은 심심한 것 같은데, 특별히 이걸로 주문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한건우는 대자연의 풍경에 대단히 만족했지만, 어린 금해준의 눈에는 지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독수리 비슷한 걸 한 마리 키워볼까 하고.”

“예?”

이곳이라면 가족에게 버림받은 그리핀도 맘껏 활개를 칠 수 있을 것이다.

한건우는 품 속에서 황동색 열쇠를 꺼냈다.

이번에 새로 주문한 아공간 창고 열쇠였다.

열쇠를 허공에 들고 오른쪽으로 돌리자, 아공간 창고가 열렸다.

“끼에에엑!”

“끄아악!”

흰 그리핀 한 마리가 기세 좋게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금해준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쉬이이익!”

그리핀은 황금색 부리를 내밀면서 한건우와 금해준을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특히 한건우를 보는 눈에 강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눈 앞에서 가족을 죽여서 그런가?’

죽을 뻔한 걸 살려 줬더니.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득! 파드드득!

그리핀이 저지대 쪽으로 날아갔다.

“이야···. 마수를 길들이시고. 역시 형님은 남다르십니다.”

“....”

별로 길이 든 걸로 보이지는 않았을텐데.

“덕분에 헬기는 잘 썼다. 그리고···.”

“네?”

한건우는 금해준에게 울릉도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요약했다.

“첫 번째 길드원을 데려왔어.”

“울릉도에서요? 신기하네요.... 대체 어떤 재야의 고수입니까?”

금해준은 뉴페이스의 등장에 잔뜩 들떠있었다.

“금방 소개할게.”

“정말 기대됩니다!”

한건우는 아직 은설아를 사람들 앞에 내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최선의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리고 좋은 타이밍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인공 균열에서 나와서, 한건우는 휴대폰의 수신목록을 쭉 내렸다.

PBS뉴스 문철민 기자가 밤낮없이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기자님, 특집 기사 하나 쓰시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각 전화벨이 울렸다.

[한건우 플레이어, 대체 울릉도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기자님은 이번 사건, 어떻게 보고 계시죠?”

문철민 기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특종 그 자체 아닙니까. 스무 살 S급 각성자가 야생 마수들을 물리치고 섬 주민들을 구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토리죠.]

“그래요?”

한건우가 가만히 떠보자, 문철민은 곧 실토했다.

[사실 아쉽긴 합니다. 그 흔한 CCTV나 휴대폰 영상 하나도 없지, 순 노인들 투성이라 생생한 멘트 하나 안 나오지···. 답답하죠.]

“그렇군요.”

[한건우 플레이어, 저한테만 툭 까놓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제가 언제 사실을 왜곡한 적 있습니까? 다른 기자들은 몰라도 전 양아치 짓 안 하는거 아시잖아요.]

“뭘요?”

[거기 한건우 플레이어 말고, 2명 더 있었다면서요···. 그거 누굽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한건우는 가만히 미소짓고, 말을 돌렸다.

“기자님. 테이밍 특성 아시죠?”

[...테이밍요···. 그거 상당히 위험한 특성으로 알고 있는데요?]

문철민 기자도 얼핏 들은 얘기는 있었다.

울릉도에서 누군가가 마수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마수와 마수를 싸우게 만들었다는 증언이었다.

‘그건 테이머인데···.’

말이 안 되었다.

문철민이 알기로, 현재 국내에 활동 중인 테이머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문철민은 프로 기자였다.

일반인의 증언은 공포나 과장이 섞여 있기 마련.

의심해 봐야 한다.

그 중에 믿을 만한 목격자, 즉 각성자가 한 명 있긴 했다.

그런데 고해성사라도 들은 것처럼 입을 다무니, 문철민은 답답했다.

‘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뭔가 있는 것 같은 상황.

정보가 통제되고, 유일한 희망인 한건우는 대답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던가.

“테이머에 대해··· 각성자 전문 기자분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일반인의 거부감은 더하겠죠.”

[그렇긴 할 겁니다.]

문철민 기자가 순순히 인정했다.

한건우가 제안했다.

“제가 기자님이라면, 지금 상부에 보고해서 ‘테이밍’ 특성의 가능성을 다루는 특집을 기획하겠습니다.”

[?]

“무슨 말인지 아시죠? 후회 안 하실 겁니다.”

툭.

언제나처럼 한건우는 메시지만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와, 이런···.”

문철민 기자는 당장 회사로 차를 돌렸다.

***

그 동안, 바다 건너 울릉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점점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먼저, 정부 부처에서 난리가 났다

각성자와 균열 관리를 총괄하는 각성관리청.

각성관리청장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 영해에 야생화된 그리핀 떼가 나와? 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야?”

“...대마도 쪽으로 의심됩니다. 몇 달 전에 미공략 균열이 하나 나왔다고 합니다.”

담당 과장이 이마에서 진땀을 흘리며 보고하고 있었다.

청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마도? 일본?”

“네. 지금은 <피라미드>로 덮었는데요, 초기에 조금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청장이 도끼눈을 떴다.

“이 한심한 놈. 넌 그게 조금이냐? 무리를 이뤘다잖아!”

“...죄송합니다.”

담당 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정보가 있으면 재깍재깍 보고를 했어야지! 주민 대피라도 시켰을 거 아니야.”

“일본 관리청이 워낙 정보공유에 폐쇄적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번에 겨우 알아낸 내용입니다.”

담당 과장이 애처롭게 사정했다.

“그걸 말이라고··· 나 참···.”

청장은 욕을 하면서도, 기세가 한풀 꺾였다.

사실 청장도 알았다.

균열과 마수 문제는 천재지변에 가깝다는 걸.

청장도 답답해서 화를 낸 것이지, 어차피 완전히 예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기적이 일어나서 망정이지.’

청장의 관운을 다 끌어다 쓴 것 같았다.

‘야생화된 마수 떼가 섬마을을 습격했는데, 인명피해가 하나도 없다?’

처음에 사망자 0명이라는 보고서를 보고, 오타가 난 줄 알았다.

훈련 시나리오도, 그렇게 써 오면 비현실적이라고 욕할 것이다.

청장은 한건우라는 플레이어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S급이 보배는 보배구나···.”

한건우가 없었다면, 각성관리청에 대한 민심도 최악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어디서 소스가 샜을까요? 와준 건 고마운데, 그렇게 빨리 헬기를 타고 출동했다는 게 이상한데요···.”

담당 과장은 나름대로 추측하는 게 있었다.

‘구조신호를 도청하는 것 아니야?’

용병들 중에서, 정부 구조신호를 도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정부 구조대보다 먼저 출동한 다음 민간인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아! 우리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다친 사람도 없고, 돈 내놓으라고도 안 했다며? 그럼 됐지.”

“네... 그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청장은 한건우 플레이어를 전폭 밀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던 과장이 재빨리 건의했다.

“한건우 플레이어 말입니다. 청장님과 식사자리 추진해보는 것 어떻습니까?”

“오, 식사? 좋지.”

청장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청장은 물론이고, 과장도 각성관리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S급은 무조건 안면을 터 놓고 봐야 해.’

국민들을 구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그걸 빌미로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을 생각이었다.

퇴직 후에 뭘 하려 해도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약속을 잡아보라고 지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비서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종종거리며 들어왔다.

어찌할 줄 모르고, 두 손을 모은 채였다.

“청장님, 한건우 플레이어와 식사약속은 어렵게 됐습니다.”

“왜?”

“그··· 특수안보부 측에서 컨택할 모양입니다.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청장은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그 조직의 이름을 듣자, 입맛이 싹 달아났다.

손바닥으로 이마와 뺨을 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아무것도 없었던 걸로 해.”

정부 위의 정부라는 특수안보부(SSS).

그들의 행보에 걸리적거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주목을 한다니, 한건우라는 젊은이의 미래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특수안보부에 죽거나, 아니면 잡아먹히거나.’

청장은 한건우를 위해 짧은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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