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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8) - 목숨 값
대장 그리핀의 몸통을 꿰뚫은 긴 창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치지지직···.
서서히 창이 뽑혀나오기 시작했다.
“크에엑!”
대장 그리핀이 분노에 차서 울부짖었다.
마창 게이볼그의 창날은 일자형이 아니었다.
움직일수록 상처가 점점 벌어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뽑아내고 있으니, 엄청난 고통이 있을 게 당연했다.
한건우는 한층 발전한 특성에 만족했다.
‘확실히 염동력의 컨트롤 수준이 높아졌어.’
물리적 접촉 없이도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사이퍼 계열 특성, 염동력.
보통은 주변에 있는 작고 가벼운 물건을 움직이는 데 그친다.
세심한 컨트롤도 쉽지 않다.
생명체에는 직접 작용이 안 된다는 한계도 있기에, 이 특성만 가지고는 전투에 써먹기 좀 애매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한건우는 염동력 특성의 원래 주인을 떠올렸다.
작은 세검 여러 자루를 허공에 띄워서 사용하던 검사였다.
자신이 검술의 극의인 <이기어검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며, 허풍을 떨던 남자의 모습이 생생했다.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군.’
그 능력이 <권능>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쑤욱!
“크에엑!”
창이 완전히 뽑혀나왔다.
대장 그리핀의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콸콸 솟았다.
창자루가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한건우 쪽으로 날아왔다.
슈우우-
탁!
한건우가 내민 손에, 마창 게이볼그가 돌아왔다.
한건우는 이비현에게 말 없이 눈짓으로 지시했다.
은설아를 지키라는 뜻이었다.
이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건우는 창을 돌리면서 쇄도했다.
땅을 박찬 한건우는, 한순간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특성 발동 : 그림자 맹시]
촤아악-!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성체 그리핀 한 마리의 목이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신의 등장이었다.
놀란 그리핀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리핀들 사이에 공포심이 빠르게 번졌다.
“키에엑!”
푸드드드···.
그리핀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위로 날아오르려 했다.
“!”
<그림자 맹시>의 특성상, 그림자가 없는 공중으로 날아오르면 따라가기 힘들었다.
한건우는 <그림자 맹시>를 풀고, 가장 가까운 그리핀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터억!
“끼이이잇!”
한건우를 등에 태운 그리핀이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 없었다.
타아앗!
스읏!
한건우는 공중을 날아오르는 그리핀의 등 위를 선 채로 가볍게 옮겨 다녔다.
촤아아악!
“끼엑!”
마창 게이볼그의 새카만 창날이 그리핀의 목을 차례차례 그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타고 있던 그리핀의 목을 날린 후, 한건우는 수십 미터 상공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타아-.
한건우가 가볍게 땅으로 착지했다.
아까 은설아에게 써본 방식이었다.
중력을 역으로 작용하여 추락의 충격을 줄였다.
숨 한번 돌릴 틈도 없이, 한건우는 대장 그리핀에게 다가갔다.
대장 그리핀은 한사코 기어서 도망가고 있었다.
몸통이 반쯤 박살나 있었는데도, 삶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푸욱-!
한건우의 무정한 창날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대장 그리핀의 축구공만한 눈에 생명의 기운이 스러졌다.
한건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예리한 창날은 대장 그리핀의 앞가슴을 갈랐다.
탁.
창끝에 뭔가 돌 같은 것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창을 뽑아낸 한건우는, 그 상처를 헤집으며 주먹을 집어넣었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촤아악!
그의 손에는 주먹만한 마정석이 쥐어져 있었다.
“...!”
그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건 이비현만이 아니었다.
마을 성당에 숨어있던 주민들 중 몇도, 창문 틈을 통해서 보고 있었다.
“허···.”
“살았다, 살았어.”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주민들이 안도했다.
안도의 감정은 빠르게 전염되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신부님, 각성자란 사람들은 다들 저 정도입니까?”
연신 감탄사를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건우 일행의 눈부신 활약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성당의 신부는 홀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야···. 저들은 절대로 보통 각성자들이 아니다.’
그 신부는 한때 플레이어 생활을 했다가, 은퇴하고 종교에 몸담은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한건우가 보여준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 잘 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전율이 일어났다.
‘유명한 랭커들이 틀림없어···.’
한국의 등록 각성자는 약 3만명 가량.
그 중에서 100위권 내의 각성자를 일명 ‘랭커’라고 불렀다.
랭킹이란 각성센터에서 1년간 각성자의 공적 등을 기준으로 매년 말 발표하는 순위다.
실시간으로 집계되지도 않거니와, 활동을 멈춘 각성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 한계 때문에 정확성은 떨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수치였다.
신부가 보기에, 저 3명의 각성자는 랭커이거나 랭커 급이 틀림없었다.
드루이드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몸집이 작은 암살자.
둘 다 만만치 않았지만,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한술 더 떴다.
‘저 남자··· 저렇게 강한 각성자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때 한건우의 시선이 성당 유리창 너머에 있는 신부의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
어둠이 내려오는 저녁, 마수의 피가 흠뻑 묻은 손으로 마정석을 들고 있는 한건우.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한건우가 성당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핀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았다.
그러나 신부 외의 주민들은, 무서운 마수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환호만 하고 있었다.
콰지직!
가구로 막아놓은 문이 쉽게 열렸다.
한건우가 우뚝 서 있었다.
신부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모든 주민을 대표해서, 신부가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모두 살았습니다.”
한건우는 울릉도 주민들 모두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아무리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랐다.
그가 아니었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그리핀의 먹이가 되었을 게 뻔했다.
고개를 든 신부는, 가까이서 한건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워낙 건장한 체격에 거침없는 행동이라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고작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었다.
한건우는 대답 없이 성당 안쪽을 둘러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소, 젊은이. 덕분에 살았네.”
주민들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신부는 왠지 불안한 마음에 그의 반응을 살폈다.
한건우는 뜻밖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각성자로서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다치신 분은 없으신지요?”
“아, 예···.”
“비상 대피 방송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이 하신 것이죠? 덕분에 인명 피해가 없었군요.”
“아···.”
신부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랭커 급 각성자가 이렇게 겸손하다니.
보통은 가식조차 떨지 않을 정도로 거만한 게 정상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유니콘 수준이었다.
‘아까 분명히 섬뜩한 기분을 느꼈는데···.’
자신이 과민한 탓인가 싶었다. 신부가 마음을 놓을 때, 한건우가 물었다.
“방금, 영상이나 사진을 찍으신 분은 없으셨지요?”
신부는 한건우가 그런 걸 왜 묻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런 사람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을뿐더러, 누군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신부가 먼저 말렸을 것이다.
한건우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신부는 등골이 오싹했다.
심연 같은 그의 눈이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진짜로군.’
<거짓 간파> 특성을 쓴 한건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신부님, 구조대는 부르셨습니까?”
“네, 이미 해안 경비대에 신고했습니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아까 주민들에게는 경비대가 금방 도착할 것처럼 말했지만, 거짓이었다.
순순히 대답하던 신부가 말을 흐렸다.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 각성자들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지?’
복장이나 분위기로 보아서, 경비대 소속 플레이어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
근처에 있다가 경비대의 호출을 받고 먼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강한 각성자들이 왜 갑자기 섬에 나타났단 말인가?
신부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한건우가 그런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헬기를 타고 지나다가 심상치 않아서 들렀는데, 마침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무사했으니, 저희가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신부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속이 착잡했다.
정부 소속이 아니라면 민간 길드나 용병이라는 것인데···.
목숨을 살려 준 값으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목숨 값을 먼저 입금할 때까지 손끝 하나 안 움직이는 자들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양반이라 해야 하나···.
돈이 많다면 얼마든지 보답하고 싶었지만, 이 가난한 성당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섬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건우는 깔끔하게 돌아섰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
그냥 간다고?
신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들은 멀어지는 그의 뒤로 연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할아버지를 보러 울릉도에 와 있던 학생이 신부에게 조심히 다가왔다.
“신부님. 저 사람 뉴스에서 본 것 같아요.”
“예?”
“그 S급 자연각성자... 한건우요.”
“....”
신부는 은퇴한 이후에 각성자 쪽 소식은 일부러 멀리했다.
뉴스도 안 듣고, 안 보았다.
그런 신부마저도 한건우의 이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S급’이라는 단어를 듣고, 주민들이 흥분해서 웅성거렸다.
신부는 여전히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떠오른 건 경외심이었다.
***
투두두두···.
한건우가 모는 헬기가 동해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새로 갈아끼운 마정석의 힘이 그전보다 훨씬 좋았다.
‘헬기 빌려준 값이랑... 수리비 정도는 되겠군.’
헬기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손상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날아가기는 했다.
저 아래 바다에는 배 몇 척이 섬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정부 소속 해안경비대의 경비정이었다.
이제 경비대는 마수의 시체로 더러워진 부분을 주민들과 함께 정화할 것이다.
“한건우 씨, 저··· 괜찮을까요?”
이비현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와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비행이 괜찮냐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뒷좌석에 누워 잠든 은설아였다.
언뜻 보기엔 은설아의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열에 들떠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개화한 특성과 싸우느라 그래.”
“네?”
이비현은 그 표현을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시점에 이 지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어떤 계기로 특성이 개화했는데, 그 특성이 각성자의 스탯을 넘어서는 수준일 때 벌어지지.”
“아하··· 그런 경우도 있군요.”
“매우 드문 현상이야.”
이비현은 뒷좌석을 기웃거렸다.
심각한 상태 같은데, 한건우가 덤덤하게 말하니 괜찮은가 싶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하나요?”
“아침이 되기 전에 자연스럽게 나을 거야.”
한건우도 마음 같아서는 힐러를 찾아가서라도 열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걸 이겨내야 특성 개화가 온전히 자리잡기 때문이다.
한건우 자신도 회귀 전에 겪었던 일이었다.
“끼이이잉!”
난데없이 새끼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비현이 잠깐 아공간 무기고를 열었던 것이다.
“끼잉, 낑 낑.”
“얌전히 있어!”
이비현이 엄중하게 경고를 하고는, 아공간을 다시 닫았다.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한건우에게 변명했다.
“무기고가 엉망이 될까봐 걱정돼서요···.”
“사슬로 잘 묶어 놨으니 걱정 마.”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은설아의 친구였던 새끼 그리핀 한 마리를 데려왔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외로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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