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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6) - 정신지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은설아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뭔가 변한 걸 느낀 것 같았다.
“설아!”
한건우가 크게 소리쳐서 은설아를 불렀다.
갑자기 강해진 특성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놓아 버리면 큰일이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 각성자에게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어···?”
은설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기의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각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자기에게 있는 능력이 <특성>이라는 것도 몰랐고, 특성 사용을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잘 몰랐다.
스테이터스를 켜서 보는 법조차 몰랐으니, 할 말 다했다.
그런데도 은설아는 본능적으로 특성의 사용법을 알았다.
‘이상해. 뭔가 될 것 같아.’
은설아가 자기의 손바닥을 그리핀들 쪽으로 펼쳤다.
“!”
스으으으···.
한건우는 은설아의 손에서 강한 마기가 솟구쳐서 뻗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흥분해서 날뛰던 성체 그리핀들이 동시에 주춤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특성을 발동하고 있는 거야.’
은설아를 보는 한건우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일이 쉬워지겠군.’
개고생을 안 해도 일이 풀릴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은설아가 가진 테이밍 계열의 신화급 특성, <비스트 마스터>.
마수와 소통하고, 정신을 지배하고, 극의에 이르면 마수와 합체할 수도 있는 특성이다.
한건우도 그 특성을 흡수했지만, 딱히 전투에서 활용은 못 해봤다.
처음에 뇌룡의 심장 조각과 합체하는 데 쓰인 후, 잠재 특성으로 돌아간 것처럼 잠잠했다.
‘재앙급 마수와 계속 합체를 유지하는 것만도 벅찬 건가?’
짐작하기에는 그랬다.
물론 그걸 가지고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 특성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까.
뇌룡의 심장 조각에 그대로 먹혀서 사망했을 것이다.
특수안보부의 함정이 그대로 자신의 무덤이 되었겠지.
‘이제는 은설아만 데리고 오면 돼.’
모든 신체조건이 테이머로서의 적성에 맞는 은설아다.
테이머는 보통 각성자와 다른 신비스런 면이 있었다.
타고난 테이머에게는 마수 관련 스탯이 따로 있다는 뜬소문까지 있을 정도니까.
한건우는 어쩔 수 없이 옛날 생각이 났다.
*
회귀 전 은설아를 사살하라는 태백산 임무.
-분명 특성인데···. 저 각성자의 몸에서는 권능에 가깝게 발휘된다고 한다. 모두 조심해라.
당시만 해도 한건우는 부대장이 아니라 일개 부대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며칠간의 잠복 끝에, 잠깐 마주친 은설아의 모습은··· 정말 희한했다.
마수인 샤벨 타이거의 등에 업힌 채로, 그 마수와 반쯤 합체되어 있던 은설아.
그녀의 배와 양 다리는 마수의 몸에 뿌리내린 것처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나무가 하나로 이어져 버린 것처럼....
-괴물이다···.
-죽여!
충격을 받은 동료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탄환과 석궁을 쏘았지만, 번번이 빗나갔다.
겁을 먹은 은설아는 산 속 깊이 숨어버렸다.
한 번 놓치자 다시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또 지루한 추적의 반복.
산 속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부대원들은 지쳐갔다.
부대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이 아니라 마수를 사냥하는 것처럼 여겼다.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험난한 임무 때문에 인내심이 다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부대원들은 마수의 발자취와 흔적을 신중하게 확인하고, 회의를 했다.
-보니까 이거 혼자가 아니에요.
-뭐? 테이머가 또 있다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닙니다. 외톨이가 되어서 떠도는 마수들을 거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 마수들이 많아? 얼마나 강한데.
-아뇨··· 흔적을 보면 별로 강한 마수들은 없어요. 다치거나 약한 놈들 같아요.
-흠. 어려서 마음이 약한 모양인데?
부대원 중 한 명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제 형이 압류팀에서 일하는데요, 요즘 불법 애완용 마수 압수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새끼 한 마리 데려올까요?
-그래, 뭐라도 해보자.
"끼잉...."
온몸의 뼈를 부러뜨린 채로, 산길에 방치된 애완용 마수.
언뜻 보기에 마수가 아니라 조그만 새끼 곰 같기도 했다.
몰래 애완용으로 키울 수 있을 만큼, 인간에 대한 공격성은 약한 종이었다.
얌전하고 온순한 마수여서, 각성자라면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는 정도.
“끼이이잉, 끼잉.”
새끼 마수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산 속에 번져갔다.
-와라.
은설아는 부대원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한밤중에 정말로 새끼 마수를 보러 나타난 것이다.
-....
처음에 은설아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한참을 머뭇댔다.
부대원들은 물론 냄새와 기척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녀.
새끼 마수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봐야 여동생 또래로 보였다.
한건우는 마음이 울컥했다.
그때 부대장이 명령했다.
-쏴라!
피유우우-.
타앙!
먼저 원거리 사수들이 공격했다.
석궁 화살과 마탄환이 그녀와 샤벨 타이거의 몸에 박혔다.
놀란 은설아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근처에는 가느다란 금속 실로 된 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공격!”
검사 클래스를 앞세워서, 근거리 딜러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은설아와 합체한 샤벨 타이거는 꽤 강했다.
아무도 유효타격을 못 주고 지지부진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부대장은 앞서서 막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건우!”
부대장이 한건우의 이름을 불렀다.
너를 믿는다는 듯한, 신뢰가 담긴 목소리였다.
한건우가 당시 어렵게 개화했던 유일한 특성.
[특성 발동 : 광전사]
“이야앗-!”
한건우의 눈이 붉어졌다.
뇌가 끓어오르는 듯하고, 사고가 정지했다.
신체의 모든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부풀어올랐다.
한건우는 이 특성만 발동하면 사람이 바뀌었다.
그저 명령대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열망에 강하게 사로잡힐 뿐.
“....죽어라!”
한건우는 선두로 나갔다.
부상은 두렵지 않았다. 뒤쪽에서 버퍼와 힐러들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의 대검이 삽시간에 춤을 추며 밤공기를 갈랐다.
*
“키잇-.”
“케윽, 켁.”
"...!"
성체 그리핀들이 낸 소리였다.
12마리의 성체 그리핀들이 동시에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은설아를 공격하려던 것도 모두 멈추었다.
대부분 허공에서 중심을 못 잡고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지 독수리 머리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테이밍을 거부하는군.'
그리핀은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었다.
새끼와 성체는 정신 수준도 달랐다.
다른 이가 자신을 통제하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핀들은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높이 날아오르려 했다.
은설아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패였다.
그리핀들은 날개는 제대로 펴지 못하고, 힘없이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와.”
한건우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비티 필드보다 낫잖아?’
아까 새끼 그리핀들을 바닥에 꿇어앉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기를 쓰고 중력 강화의 반동까지 견디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2차 개화한 <비스트 마스터>의 위력.
과연, 개화 전 은설아의 능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원래는 새끼 그리핀 한 마리와 친해지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성체 그리핀을 12마리나 조종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까지 적대적이던 마수들을 말이다.
“쿠에엑.”
[어지러워.]
아직 완전히 정신 지배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핀들은 바닥을 딛고 휘청거리면서 맴돌았다.
그걸 본 이비현이 맹독 시미터를 들고 그리핀들의 목을 따려 했다.
“안 돼!”
한건우는 다급히 이비현을 멈추게 했다.
“왜요?”
이비현이 억울한 눈빛으로 한건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마수들을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왜 말리는지 이해가 안 갔다.
“테이밍 중이잖아.”
“아.”
정보에 밝은 이비현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테이밍을 시전하는 중에 그 마수를 건드리면, 테이머에게도 타격이 갔다.
테이밍이 완료된 상태여도 타격이 있지만, 지금처럼 테이밍을 쏟아붓는 중에는 취약할 수 있다.
이비현이 순간적으로 판단 실수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국에 테이머에 대해서 익숙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귀를 알아듣는 게 놀라울 정도니까.
“그리고 지금 죽이면 곤란하지.”
“왜죠?”
한건우는 대답 없이 분화구 쪽을 가리켰다.
백문이 불여일견.
“저걸 봐.”
“...앗!”
저 멀리서 엄청나게 거대한 그리핀이 날아오고 있었다.
두 날개를 펼치니, 거의 집채만했다.
그리핀 일족의 수장이었다.
"아까 그...."
이비현이 산 정상에서 몰래 지켜봤던 가장 큰 그리핀이었다.
그리핀 일족의 수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잡은 섬이었다.
그런데 힘들게 키운 새끼들을 한 순간에 모두 잃었다.
게다가 자신의 부인들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금이라도··· 테이밍을 멈추게 하면 어때요?"
이비현이 제안했다.
거대한 그리핀이 오기 전에, 좀더 만만한 성체 그리핀들 수라도 줄이자는 뜻 같았다.
한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더욱 놔 둬야지.”
“....”
이비현은 최악의 경우를 우려하는 것이었다.
만약 테이밍에도 실패하고, 그리핀의 수장이 도착한다면....
열세 마리의 그리핀 무리를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비현은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만큼 한건우의 판단을 믿었던 것이다.
"음...."
한편 한건우는 거대한 그리핀이 날아오는 속도를 재보더니, 혀를 찼다.
아직 성체 그리핀들은 테이밍이 제대로 걸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
리더십을 가진 수장이 근처에 오면, 약한 정신지배는 풀려버릴 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되면 좋았을텐데, 어렵겠군.'
한건우는 그리핀의 수장이 날아오는 방향을 계산했다.
옆의 건물 담장을 타고 올라가, 지붕 위에 올라섰다.
한건우가 은설아를 돌아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설아야. 미안한데 무리 좀 하자.”
[특성 발동 : 용맹의 가호]
- 다른 플레이어가 발동하는 특성을 일시적으로 강화한다
파아앗!
“허억.”
좀처럼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버프 특성이었다.
은설아의 고개가 무방비하게 뒤로 휙 넘어갔다.
버프 특성의 효과는 확실했다.
은설아의 몸에서는 아까보다 훨씬 진한 마기가 뿜어져나왔다.
“키이익!”
“케에에에!”
성체 그리핀들의 반응은 아까보다 훨씬 격렬해졌다.
은설아의 정신지배를 한사코 거부하는 듯, 공터와 건물 이곳저곳에 충돌하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강력한 테이머를 이길 수 있는 마수는 없는 법.
그리핀들은 곧 쥐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이리 와.]
은설아가 작고 또렷한 목소리로 마수의 말을 했다.
열두 마리의 성체 그리핀이 나란히 그녀의 앞에 도열했다.
한건우가 웃었다.
‘생각대로다.’
버프를 버텨 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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