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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5) - 재능충
예상치 못한 추락이었다.
그리핀들은 서로 엉망으로 뒤엉켰다.
“키에에엑!”
“끼익!”
아직 성체가 되기 전.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 정도인 그리핀들이었다.
비행이 능숙하지 못했기에, 착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 놈도 있고, 날개가 꺾인 놈도 있었다.
한건우가 쓴 특성은, 일정 범위의 공간에 중력을 가중하는 <그래비티 필드>.
비행하는 마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3차원으로 펼쳐지는 전장을 단박에 2차원으로 제한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래비티 필드 특성은 공짜가 아니었다.
특성 개화에 체력, 근력, 마력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크윽....”
한건우는 중력 가중의 반동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순간에 HP와 MP가 동시에 무더기로 깎였다.
‘이게 문제야.’
1000이 넘는 엄청난 마력 스탯을 가지고도, 한건우는 그걸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아직 MP 상한이 낮기 때문이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절대적인 훈련 시간의 벽이 있었다.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따라오지 못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자동 회복 능력이 천천히 그 위력을 발휘했다.
[감소된 HP와 MP를 초당 1%씩 자동 회복한다]
‘1분만 버티면, 60% 회복···.’
변이 균열에서 얻은 특전.
고대신이 된 히드라 고기의 위력이었다.
‘이건 뭐.’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한건우에게 맞춤형으로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 1분을 버티려면, 다른 사람의 지원이 필요했다.
“이비현-.”
쉬이이익-!
“!”
한건우가 이비현을 채 부르기도 전에, 한건우와 가장 가까이 있던 그리핀들이 썰려나갔다.
맹독 시미터를 든 이비현이 날듯이 달려왔다.
"이비현, <그림자 맹시>를 써."
"지속 시간이 모자라요!"
이비현이 곧바로 반박했다.
그때 한건우가 팁을 주었다.
"꼭 연속으로 쓰지 않아도 돼."
"...?"
이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멸을 해보라는 거야."
"...이렇게요?"
이비현은 시험삼아 보여주는 것처럼, 1-2초간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림자 맹시>의 사용이 몸에 완전히 익은 그녀였기에, 말만 듣고도 쉽게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본 적은 없는데.... 굳이 왜?'
이비현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한건우가 말한 대로 점멸하듯이 특성을 사용했다.
그녀가 몇 번 그리핀과 부딪쳐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감탄했다.
"아!"
한건우가 미소지었다.
이비현이 드디어 자신의 특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비현의 <그림자 맹시> 특성은 매우 유용하지만, 지속 시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
그녀는 항상 이 특성에 기대서 전투를 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지속 시간이 끝나버리는 게 두려웠다.
그런 일이 생기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비현은 특성 지속 시간을 몇 초라도 늘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무조건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지속시간을 늘리지 않아도,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연료를 아껴서 쓰는 것처럼, 특성을 점멸하듯이 결정적인 순간에만 쓰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치열한 근접전 중에는, 단 0.1초의 <맹시>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
매우 기초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이비현을 바보 취급하지는 않았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간단한 발상도 떠올리기 어렵기 마련이지.'
슈우웅-!
“키이익!”
이비현이 단 1초간 점멸하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 당황한 그리핀의 한쪽 날개가 베여져 나갔다.
쉬익!
이비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모양새로, 우왕좌왕하는 그리핀을 공격했다.
“끼에엑!”
날개죽지의 힘줄을 베는가 하면, 눈을 찌르기도 했다.
한건우는 자동회복을 하면서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비현은 암살자 클래스인 만큼 1대 1로 싸우는 전투에 익숙해 보였다.
마수와 싸운 경험도 많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무기는 <맹독 시미터>.
암살을 위해 태어난 그 무기는, 특징이 확고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있는 칼날의 모양.
궤적을 예상하기 힘들고, 빠른 방향 전환으로 적의 눈을 혼란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만큼 단점도 뚜렷했다.
우선 날의 길이가 짧았다.
무기의 길이는 팔의 길이나 마찬가지.
상대방의 안쪽으로 가까이 파고들지 못하면 불리하기 마련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건우는 그녀와 처음 전투했을 당시의 느낌을 되새겼다.
'칼날의 무게가 많이 가벼웠어.'
신속한 움직임을 위해 무기의 중량을 포기한 것이다.
다른 무거운 병장기와 맞부딪치면, 자칫 튕겨나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늘, 이비현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림자 맹시>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무기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까이 파고들기가 쉬워지고, 몰래 치고 빠질 수 있으니까.'
충분히 회복한 한건우는 다시 전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비현 하나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한건우까지 참전한 셈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리핀 떼는, 금세 대형이 무너졌다.
그들은 하늘에서는 독수리지만, 땅에서는 사자였다.
마치 사자 무리처럼, 단체 생활을 하는 습성이 있는 마수들이었다.
대형이 흐트러지니, 곧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하나둘씩 그리핀들은 사신을 마주했다.
한건우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훌륭한 백업 역할을 해주는군.'
아니, 백업 정도가 아니었다.
한건우가 그녀를 다시 볼 정도였다.
“끼에에에엑!”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그리핀이 목 놓아 울부짖었다.
울음소리가 유독 간절했다.
불길함을 느낀 한건우가 급히 그 그리핀의 목을 그었지만, 이미 늦었다.
“하.”
성체 암컷 그리핀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새끼를 잃은 어미 그리핀들이었다.
그들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마치 아기사자를 잃은 어미사자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성당 지붕에 숨어있던 하얀 그리핀이 흥분하며 푸드덕거렸다.
놀란 은설아가 그리핀을 다독이려 했다.
“아니, 왜 이래, 가만히···.”
“끼에엑!”
어머니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얀 그리핀은 그리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래···.”
은설아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하얀 그리핀의 목덜미를 꼭 껴안았다.
만일 보내줘서 좋을 것 같았으면, 진작 가족에게 보내줬을 것이다.
"안 돼, 못 보내줘...."
하얀 그리핀은 태어날 때부터 돌연변이였다.
몸이 약했고, 형제들에게 밀려서 먹이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비행 연습도 잘 하지 못했다.
비행 연습에서 낙오된 새끼 그리핀.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도록 방치된 그리핀을, 은설아가 거뒀었다.
“안 된다니까....”
은설아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하얀 그리핀은 은설아를 등에 태운 채로 뛰쳐나갔다.
막상 가족을 보니,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것 같았다.
“...악!”
지붕 위에 숨어 있어야 하는데···.
하얀 그리핀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성체 그리핀들의 눈길이 이리로 쏠렸다.
어쩐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크르르르···.”
엄마인 성체 그리핀들이 공격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그걸 보고 있던 한건우가 혀를 찼다.
‘테이밍된 마수는, 마수들에게 적으로 인식되는데···.’
성체 그리핀이 으르렁거리며 위협하자, 은설아를 태운 하얀 그리핀이 주춤했다.
은설아가 하얀 그리핀을 다독였다.
[괜찬아, 괜찮아···.]
“!”
한건우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마수의 언어였다.
은설아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녀는 자신이 마수의 말을 한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하.’
한건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수수께끼가 풀렸다.
자신이 마수의 말을 알아듣던 것.
나아가, 마수와 대화를 할 수 있던 것.
그건 <비스트 마스터> 특성 덕분이었던 것이다.
'신화급 특성은 역시 다르군.'
테이밍 계열 특성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신화급 특성은 은설아와 자기밖에 없었다.
'유일'이라는 표시는 없으니, 외국에는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한국 땅에는 더 없었다.
‘...난 왜 테이밍은 안 되는 거지?’
또다른 의문이 샘솟았다.
분명히 한건우도 <비스트 마스터> 특성을 개화했다.
은설아와 똑같은 조건이다.
그런데 어째서 테이밍 능력이 발휘되지 않을까?
물론, 뇌룡의 심장 조각을 몸에 합체하는 데에 그 특성을 쓰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 특성이 전혀 발동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근본적인 물음에 사로잡히기 전에, 사건이 일어났다.
성체 그리핀 중 하나가 은설아를 공격한 것이다.
정확히는 은설아가 탄 그리핀을 공격하려 했다.
“!”
한건우가 미처 막기도 전이었다.
은설아와 흰 그리핀이 힘없이 성당 지붕에서 떨어졌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우우우웅-!
“윽.”
한건우가 기침을 뱉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충격 방지를 해주기 위해, 연속으로 2번이나 중력 가중 특성을 썼다.
그것도, 이번에는 역으로.
은설아는 흰 그리핀을 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한건우의 특성 덕분에, 사실상 물리적인 충격은 없는 상태.
바닥에 떨어진 은설아가 눈을 꼭 감았다.
묘한 빛무리가 주변을 감쌌다.
“어···?”
이비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한건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특성 2차 개화다.’
은설아가 가진 <비스트 마스터> 특성의 2차 개화.
대체 무슨 계기로 2차 개화가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냥... 재능인가?'
‘재능충’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각성자들은 특성 2차 개화를 목표로, 온갖 힘겨운 훈련과 실전에 뛰어든다.
그러고도 대부분 실패하는데.
은설아는 작은 위기에 처하자마자, 그냥 특성 2차 개화를 해버린 것이다.
'역시.'
한건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은설아를 길드원으로 확보하기 위해 찾아왔다.
아니, 길드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러 왔을 것이다.
물론 동정심이나 후회의 마음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건우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은설아의 미래는 한건우가 아는 대로 흘러갈 테니까.
은설아는 자신의 능력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큰 사고에 휘말리고, 정부에 의해 탄압받으리라.
그리고 마수를 사냥하듯이, 특수부대에 의해 잔인하게 사냥당할 것이다.
가능하면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라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은설아는 무조건 데리고 가야 해.'
마수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그녀의 능력은, 무한한 가치가 있었다.
테이밍 능력이 충분히 강해지면, 개인은 더이상 개인이 아니게 된다.
자신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마수 군대를 가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은설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흰자위가 없었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감돌며 일렁였다.
한건우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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