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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4) - 땅으로 내려와라
서쪽 바다 위를 물들인 석양이 옅어지고, 섬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저 멀리 분화구 근처, 수십 마리의 그리핀 떼가 저녁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가히 장관이었다.
바위 절벽에서 몇 번 날갯짓 연습을 하고 나서, 정식 비행은 처음인 그리핀 떼.
첫 비행에 들떠서 허공을 노니는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은설아가 데리고 있던 하얀 그리핀은, 부리를 쳐들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건우는 그리핀 떼가 있는 분화구와 마을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저놈들이 비행하면 순식간이야.’
과거 울릉도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주민 몰살 사건도 이렇게 일어난 것이겠지.
이 그리핀들은 어딘가 먼 곳의 미공략 균열에서 나와서 번식한 것이리라.
한국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는 균열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외국에는 방치된 영토도 많다.
떠도는 마수들 중에서, 그리핀과 같은 비행형 마수는 바다를 건너 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알을 낳으려 울릉도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은설아는 그때도 잘못이 없었구나. 그냥··· 살려고 도망친 것뿐이었군.’
한건우는 하얀 그리핀을 부둥켜안고 있는 은설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은설아가 이 섬에 재앙을 불러온 원흉일 거라고 오해했다.
한건우조차도 테이머 능력자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던 것이다.
테이머 능력자는 재앙 같은 존재라고, 훈련 때 하도 신물이 나도록 들어서 그런가···.
하지만 감상에 사로잡힐 시간은 없었다.
배가 고픈 그리핀 떼가 마을을 덮치면, 끔찍한 참상이 일어날 것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데서 싸우는 게 낫겠지?”
그때 이비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만요. 지금 도망치자는 게 아니라··· 저것들과 맞서 싸우자는 거였어요?”
이비현은 이런 데 목숨을 걸고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영웅적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음···. 그러고 보니.’
한건우는 그녀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납득했다.
이비현은 그저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온 것뿐.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았으니 철수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게다가 미등록자인 이비현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건우는 그녀의 감성에 호소하는 대신, 침착하게 물었다.
“도망을 간다 치고, 어떻게 가게?”
“그야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야죠.”
타고 온 헬기는 안타깝게도, 그리핀 떼에게 마정석을 털려 버렸다.
헬기가 못 뜨게 되었으니 배를 탄다.
언뜻 보기엔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여기 주민들 다 죽으면, 배는 누가 몰아.”
“아··· 한건우 씨가요?”
이비현은 희미한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 치고. 저놈들이 배까지 쫓아오면? 바다 위에서 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건.”
이비현은 갈등했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넓은 땅이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굳이···.
“비현아. 저놈들 잡아서, 우리 헬기 띄우자.”
“네에?”
이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가능하네···.’
균열에서 마수를 잡으면 저절로 보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마치 아이템처럼 인식되지만.
마정석의 정체는 마수의 심장이었다.
각성자가 마수를 죽이면 그 심장인 마정석을 직접 꺼낼 수도 있었다.
은설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녀가 하얀 그리핀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그리핀이 얌전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은설아는 낑낑대며 그리핀의 등 위에 올라탔다.
“?”
“아저씨랑 언니도 같이 타세요. 마을로 빨리 가게요.”
“...거기 타라고?”
부상당한 채로 사람의 집에서 지내던 그리핀이었다.
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왠지 은설아는 날 수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마침 그때, 절벽 근처 허공에서 노닐던 그리핀 떼가 한데 모였다.
그리핀 떼는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마을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말했다.
“저기 멀리. 마을에 십자가 보이지? 저 근처에서 만나.”
“앗···.”
한건우가 가리킨 것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었다.
높이 솟은 십자가가 뚜렷한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한건우는 직접 뛰어갈 준비를 했다.
은설아의 그리핀이 진짜 날 수 있다고 해도, 한건우까지 타는 건 무리니까.
대신에 효자 같은 스킬이 있었다.
[스킬 발동 : 전격 쇄도]
쿨타임만 짧았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면 스킬이 아니겠지.
타다다다-!
한건우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움직였다.
이비현은 갑자기 은설아와 둘이 남겨졌다.
그녀가 당황한 감정을 감추고 물었다.
“이거 진짜 날 수 있는 거...야?”
푸르르르!
자존심 센 그리핀이 불만스럽다는 표현을 했다.
감히 의심하냐는 의미 같았다.
“될 것 같아요. 기분이 그래요.”
은설아의 말은 더욱 미심쩍었지만, 이비현은 눈치를 보면서 그리핀의 등 뒤에 올라탔다.
‘못 날면 다시 내리면 되지 뭐···.’
두두두두-
“악!”
하얀 그리핀은 두 사람을 태우자마자, 위태로운 비탈길로 질주했다.
이비현은 비명을 지르며 그리핀의 날개죽지를 꽉 잡았다.
휘익!
파아아!
흰 그리핀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너른 날개를 폈다.
잠시 추락하는 듯 하더니, 거짓말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아···!”
펄럭!
비행에 성공했다.
이비현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하···. 내가···. 내가 미쳤지.”
이비현은 그리핀의 깃털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심지어 비행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불규칙적인 날갯짓.
헬기랑은 비교도 안 되게 무서웠다.
“와, 와, 이건···.”
이비현은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조금 마음의 안정을 찾자, 새삼 이 상황이 신기했다.
‘마수를 타고 날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테이밍 능력이라는 게 정말 대단하네.’
이비현도 마수를 길들이는 테이밍 능력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테이밍 능력자라고 해도, 낮은 등급의 마수를 1, 2마리 길들이는 게 보통이었다.
특성 수준이 낮으면 길들여지는 정도도 약했다.
그러나 테이밍 능력의 무서움은, 그 깊이와 범위에 한계가 없다는 데 있었다.
마수와 단순히 친밀하게 소통하는 걸 넘어서서,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자유자재로 합체까지.
동남아시아 쪽에는 S급 테이밍 능력자가 독재자가 되어 지배하는 나라도 있다고 들었다.
‘얘도 분명, 엄청 강하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건우가 그토록 찾으려 한 각성자이니 보통은 아닐 것 같았다.
한참 아래에, <전격 쇄도>로 움직이는 한건우가 점처럼 보였다.
그녀를 태운 그리핀이 마을에 가까워지자, 이비현은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저기 지붕 위에 내릴까.”
굳이 올려다보지 않으면 밑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하얀 그리핀은 성당 지붕에 가뿐히 착륙했다.
이어서 한건우도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서 숨을 골랐다.
그 때였다.
위이이이잉-!
[주민 여러분, 비상입니다! 지금 즉시 대피 바랍니다! 집에 계신 분은 지하실로 들어가시고, 바깥에 계신 분은 마을회관이나 성당으로, 지금 즉시 대피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이어, 다급한 안내방송이 들렸다.
요즘 시대에 ‘비상’이라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균열 아니면 마수 습격이었다.
조용하던 마을이 갑자기 발칵 뒤집어졌다.
“아범아, 빨리 들어와라!”
“어머니! 어디 계세요!”
천만 다행히도, 그리핀 떼는 사람을 먼저 덮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더욱 탐나는 먹이가 있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축사 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축사에서는 황소 수십 마리를 길렀다.
움머어어!
무우!
마수를 보고 겁먹은 황소들이 울타리를 뛰어넘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서로 부딪치느라 다리가 부러지는 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핀 떼의 돌격이 더 빨랐다.
수십 마리의 흥분한 그리핀 앞에서, 황소들은 그야말로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삽시간에 축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를 틈타서, 마을 주민들은 임시로나마 대피할 수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지만, 마을 성당으로 모인 사람이 제일 많았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잠시 머물러 온 젊은 가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성당으로 모인 이유는, 이 가난한 성당의 사제 때문이었다.
그 사제는 믿음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은퇴한 플레이어 출신이라고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다.
“신부님, 어떡합니까 이제···.”
“저희 다 죽는 거죠?”
아까 비상대피 방송도 이 신부가 한 것이었다.
신부가 침착하게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해안경비대에 신고를 했으니, 침착하게 기다립시다.”
“언제 온답니까!”
“...조금 걸린다고는 합니다. 우선 커튼을 닫고 안에서 조용히 버티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신부는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커튼을 닫다가, 창 밖을 보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
알에서 깨어난 그리핀 떼의 첫 사냥.
그건 몹시 잔혹한 풍경이었다.
오직 먹이를 구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이쯤에서 끝났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핀 떼는 고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피 냄새에 흥분해서 불필요한 살생을 했다.
강철 같은 부리로는 모든 황소를 다 물어 흔들어 죽였다.
또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떼지어 날아올랐다.
아무도 없는 마을 한복판, 한건우가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사냥감을 발견하고, 그리핀 떼가 눈을 빛냈다.
쉬이이이익!
슈우웅!
치잉-!
한건우가 긴 창을 아무리 휘둘러도, 수십 마리의 그리핀 떼를 막기 쉽지 않았다.
그들은 공중에서 무작위로 공격해 들어왔다.
한건우의 창은 유효타는 입히지 못하고 깃털만 날렸다.
‘성가시군.’
3차원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2차원에서 상대하기란 벅차기 마련이다.
만일 <경공> 스킬 주문서가 있었다 해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그리핀들을 상대하기는 벅찼으리라.
하물며, 단체 사냥이 습성인 그리핀이니.
‘이러면 투창도 쓰기 어렵겠어.’
상대가 한 마리라면 모를까.
창을 던진 후에 덤벼드는 그리핀은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황소의 피를 뒤집어쓴 그리핀 떼는, 한건우의 피를 마저 보고 싶어서 열이 올랐다.
그렇게 그리핀 떼가 전부 한건우에게 어그로가 끌려 있을 때였다.
한건우는 새로운 특성을 시전했다.
마력, 체력, 근력 모든 스탯이 받쳐줘야 개화하는 특성이었다.
이걸 사용하면 어마어마하게 무리가 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개화하고 나서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
‘음··· MP 자동회복만 믿는다.’
한건우는 손바닥을 펼쳐, 땅을 보도록 하고 뻗었다.
[특성 발동 : 그래비티 필드]
- 일정한 공간의 중력을 가중합니다.
“모두··· 땅으로 내려와라.”
파드드득!
파다닥!
콰아아악-
기세 좋게 허공을 날던 그리핀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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