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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3) - 죽으라는 법은 없다
외딴 곳에 방치된 폐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노크 소리에 겁을 먹은 은설아는 쥐죽은 듯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척해야지. 금방 갈 거야.’
바깥에서 기다리던 한건우는 한숨을 쉬었다.
겁을 먹고 숨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끌어내야 할까.
“안에 있지? 잠깐 얘기 좀 할까?”
“....”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냈지만, 스스로도 위협적으로 들렸다.
‘음··· 차라리 이비현을 데려올걸 그랬나?’
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이비현이다.
별로 다를 것 없겠지.
“밖으로 잠깐만 나와 볼래?”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게 빠를 텐데.
역효과가 날 게 뻔하니 참았다.
집 안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덜컥!
“끼이익!”
“조용히 해. 빨리 도망가.”
숨 죽인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마수의 울음소리.
“끼잉···.”
푸드덕!
‘이럴 줄 알았다···.’
보아하니 몰래 뒷문을 열고, 마수를 도망치게 하려는 것 같았다.
한건우는 미리 봐 두었던 뒷문으로 돌아갔다.
“빨리 도망가란 말야···.”
뒷문 앞에는 겁먹은 소녀와 새하얀 그리핀 한 마리가 보였다.
“악!”
은설아가 그리핀의 궁둥이를 억지로 떠밀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한건우를 보고 뒤로 주저앉았다.
열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은설아는 꾀죄죄하고 조그마했다.
제대로 씻거나 먹지 못했는지, 상태가 영 안 좋았다.
“설아야, 괜찮아.”
한건우는 여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막상 보니 여동생 지윤보다 훨씬 작았다.
“네 친구도 해치지 않을게.”
놀라서 푸드덕거리던 그리핀 역시, 은설아를 따라서 다리를 접고 푹 주저앉아버렸다.
그리핀은 날개와 다리가 다친 상태였다.
은설아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아저씨···.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들었어.”
은설아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본명이었으면 좀더 찾기가 쉬웠을 것이다.
은설아는 나름대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저씨는··· 음··· 우리 엄마 친구예요?”
그렇다고 하면 편하려나?
순간 고민했지만, 한건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뢰를 주려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니까.
이어지는 혼잣말은 조금 섬뜩했다.
“진짜 이상하다···. 내 새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다 죽었는데?”
한건우는 분위기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그가 절뚝거리는 하얀 그리핀을 가리켰다.
“네 친구가 아픈 것 같네. 치료해 줘도 될까?”
“...치료할 수 있어요?”
은설아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직 순수한 어린아이였다.
한건우가 하얀 그리핀에게 성큼 다가가자, 그리핀이 날카로운 부리를 위협하듯 벌렸다.
“키이익!”
[저리 가!]
한건우는 힐링 포션을 꺼냈다.
'역시 포션은 어떻게든 쓸 일이 있단 말이지.'
자신에게는 더이상 필요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 챙기고 다니기는 해야겠다.
“설아야, 네 친구 좀 달래줘. 약 먹이려는 거야.”
“....”
은설아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아가 까치발을 딛고 그리핀의 새하얀 머리 깃털을 쓰다듬자, 그리핀은 눈을 꿈뻑거리며 얌전해졌다.
그 사이에 한건우는 그리핀의 부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주둥이 안에 포션 1병을 다 들이부었다.
꿀꺽.
그리핀은 순순히 힐링 포션을 넘겼다.
한 모금에 1병이 다 넘어갔다.
‘마수한테 포션을 먹여본 사람이 또 있으려나?’
마수나 각성자나 MP나 HP를 쓰는 건 똑같다.
그러니 힐링 포션의 효과도 동일했다.
“와아···.”
은설아는 눈에 띄게 회복되는 상처를 보고 감탄했다.
1병으로는 모자랐다. 한 병을 더 깠다.
‘힐을 주는 특성이 개화되면 편할 텐데.’
스탯만 올린다고 모든 잠재 특성이 다 개화되는 게 아니었다.
어떤 특성은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개화된다는데, 그 계기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뭐, 힐링 포션을 먹이는 게 좀더 그럴싸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쭈뼛거리던 은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도... 신고할 거예요?”
아저씨 ‘도’?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데?”
“제발··· 그냥 모르는 척하고 가 주세요. 저랑 있으면 위험해요. 예전에도 나 때문에... 다 죽었어요.”
은설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제법 앙칼지게 경고했다.
“다 죽었다고? 그건 무슨 얘기야?”
한건우는 의아했다.
일부러 울릉도 주민들이 몰살당하기 전에 미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비슷한 일이 있었나?
“나 때문에 강릉에서, 새엄마랑 보육원 사람들도 다 죽었어요···.”
“....”
“난 숨어서 살아야 돼요. 나 때문에 다들 위험해지니까.”
한건우는 과거에 알던 정보가 생각났다.
SSS가 테이머를 박해하게 된 이유가 된 사건.
‘테이밍 특성을 가진 자연각성자 때문에, 위험한 마수가 인가에 꼬여들었다고 했어. 그리고 군인들이 그걸 섣불리 제압하려다, 마수가 폭주해서 인명 피해가 났다고···.’
그 사건으로 보육원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그 이후 SSS는 테이밍 능력을 죄악시했다.
제어가 안 되는 위험한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테이밍 특성을 각성한 자가 있으면, 플레이어를 못 하도록 뒤에서 조종하거나, 심지어 암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강릉 사건은 테이머의 탓은 아니었어.’
적어도 한건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폭주를 일으킨 마수는, 정부 실험실에서 탈출한 실험체 키메라가 아니었던가.
그걸 순수하게 테이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당시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은설아였구나....'
그리고 한건우는 은설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았다.
“설아야.”
“...네.”
은설아는 과거 생각에 잠겨 풀이 죽은 채였다.
한건우는 몸을 낮춰서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넌 너의 능력을 겁내고 있지?”
“....”
“맞아. 네 능력은 정말 무서운 능력이야.”
“어···.”
은설아의 큰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해.”
“....”
“여기서 언제까지 혼자 지낼 수는 없잖아. 같이 가자. 정식으로 등록된 각성자가 되도록 도와줄게.”
은설아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엄청난 속도로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하, 한건우 씨.”
이비현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그녀의 뒤편, 석양이 붉게 저문 하늘로 그리핀 떼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말씀하신 대로 산 분화구 쪽으로 올라가서, 절벽 쪽으로 갔더니···.”
“10초로 요약.”
그리핀 떼를 보며, 한건우가 쏘아붙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핀 둥지가 있었어요. 우두머리가 한 마리, 성체가 열두 마리 있고, 알에서 나온 새끼는 수십 마리예요”
“그게 다야?”
한건우는 사실 이비현을 의심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겨울이 될 때까지, 마수들이 섬에서 날뛰었을 리가 없었다.
알에서 깨어난 그리핀은 한동안 날지 못했다.
그리핀은 성체가 되기 직전에 첫 비행을 하는데, 그때 처음 자기 힘으로 사냥을 한다.
이미 산짐승은 거덜이 났을 테니, 인가로 내려갈 가능성이 컸다.
이비현이 뭔가를 자극해서 그리핀 떼가 난동을 부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저는 진짜로 몰래 관찰만 했다구요! ···성체 그리핀 한 마리가 어디선가 마정석을 물고 왔어요. 그걸 으깨서 새끼들에게 먹였고···. 새끼들이 금세 커지기 시작한 거예요.”
“마정석을 물고 왔다고?”
한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근처에 미공략 균열이라도 있는 건지···.”
“그럴 리가. 헬기 엔진에서 꺼내 온 거겠지.”
“아···!”
한건우는 아공간 무기집에서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은설아가 깜짝 놀랐다.
하얀 그리핀도 함께 놀라서 깃털을 크게 부풀렸다.
한건우는 잠시 고민했다.
“설아야. 여기 잘 숨어 있을래?”
전투 경험도 없는 어린애를, 전장에서 컨트롤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리핀 떼는 마을로 내려갈 가능성이 높으니, 인적이 드문 이쪽은 비교적 안전할 것 같기도 했다.
“아뇨, 아저씨.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한건우는 거절하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차라리 보이는 곳에 놔두는 게 맘 편할 수도?’
한건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같이 가자. 대신 말을 잘 들어야 돼. 알겠지?”
“네.”
이비현은 시미터를 꺼내다가 잠시 굳었다.
한건우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비현이 물었다.
“그럼,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한건우라면 뭔가 기발한 대책이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는 기색이었다.
“음....”
한건우가 창을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뭐, 죽으라는 법은 없겠지?”
“....”
이비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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