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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탈출 (2)
“헉···.”
이비현은 한건우를 보고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한건우에게서 마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저화질에서 UHD로 바꾼 듯한, 새로운 눈이 뜨인 느낌.
체력 스탯을 올리면서 특성이 2차 개화되었다.
이제는 열기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한건우는 <화식조의 눈> 특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HP나 MP를 별로 소모하지 않고, 타고난 감각처럼 쉽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특성다운 특성이지.’
한건우는 <화식조의 눈>으로 섬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산 쪽에 멈추었다.
울릉도 한가운데에 솟은 성인봉.
석양을 받은 산봉우리 근처에, 열기 덩어리가 바글바글 뭉쳐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사람이나 산짐승은 아니야. 체온이 너무 높아.’
아무래도 마수인 것 같았다.
체액이 차가운 파충류나 곤충형 마수는 아니었다.
포유류나 조류 형태의 마수일 것이다.
‘이상하군. 균열이 열린 것 같지는 않은데.’
섬에 균열이 열렸다면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저만한 마수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산비탈의 허름한 집 안에도 열기가 하나 보였다.
‘저건 또 뭐야?’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저기부터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이비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눈에 그거, 특성이죠? 한건우 씨는 특성이 몇 개예요?”
특성이 여러 개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각성자는 특성이 1개밖에 없는 게 보통이었다.
회귀 전의 한건우처럼 특성이 없는 자도 있었고, 간혹 2개의 특성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1개는 넘어.”
이비현은 역시 그렇구나, 라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으시네요.”
“그런 편이지.”
한건우는 자신의 행운을 순순히 인정했다.
운이 좋다는 표현은 낯설지만 사실이었다.
플레이어가 가지는 능력은 세 가지가 있었다.
한건우가 개화한 악마의 권능처럼,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권능>.
플레이어가 각성할 때 나타나는 <특성>.
마지막으로, 균열에서 보상으로 나오거나, 마켓에서 스킬 주문서를 사서 쓸 수 있는 <스킬>.
특성과 스킬은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특성은 각성자의 몸에 체화되어서 영구적으로 쓸 수 있지만, 스킬은 거의 일회용이었고, 아닌 경우는 쿨타임이 매우 길었다.
발전 가능성도 달랐다.
특성은 2차, 3차 개화하면서 점점 강해질 수 있지만, 스킬은 그런 게 없었다.
‘1개의 권능, 100 가지가 넘는 특성이라.’
일당백의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자질이었다.
하루빨리 잠재특성을 모두 개화하고, 개화한 특성도 더 심화시키고 싶었다.
한건우는 좀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이비현에게 지시했다.
“이비현. 성인봉 분화구 근처를 정탐해보는 게 좋겠어. 마수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몸을 잘 숨기고.”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이비현이 긴장한 얼굴로 산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각성자도... 그쪽에 있을까요? 제가 데려오면 되나요.”
“아마 거기에는 없을거야.”
“그럼···?”
“상황이 어떤지만 조용히 보고 와.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한건우는 그녀에게 단독 정찰 임무를 맡겼다.
이비현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난번 암흑 균열에서, 이비현은 절제심을 잃고 마수의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결국 잘 해결되긴 했지만, 그건 꽤 크리티컬한 실수였다.
‘그때는 전임 대장 유영원의 목숨이 걸려있었으니 예외적인 경우라 치고.’
만일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앞으로 이비현을 믿고 뒤를 맡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시간 후에 저기 집 근처에서 만나자.”
“알겠어요.”
이비현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녀는 잿빛 망토를 깊이 뒤집어쓰고 앞서 갔다.
이비현은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금방 알아보고 빠르게 올라갔다.
암살자 클래스답게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한건우는 그 반대 방향, 산중턱의 허름한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은설아는 저기 있을 거라고, 그는 추측했다.
**
이비현은 한건우의 지시대로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세상에 균열이 생기고 나서, 등산이나 야영 같은 건 옛날 얘기가 되었다.
깊은 산이나 숲 속에는 미공략 균열에서 새어나온 마수가 살기도 했다.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산에 올라가는 건 만용이었다.
이곳 울릉도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아랫마을에만 살았고, 산 속은 야생 그 자체였다.
땅바닥은 물기 어린 잡초와 고사리로 미끄러웠지만, 이비현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주위는 고요해졌다.
‘산새나 산짐승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
마수가 있는 곳과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이비현은 <은신의 룬> 주문서를 썼다.
피 냄새를 감춰주고, 형상을 살짝 희미하게 하는 스킬이었다.
은신 수준은 낮지만 오래 지속된다.
마수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움직일 때 유용하다고, 한건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것들을 다 아는 거지?’
아무리 예지 능력이 있다지만, 설명이 안 되는 뭔가가 있는데···.
이비현의 지식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
‘유영원 대장님께 자세히 물어보면 알려주실까?’
고민하는 동안 이비현은 성인봉 정상에 이르렀다.
분화구 주변을 둘러봐도, 별다른 흔적은 안 보였다.
그 때였다.
“끼에에엑!”
“!”
이비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위 절벽 쪽에서 들린 울음소리였다.
‘마수다.’
지금이야말로 완전한 은신인 <그림자 맹시> 특성을 쓸 때였다.
그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서 바위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바위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이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절벽 아래 튀어나온 바위에, 유난히 거대한 그리핀 한 마리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독수리 머리에, 육중한 사자의 몸.
늠름한 그리핀은 부리로 날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석양빛에 황금색 부리가 위협적으로 빛났고, 위엄 있는 날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곤란한데···.’
그리핀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수였다.
지능이 높고 흉포한데다,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비현은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기 위해서, 바위 그림자를 타고 절벽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끼에엑!”
“....”
거대한 그리핀이 다시 한 번 울었다.
<그림자 맹시>의 지속 기간은 길어야 5분.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거대한 그리핀이 앉은 바위 옆에는 큰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끼이익”
“끼익- 끽!”
동굴 안에는 작은 그리핀들이 소리높여 울고 있었다.
작다 해도 거의 말만한 크기였다.
바닥에는 농구공만한 알 껍질이 나뒹굴었고, 온갖 새와 산짐승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그리핀 둥지잖아.’
균열 안에서나 볼 수 있을 이계의 풍경이었다.
빨리 가서 한건우에게 알려야 했다.
**
산중턱의 낡은 시골집 안.
한 소녀가 어두운 방 안에 문을 잠그고 앉아있었다.
집안은 몹시 지저분했고, 흐트러진 짐으로 어수선했다.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폐가였다.
행정 기록상에서 그녀, 은설아는 죽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2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걸로 되어있었다.
‘나 때문에 다 죽었어···.’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슬픔보다도 죄책감과 두려움이 더 컸다.
사고 직후, 충격을 받은 은설아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녀는 강릉 시내를 떠돌다가 어린 시절 추억이 있던 섬을 떠올렸다. 친척 할머니가 계시던 울릉도였다.
무작정 항구로 가서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 안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섬.
막상 와보니, 사람 좋던 친척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할머니 댁은 그대로 방치되어 폐가가 되어있었다.
따로 갈 데가 없었다. 그렇게 몰래 눌러앉았다.
아직은 마을 사람들에게 여기 지내는 걸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찬장에 있는 식량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잡혀가는 거야···?’
눈앞이 캄캄하고 무서웠다.
그때 부엌 쪽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잇, 삐 삐이···.”
어린 새가 우는 듯한 소리였다.
“왜 그래?”
은설아는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있었다.
몸집이 커서 방 안에 들어오기는 무리였다.
“삐이이, 삐···.”
“배고파? 이상하다. 아까 밥 줬는데···.”
자세히 보니 배고파하는 게 아니라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은설아는 커다란 친구를 부둥켜 안고 쓰다듬었다.
친구의 상처도 살폈다.
“봐봐. 날개가 아직 휘어있네···. 그래도 많이 나은 것 같다, 그치?”
외톨이가 되어 남겨진, 세상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친구.
마치 자기 자신 같았다.
“따뜻하다···.”
친구의 포근한 몸은 몹시 따스했다.
은설아는 잠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똑. 똑.
그때,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설아의 온몸이 바짝 굳었다.
그녀의 친구도 그녀의 불안에 동화되어, 사납게 깃털을 부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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