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 균열 (3)
몸 길이만 10미터가 넘는 강력한 A급 마수, 블랙 타란튤라.
잠들어 있기를 바랐는데,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블랙 타란튤라가 여덟 개의 다리로 이동하는 곳마다, 밧줄처럼 두꺼운 거미줄이 아래로 늘어졌다.
거미줄의 진동을 느끼고 온 것이 분명했다.
‘위에서 뛰어내리느라, 너무 큰 진동을 만들었어.’
여덟 개의 다리는 뻣뻣한 가시 같은 털로 뒤덮여있었다.
독니 끝이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으··· 으악!”
이비현은 징그러운 것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그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벌레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혐오감 때문일까?
곤충형 마수가 있는 균열은 유난히 공략 확률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한건우는 그 면에서는 편리했다.
비위가 강한 건지, 그의 눈에는 웬만한 마수들이 다 비슷하게 보였다.
이비현의 비명을 듣고, 블랙 타란튤라가 가까이 점프해 와서 거대한 다리를 휘둘렀다.
휘이익-!
털투성이 다리가 이비현의 망토를 거의 스칠 뻔했다.
“쉿.”
한건우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만히만 있으면 못 찾아.”
한건우가 속삭였다.
이곳은 햇빛이 한 줄기도 없는 암흑 균열 안.
맨눈으로는 자기 손바닥도 안 보이는 지독한 어둠이었다.
암흑 균열이 처음 생겼을 때, 이곳을 공략하려는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조명 아이템을 썼다.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온 균열에 있는 곤충형 마수들이, 빛을 보고 몽땅 달려들었으니까.
‘그걸 몰라서, 처음에 정부 구조대가 한 순간에 몰살당했지.’
암흑 균열에서는 빛을 밝히려고 하지 말고, 특성이나 아이템으로 시력 자체를 올려야 했다.
한건우는 <화식조의 눈>으로 블랙 타란튤라가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16개의 겹눈은 무시무시하지만, 블랙 타란튤라는 사실은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타란튤라의 겹눈은 움직이는 물체에만 반응했다.
이곳에 사는 마물들은 다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었다.
시력은 퇴화했고, 감각으로 먹이를 찾았다.
마치 심해어들 같다고 할까?
그 중에서도 블랙 타란툴라는, 거미줄을 타고 느껴지는 진동과 피 냄새로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았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은신의 룬>으로 피 냄새를 감추었으니, 거미줄 위에서 섣불리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거미를 보고 하얗게 질려있던 이비현이 곧 안정을 찾았다.
블랙 타란튤라의 약점을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바보는 아니군.’
그때 블랙 타란튤라가 흉측한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다.
키이이이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또였다.
지난 번처럼, 마수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군.’
마수의 말이 들린다니.
이런 현상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이유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건우는 아주 조심스럽게, 옆 거미줄에 창끝을 갖다댔다.
톡-.
쉬이이익!
[먹이다!]
“!”
거미줄에 바짝 엎드려 피하지 않았으면, 독니에 목이 잘릴 뻔했다.
“....”
블랙 타란튤라는 덩치에 비해 상당히 민감했다.
이미 한 번 감지된 이상,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이 숨을 죽였다.
타란튤라의 보랏빛 독니가 그들의 머리 바로 위에서 꺼떡 꺼떡 흔들렸다.
치이익.
[어디 있지?]
이비현이 타란튤라의 턱밑에서 시미터를 들이대려는 것을, 한건우가 제지했다.
‘안 돼.’
아래에서 공격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타란튤라의 독 섞인 체액을 뒤집어쓰기 십상이었다.
설령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문제였다.
아직은 타란튤라가 필요했다. 살려두어야 했다.
한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매우 간단한 해결책을 떠올렸다.
‘꽉 잡고 있어.’
한건우가 이비현에게 눈짓을 보냈다.
거미줄이 갑자기 흔들려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이비현이 거미줄을 단단히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건우는 마력을 집중했다.
[특성 발동 : 염동력]
거미줄의 반대편 끝에 걸린 곤충형 마물의 허물이 조금씩 움직였다.
툭- 툭.
아직 염동력이 익숙하지 않아서 세심하게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동을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거미줄에서 진동을 감지한 블랙 타란튤라가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마물이 파드득거리는 것처럼, 한건우는 빈 허물을 거칠게 움직였다.
파득! 파드득!
투두두두두두두-.
블랙 타란튤라가 엄청난 속도로 거미줄을 타고 움직였다.
거미줄 전체가 파도치듯이 출렁였다.
도망갈 기회였다.
“지금이야.”
한건우가 건너편 암벽 동굴을 가리켰다.
한건우는 출렁거리는 거미줄에서 두어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지만, 이비현은 몸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그녀는 허공을 날듯이 가볍게 거미줄 위를 뛰었다.
타악!
이비현이 먼저 암벽 동굴 위에 안착했다.
숨을 고른 그녀가 한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공격을 못하게 했죠? 아래에서 찌르면 죽일 수 있었어요.”
한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설명하기는 피곤했다.
지금은 블랙 타란튤라를 살려 놔야 하니까 그랬다고 하면, 말이 길어진다.
“여기서는 반문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따라줘.”
“....”
이비현은 대답 없이 나이트 비전 고글을 고쳐 썼다.
구불구불한 동굴 길을 따라 걷는데, 아까와 달리 아무런 마수도 나오지 않았다.
곤충형 마물들의 날갯짓 소리나 울음소리도 뚝 끊겼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이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마물이 안 보일까요?”
“이쪽이 타란튤라 집이거든.”
“...네? 그럼 언제 다시 올지 모르잖아요.”
황당해진 이비현이, 드디어 미쳤냐는 표정으로 한건우를 쏘아보았다.
“그렇지. 그러니 서둘러야지.”
“대체 거미 집에는 왜···.”
이비현은 끔찍하게 징그러운 왕거미를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너희 전임 대장 말이야, 아마 이쪽에 있을 거다.”
“....”
이비현의 표정이 다시 돌처럼 굳었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얼굴에서, 그녀가 숨기고 있는 감정이 드러났다.
부끄러움, 그리고 죄책감.
이비현은 전임 대장을 놔두고 혼자서만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몹시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하던 대장이었으니까.
‘그래서 성격이 어두워진 건가?’
회귀 전 이비현은, 어둡다 못해 흑화 그 자체였다.
<그림자 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인까지도 잔인하게 암살하던 그녀.
‘그렇게는 안 되게 해야지.’
동굴을 따라가니 넓은 방 같은 큰 공간이 나왔다.
높은 동굴 천장에서 종유석이 늘어져 있었다.
가운데는 거미줄로 빚은 흰 둥지 같은 것이 보였다.
둥지 안에는, 솜브라의 전임 대장이 목숨을 걸고 가지려 했던 것이 있었다.
“이건? 보석··· 인가요?”
이비현이 둥지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타조알보다 조금 더 큰 타원형의 물체였다.
보석이라기엔 너무나 컸다.
한건우가 솔직히 대답했다.
“마수의 알이야.”
“알···?”
자세히 보니 반투명한 껍질 안에서 뭔가 올챙이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이비현이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 안에 거미 새끼가 있다는 거죠?”
“아니, 아직 몰라.”
마수의 알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했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한 가지였다.
알에 무슨 기운을 넣냐에 따라서, 다른 새끼가 나온다는 것.
‘이 정도의 크기면, 최소 A급 이상이다.’
이런 지식은 부대 연구자료를 보고 알게 된 것이었다.
회귀 전, SSS는 국내 플레이어가 마수를 길들이거나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수와 플레이어가 결합할 때, 지나친 힘을 얻게 되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발견되는 마수의 알도 모두 연구용으로 쓰거나 파괴했다.
한건우도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솜브라의 전임 대장도 이걸 노리고 여기 들어왔겠지만, 이제 이것은 한건우의 것이었다.
한건우가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두근.
알에 손을 얹자, 한건우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뭐지?’
그의 몸 속에 있는 뇌룡의 심장 조각이 반응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때 이비현이 말없이 한건우의 팔을 잡았다.
“응?”
심상치않은 기색에, 한건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블랙 타란튤라가 입구에 와 있었다.
한건우는 알을 놓고, 이비현에게 눈짓을 하며 <그림자 맹시>를 써서 종유석 뒤로 몸을 피했다.
“!”
이비현은 당황한 와중에도 똑같이 그림자 맹시를 사용했다.
이비현은 타란튤라가 나타난 것보다도, 한건우가 자기의 특성을 쓴 것에 더 놀랐다.
‘대체 뭐야···?!’
그러나 그런 걸 따질 틈이 없었다.
블랙 타란튤라는 그들을 따라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둥지로 가까이 다가와서 알을 겹눈으로 살피더니, 동굴 구석으로 가서 뭔가 큰 덩어리를 물고 왔다.
블랙 타란튤라가 물고 온 것은, 마치 미이라처럼 보였다.
거미줄로 돌돌 말려있는 사람만한 형체였다.
한건우와 이비현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치이익, 치익.
블랙 타란튤라가 독니로 천천히 거미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거미줄로 감싸여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애벌레 형태의 마물이었다.
크기는 성인 남자만했다.
형체는 온전했지만, 죽은 지 오래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푸욱!
블랙 타란튤라가 애벌레의 목 부분에 독니를 살짝 박고, 액체를 주입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은 것 같았던 애벌레가 움직였다.
뒤집힌 채로 배를 꿈틀거리며, 짧은 촉수를 버둥거렸다.
“욱.”
이비현은 구역질을 할 뻔했다.
블랙 타란튤라는 다행히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애벌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애벌레가 몸을 뒤집고 도망가려 할 때, 블랙 타란튤라는 가차없이 억센 턱으로 애벌레를 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어치웠다.
이비현은 도저히 그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그때 한건우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지금 빨리, 저 중에서 전임 대장을 찾아.”
한건우가 가리킨 곳은, 미이라 같은 형태가 수십 개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 말은, 전임 대장도 저 애벌레 같은 상태로 있다는 거였다.
“...네?”
이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한건우가 답답해하며 다그쳤다.
“난 너희 대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잖아. 지금 빨리 찾아서 저놈한테 줘야 해.”
“....”
이비현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한건우의 기상천외한 계획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녀는 다시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고, 한건우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