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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균열 (1)
블랙 마켓의 구석, 주문이 들어오면 뭐든지 거래하는 잡화상.
재고를 정리하던 잡화상 상인이 자기도 모르게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임 사장. 좋은 일 있나 봐?”
옆 가게, 물약집 상인이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렸다.
“좋은 일은 무슨. 대출에 상납금에···. 그저 힘들어도 웃고 사는 거지.”
잡화상 상인은 시치미를 뗐다.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똑같이 죽는 소리를 하는 것.
그것이 시장 상인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옆 가게 상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어제 보니까 큰 주문 있더만? 마정석도 팔고, 솔스톤인지 주문 넣는 것 같더라?”
‘여우 같은 놈. 다 들어놓고.’
잡화상 상인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옆 가게 상인이 이쪽으로 넘어와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제 온 손님, 한건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손님, 갓 스물이나 먹은 것 같던데. 처음에 흥정할 때는 노련한 줄 알았더니 순 어린애야. 안 그래?”
“그랬나. 얼굴은 잘 못 봤네.”
잡화상 상인은 슬쩍 말을 피하려 했다.
손님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떠들다 보면 큰 코 다치기 마련이었다.
“쓰잘 데 없는 솔스톤을 500만원어치나 주문한 걸 보면 뻔하지. 그 정도면 우리 마켓에 있는 솔스톤은 거의 싹쓸이하겠는데?”
“쓸 데가 없긴.”
물론 잡화상 상인도 속으로는 동감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판 물건을 욕하는 것 역시 금물이었다.
“자네 아까부터 능청을 떠네? 다른 가게에서 수수료까지 받아서 물량 떼왔다면서···. 횡재했구만.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주문했대?”
“그건 못 들었어.”
잡화상 상인도 궁금하던 터였다.
“내 생각엔 그 플레이어, 누구한테 낚여도 단단히 낚인 것 같아.”
“낚이다니?”
“요즘 신참 플레이어들, 플레이어 게시판에서 떠드는 소리 잘 믿잖아. 누가 장난으로 정보인 척 올린 글에 낚인 것 아닐까?”
옆 가게 상인이 그렇게 의심할 정도로, 솔스톤은 쓸모 없는 아이템이었다.
잡화상 상인은 한건우의 인상을 떠올렸다.
그리 어수룩하거나 호락호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뭐, 모를 일이긴 했다.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사람들이 더 크게 속는 법이니까.
“난 모르겠네. 손님은 원하는 물건을 주문한 거고, 나야 주문대로 팔면 그만인 걸.”
잡화상 상인은 어물쩍 말을 돌렸다.
그때 옆 가게 상인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꽁무니를 뺐다.
“엇, 나는 이만 볼 일이 있어서.”
“왜 갑자기··· 앗 손님, 오셨습니까.”
한건우가 어느새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회색 망토를 깊이 덮어쓴 정체모를 사람과 함께였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잡화상 상인은 당황해서 식은땀이 나려고 했다.
“아이고, 손님.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됐습니다. 주문한 물건을 주시죠.”
잡화상 상인이 허둥지둥 창고로 들어갔다.
500만원어치 솔스톤이 가득 든 상자는 그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상인은 솔스톤 상자를 바퀴 달린 카트에 올려서 낑낑대며 밀고 나왔다.
“주문하신 500만원어치 솔스톤입니다.”
하도 값싼 아이템이라, 잡화상에서 갖고 있던 물량으로는 모자랐다.
블랙마켓의 연줄 있는 상인들에게 수수료를 받고, 물량을 받아와서 500만원어치를 채웠다.
한건우는 높이 쌓인 상자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원래는 옮겨서 가져가려고 했지만, 아까의 대화를 들었더니 생각이 달라졌다.
‘보기보다 믿을 만한 상인이군.’
한건우는 잡화상 상인을 꽤 괜찮게 평가했다.
우선 하루만에 주문량을 전부 확보할 만큼 수완이 좋다.
뒤에서 손님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걸 볼 때, 나름대로 지킬 건 지키는 상인 같았다.
‘장기적으로 거래를 해도 괜찮겠어.’
판단을 마친 한건우가 물었다.
“여기, 아이템 위탁 판매도 합니까?”
“예? 물론이죠.”
잡화상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마켓의 상인들은 대부분 위탁 판매도 겸하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아이템을 상인에게 맡겨놓고, 거래가 성사되면 수수료를 떼는 식이었다.
아이템이 오랫동안 팔리지 않으면, 플레이어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대신 맡긴 사람에게 보관료를 받으니, 상인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다.
“솔스톤은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위탁 판매용으로 맡겨놓겠습니다.”
“저, 손님. 위탁 판매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안 팔려도 보관료를 떼요.”
잡화상 상인이 조심스럽게 말리려 했다.
몇 년간 아무도 찾은 적 없는 솔스톤을 위탁 판매한다니···.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건지 몰라도, 한참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양심이 찔려서 말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손님과의 거래를 빨리 끝내고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상관 없으니까 맡겨주세요. 이것만 직접 가져가죠.”
상인이 능숙하게 위탁판매 계약서 스크롤을 써내려갔다.
계약서 스크롤에는 마력이 담겨있어, 계약을 어기면 디버프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계약서의 등급에 따라 디버프는 천차만별.
이번에 쓴 것은 마켓에서 흔히 쓰는 간이 스크롤이었다.
한건우는 주먹만한 솔스톤 10개를 집어들고, 아공간 무기집에 넣었다.
“예, 조심히 가십쇼.”
한건우를 배웅하고 나서, 잡화상 상인은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 뭐.’
왠지 이 손님만 상대하고 나면 기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
한건우와 이비현은 블랙마켓의 불법 포털 안에 서 있었다.
포털이란 일종의 인공 균열로, 이세계 대신 두 개의 떨어진 장소를 잇는 장치였다.
둘 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포털을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플레이어 등록증을 내고 인적사항을 밝혀야 하는데, 이비현은 미등록자였고, 한건우도 아직 등록하지 않은 자연각성자니까.
이비현은 한건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이 자, 대체 진짜 정체가 뭐지.’
한건우는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지금까지도 놀라웠지만, 왠지 앞으로도 놀랄 만한 모습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방금도 그랬다.
포털로 바로 안 가고 시장 쪽으로 가기에, 당연히 레이드에 쓸 아이템을 준비하려는 줄 알았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솔스톤을 엄청나게 사들이다니?’
상인이 말리는데도 강행하는 그의 모습은 괴짜 그 자체였다.
‘이 자라면 뭔가 생각이 있겠지.’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전임 대장을 못 구해낸다면···.
무기를 회수하는 건 물론이고 감히 솜브라의 수장을 속인 괘씸죄까지 물을 생각이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무기를 정비하는 그녀에게 한건우가 물었다.
“이비현. 다른 부하들 없이도 정말 괜찮겠어?”
이비현도 원래 균열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쩔 수 없어요, 이번에는.”
“혼자라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가?”
이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현 말고 다른 부하들은, 그 지옥 같은 암흑 균열에서 빠져나올 능력이 없었다.
<그림자 맹시> 특성이 없었다면, 이비현도 거기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건우는 애써 구할 필요가 없으니, 수틀리면 남겨두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우우우웅-
포털이 동작하면서, 발이 붕 뜨는 듯하고 멀미보다 더한 어지러움이 닥쳐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서울 바깥, 빈민촌이 된 위성도시였다.
“여기군, 전임 대장이 실종된 곳이.”
“...함께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했죠.”
한건우와 이비현은 ‘피라미드’ 앞에 서 있었다.
피라미드란, 공략에 실패해서 열려버린 균열을 막는 마지막 장벽이었다.
미공략 균열을 피라미드 모양의 마석 건축물로 덮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피라미드가 지금 전국에 수십 개나 있었다.
물론 완전한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미공략 균열을 피라미드로 완전히 막을 수 있다면, 플레이어는 필요가 없을 테니까.
안쪽에서 계속 공격이 가해지니, 피라미드는 시시때때로 부서졌다.
그러면 그 틈새로 마물들이 쏟아져나와 민가를 공격했다.
정부 플레이어가 출동해서 마물들을 막고, 그 동안 하급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공사팀이 간신히 유지보수를 하는 식이었다.
한건우도 회귀 전, 그런 출동을 나가기도 했다.
피라미드의 보수에는 막대한 양의 마석이 들어갈뿐더러, 인명피해도 심각했다.
게다가 피라미드 근처에는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으니, 이곳처럼 빈민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미공략 균열은 국가에 재앙과도 같았다.
이곳은 그 중에서도 ‘암흑 균열’.
‘아직은 암흑 균열의 파훼법을 아무도 모르는 때지.’
암흑 균열의 파훼법은 SSS도 몇 년 후에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미공략 균열을 하나하나 파괴해 나가면서, 범접 불가한 독보적인 조직이 되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한건우는 암흑 균열을 덮은 피라미드를 응시했다.
피라미드에는 출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한건우는 피라미드의 둘레를 돌면서, 때때로 벽을 두드려서 소리를 들었다.
유독 소리가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공사했던 부분이 약하지.’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들어 단단히 쥐었다.
창끝을 벽에 대어 힘을 주고, 피라미드의 표면을 갈랐다.
끼기기기기긱-!
신화급 무구의 위력으로, 검은 블레이드에 흰 벽이 두부조각처럼 갈라졌다.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피라미드에 들어가려 하다니, 이비현은 깜짝 놀랐다.
“헉···!”
“지금이야. 보호막.”
“아!”
틈이 생기면 마물이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다.
이비현은 피라미드 벽에 임시 보호막을 만드는 아이템을 붙였다.
별다른 충격이 없다면 두어 시간쯤은 버틸 것이다. 그 전에 나올 수 있으면 다행인데···.
“잘 했어. 그 다음.”
이비현은 미리 준비한 대로, 한건우와 자신에게 은신의 룬을 걸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마치 그의 부하가 된 것처럼 명령을 따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이러지?’
한건우는 마치 오랫동안 한 조직의 리더를 맡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명령하는 모습이 숨쉬듯 자연스러웠고,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비현이 세상에서 자기 윗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전임 대장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초짜 플레이어에게서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걸까,
이비현은 엄청난 혼란을 느끼면서, 한건우를 따라서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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