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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마켓
자정이 넘은 시간.
동묘 구제시장, 진웅상사 옆 남자화장실.
항상 고장 표시가 붙어있는 낡은 문이 있었다.
억지로 열고 들어가니, 변기 대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후드를 눌러쓴 한건우는 어두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 아래에는 플레이어를 위한 지하 암시장, 일명 ‘블랙마켓’이 있었다.
충분한 돈만 가져오면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안전기준을 넘어선 개조 무기,
위험한 스탯강화 물약,
금지된 애완용 마수까지···.
균열에서 빼돌린 마정석이나 아이템을 밀거래하는 건 기본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좌판에는 아무도 안 살 것 같은 허름한 옷가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말이지.’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치고 순진한 사람이 있을까?
조명은 어두웠고, 좌판을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이 위협적인 눈초리로 흘깃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눅이 들었을 분위기였다.
한건우도 블랙마켓에 진짜 손님으로 오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과거 임무수행을 위해 숨어든 것만 여러 번이라, 그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손님이 적은 구석으로 갔다.
중심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거래 조건이 좋아지니까.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상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마정석 받습니까?”
“몇 등급짜리요?”
한건우는 손가락을 다섯 개 폈다. E급 마정석이라는 뜻이었다.
“640.”
“됐습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한건우를, 상인이 붙잡았다.
“650까지 돼요.”
“많이 파십쇼.”
“...655. 이건 내가 손핸데.”
“누굴 호구로 압니까. 공식 시세는 맞춰주셔야지.”
한건우는 당당하게 나갔다.
마정석 밀거래는 어느 한 쪽이 갑과 을이 되는 거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인 쪽에서도 기록에 없는 마정석이 필요했다.
“흐음···.”
“오늘 센터 공식가는 E급이 680이던데요.”
미리 각성센터의 공식 매입시세를 확인하고 오는 건 기본이었다.
“센터 못 가니까 여기서 팔러 온 것 아뇨?”
상인이 반격을 시도했다.
블랙마켓에 오는 손님들은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소속 길드 몰래 아이템을 빼돌려서 팔려는 경우가 제일 흔했고, 지명수배된 플레이어나 미등록자까지 있었다.
한건우는 준비한 대로 협상을 걸었다.
“마정석에 은빛늑대 털가죽 하나 얹어서, 800.”
“은빛늑대?”
상인은 잠시 고민했다.
둘을 합하면 센터 공식가와 거의 비슷한 금액이었다.
오랜 암시장 생활로 눈치가 보통이 아닌 상인은, 한건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이는 어린데, 이상하게도 무시할 수 없는 관록이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가격을 더 후려쳐야 하는데, 한건우는 그다지 궁해 보이지도 않았다.
제안을 안 받아주면 미련없이 돌아서 가버릴 것 같았다.
은빛늑대 털가죽은 갑옷 장식용으로 제법 인기있는 아이템이었다. 가게에 구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상인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좋수다.”
거래가 성사되었다.
금방 한건우의 수중에 현금으로 800만원이 들어왔다.
‘돈 벌기가 참 쉽구나.’
E급 던전인데다, 던전 공략에 걸린 시간은 단 10분.
공략법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즉, 10분만에 간단히 800만원을 벌었다.
만일 던전에 있던 은빛늑대 8마리를 다 잡고, 거기 있는 다른 마수들까지 추가로 해치웠다면, 한 방에 수천만원을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건우도 장기적으로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사장님. 아이템 주문도 됩니까?”
“예, 물론이죠.”
상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매입보다는 판매를 좋아하는 게 당연했다.
“솔스톤, 있는 대로 다 주세요.”
“솔스톤을요?”
상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매장 몫의 재고까지 다 가져와주세요.”
“손님, 사신다니 저야 좋긴 한데···. 뭐에 쓰시게요?”
상인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솔스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광물 아이템이었다.
은은한 빛이 나기는 했지만, 야광주처럼 밝은 빛으로 어둠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탯을 올려주거나 스킬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왜 아이템인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500만원어치요. 내일 찾으러 오겠습니다.”
“...옙!”
상인은 돈 앞에서 호기심을 억눌렀다.
솔스톤은 하도 안 팔려서 보관비용이 더 나올 지경.
솔스톤을 들여놓은 가게마다 악성 재고를 끌어안고 끙끙 앓는 판국이었다.
500만원이면 도깨비시장에 있는 솔스톤 재고를 다 가져올 수도 있었다.
‘돌 수집이 취미인가보지.’
상인은 피어나는 웃음을 감추고 장부에 주문을 기록했다.
‘이게 웬 떡이냐. 재고도 많은데, 한 개도 안 남기고 싸그리 다 밀어내 버려야지.’
상인은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후 땅을 치고 후회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오빠, 어디서 돈이 이렇게 났어? 여기 되게 비싼 데 아니야?”
지윤은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주눅이 들었는지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한건우는 여동생의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회귀 전에도, 딱히 호강시켜 준 적은 없었네.’
군 소속 플레이어도 급여는 괜찮았지만, 노후 대비도 걱정되고 미래가 불안해서 저축을 많이 했다.
그렇게 모아놓은 저축은 지윤의 치료비로 다 날렸다.
이후에 특수전단으로 옮겨서는 고액 연봉을 받았고, 치료실도 무료로 지원받았지만, 사치를 할 수는 없었다.
언제 은퇴하거나 방출될지 몰랐다. 차라리 순직이라도 하면 여동생에게 연금이 나오겠지만, 그냥 쫓겨난다면?
앞날이 무서웠다. 그래서 늘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지윤과 근사한 외식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걱정 말고 맛있게 먹어. 앞으로 이런 데 자주 오자.”
“우와, 진짜?”
지윤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눈이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천명환이 뇌룡의 심장 조각을 자기 몸에 쑤셔박았을 때의 고통이 생생했다.
그리고 지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고 말했다.
“....”
한건우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지윤은 어린 나이에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견디면서 힘들게 살다 죽은 것이다.
새삼 지윤이 더욱 안쓰러웠고, 천명환을 한번 더 쳐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가장 먼저, 그런 흉계에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게 급선무였다.
포크를 들고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는 지윤을 보면서, 특성을 발동했다.
[특성 발동 : 신성한 보호]
- 자신 외의 지정한 대상에게 패시브 보호막을 건다.
- 물리적, 정신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공격이 있을 경우 즉시 알려줌
‘암흑의 성기사’라 불리던 플레이어의 특성으로, 한 번 발동하면 계속되는 패시브 특성이었다.
모든 보호 특성 중에서 가장 강했지만,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자신에게는 걸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암흑의 성기사는 이 보호막을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걸고 있었다.
‘주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죽었는데도, 개는 털끝 하나 안 다쳤었지.’
특성이란 건 플레이어의 스탯에 의해 그 위력이 달라질 수 있다.
‘신성한 보호’ 특성은 오직 마력만 사용하는 특성이다.
1차 개화 상태지만, 한건우의 막대한 마력 덕분에 강력한 특성이 되었다.
공중에서 아주 희미한 금빛 빛무리가 휘날리더니, 음식을 먹고 있는 지윤에게 덧씌워졌다.
“어?”
약간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지윤이 밥을 먹다 말고 움찔했다.
“왜, 맛이 별로야?”
한건우는 얼굴빛도 안 바꾸고 아무것도 모른 체했다.
“아냐! 너무너무 맛있어.”
보호막을 씌운 사실은 지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혹시나 보호막을 믿고 만용을 부리거나, 안전에 소홀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한건우는 무척 든든했다.
한건우의 마력이 다할 때까지, 이 특성은 지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었다.
여동생의 안전 문제가 해결되자, 한건우의 사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자, 그럼 누가 먼저 접근하려나?’
지금 예상하는 자는 2명이었다.
식당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는 도중, 한건우는 본능적으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력이 엄청나게 강해졌기에, 기척을 느끼는 감각이 한계 이상으로 예민해졌다.
한건우는 때를 놓치지 않고 특성을 발동했다.
마력만으로 쓸 수 있는 몇 안되는 특성 중 하나였다.
[특성 발동 : 화식조의 눈]
한건우의 홍채가 순간 오렌지색으로 빛났고, 동공이 깊어졌다.
시력이 가장 뛰어난 마수, 화식조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석양에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동생의 그림자보다 조금 짙고 무겁게 느껴졌다.
‘이건?’
촉이 왔다.
집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윤아.”
“왜 오빠?”
“집에 먼저 들어갈래? 난 어디 좀 갔다 들어갈게.”
“알았어. 갔다 와.”
아무것도 모르는 지윤은 손을 흔들며 원룸 계단으로 올라갔다.
한건우는 한 블록을 지나서, 휑한 폐공사장으로 들어갔다.
근처에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
“....”
“우리 얘기 좀 할까?”
한건우의 그림자에서 인간의 형상이 서서히 일어났다.
“...나를 어떻게 알아봤지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암회색 망토 후드 사이로,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붉은 머리에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의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못 알아볼 이유가 있어?”
한건우가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비현. 한건우는 회귀 전의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말끝이 짧군요.”
이비현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음습하게 숨어서 따라온 사람에게 존대할 이유는 없지.”
이비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어떻게 눈치챘죠. 스킬? 아니면 고유 특성?”
“나중에 알려주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
자신의 이렇게 말을 끊은 사람은 처음인지, 이비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나에게 볼 일이 있어서 온 거 아냐?”
“그래요.”
그녀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수틀리면 해치워버릴 생각이라, 오히려 너그러워진 모양이었다.
“용건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것 봐라?
한건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갈 만한 사람인지 보라고 하시길래.”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솜브라>라는 미등록자 조직이었다.
이때까지 솜브라는 큰 세력을 이루지 못했고, 변방의 작은 암살자 길드에 불과했다.
그들은 반정부 세력 중 하나로, 특히 정부의 각성자 관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와중에, 자연각성자 한건우가 요란하게 등장한 것이다.
강한 자연각성자라니.
솜브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조건 제시해.”
“뭐라고요?”
“들어보고 결정하게.”
이런 반응은 처음인지, 이비현은 잠깐 굳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한건우 씨.”
이비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진지했다.
“하나의 각성자 조직이, 우리나라 전체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어요.”
“....”
설마 특수안보부, SSS 이야기인가?
이때부터 솜브라가 SSS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건우는 삐딱하게 섰던 자세를 고치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음모론처럼 들리겠지만-.”
“아니.”
한건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특수안보부 말이지?”
“!”
이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희가 특수안보부를 상대할 급이 되나?”
“그··· 당신이... 그런 걸 어떻게 알지요?”
이비현의 손이 슬쩍 아공간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무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한건우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미숙한 모습이 정말로 우습기도 했다.
“네 정도 급과는 말을 못 하지. 너희 리더에게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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