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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먹는 플레이어-1화 (1/238)

특성 먹는 플레이어 ⓒ김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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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판을 흔들 수 없다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장기판이라면, 개인은 일개 졸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능력이 뛰어나면 더 우수한 장기말이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본질은 똑같다.

'개인은 판을 흔들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군 소속, A급 플레이어, 한건우.

보통 A급들은 떡잎부터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는 '노답 흙수저', '사실상 등급 외'라고 불리는 F급부터 시작했다.

희귀한 특성? 특별한 권능?

그런 건 없었다.

개나 소나 한다는 권사 클래스로 시작해서, 흔한 <버서커> 특성으로 개화했다.

등급이 올라가도 기본스탯 연마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전투력을 갈고닦아 여기까지 왔다.

누구보다 혹독하게 훈련했고, 주어진 임무에서 최고의 성과를 냈다.

그 결과,

'이능력특수전단의 전설.'

'플레이어 잡는 플레이어.'

'임무 성공률 100%.'

한건우를 따라다니는 별명이었다.

'영혼 없는 정부의 사냥개.'

'미등록 플레이어의 저승사자.'

저주와 질시의 시선이 따라다녔지만, 개의치 않았다.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명령에 따라 효율적으로 전투만 수행해왔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고 위험천만한 임무가 떨어져도, 그게 정부에서 내린 최선의 선택일 거라고,

한건우는 그렇게 믿었다.

특수전단에서 은퇴하자마자, 정부에 의해 폐기처분을 당하기 전까지는.

*

"...천 팀장."

한건우는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천명환을 바라보았다.

국내 각성자 랭킹 32위, A급 천명환.

그는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의 콧대 높은 엘리트였다. 균열 안에서도 칼각을 낸 정복을 빼입고, 번쩍거리는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명환은 거칠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말끔하던 제복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방금까지 벌어진 치열한 사투의 흔적이었다.

한건우는 혼자서 다섯 명의 상위 클래스를 상대했다. 거의 이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건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함정에 한번 발을 디딘 이상, 패배는 예고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협조 부탁합니다, 대장님. 얌전히 가시면 서로 좋잖아요?"

그렇게 말한 천명환은 자신의 더러워진 제복을 툭툭 털었다.

주변에는 그의 부하들이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지만, 거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천하의 한건우도 이렇게 되니 별 수 없군요."

천명환은 이 상황이 즐거워 보였다.

그는 우월의식이 심했다.

각성자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플레이어들을 근본 없다며 은근히 무시했다.

한건우는 F급 출신인데도 자기와 거의 대등한 능력을 가졌으니, 그에게 항상 눈엣가시였다.

한건우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자, 천명환은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한건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건우가 낮게 침음했다.

그는 검은색 아다만티움 사슬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었다.

소재앙급 마수가 등장했을 때나 사용하는 최상급의 아티팩트였다.

팔다리는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패시브 스킬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창에 찔린 복부에서는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방심했군.'

한적한 마을 근처에 작은 E급 균열이 생겼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방관하면서 정부 구조대나 용병이 출동하길 기다렸다.

은퇴한 마당에 자율 방범대 노릇을 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구조대에 출동 인원이 없다고 했다.

쉽게 막을 수 있을 균열이 점점 커졌다.

곧 마수가 마을로 튀어나오기 직전이고, 방관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상황.

E급 균열의 마수 정도면, 한건우에게는 연습 거리도 안 되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무시하고, 혼자서 뛰어든 균열 속.

알고 보니 이 균열 자체가 한건우라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잡기 위해서 치밀하게 만들어진 트랩이었다.

인공 균열, 한건우의 버서커 특성을 막는 저감장치, 아다만티움 사슬로 만든 덫까지.

이 안에서는 제아무리 한건우라도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비공식 작전에 이 정도의 물량공세를 할 수 있는 기관은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 기관의 얼굴마담인 천명환이 나타났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특수안보부에서 직접 칼을 빼들었군.'

특수안보부, 일명 SSS(Special Security Service).

현 정부의 헤드들이 모인 최고위 통치집단으로, 전부 엘리트 출신 최상급 플레이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의회도, 대통령도 이들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한건우가 이끄는 부대는 국군 내부에서는 특수안보부 직속부대 취급을 받았다.

그건 가장 위험하고 핵심적인 임무에 주로 투입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 하나를 잡기 위해, 너무 많이 온 것 아닌가."

한건우가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

천명환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기척을 숨기는 데 성공한 줄 알았겠지.

1선 요원들은 천명환만 빼고 전멸했지만, 2선에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의 팽팽한 기척이 느껴졌다.

균열 바깥에는 3선 요원들도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기운이었다.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특수안보부 요원들이 이렇게 많이 오다니.

SSS의 평소 작전 스타일대로 신중했다.

쉽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한 번 작전을 하면 성공률은 100%.

최상의 인력과 물량공세를 퍼부어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작전을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자신이 이끌던 이능력특수전단이 출동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함께 고생하던 부하들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처럼 씁쓸한 일이 있을까.

'가는 길에 기분이 더러울 뻔했어.'

쿨럭, 한건우는 검은 피 덩어리를 토했다.

슬슬 피곤해졌다.

일개 퇴역군인을 죽이는 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핏기가 빠져나간 한건우의 얼굴에 피로한 웃음이 번졌다.

'나를 잘못 봤군.'

SSS에서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알겠는데, 오버였다.

자신은 정부가 애써서 제거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만사가 귀찮아진 한건우는 정부에 해를 끼치려는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정부 소속 플레이어는 고연봉을 주는 민간 용병업체로 옮기거나, 외국 기관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한건우는 더이상 전투로 먹고 살 생각이 없었다.

이미 막대한 위약금이 걸린 전직금지 계약서에 서명했고, 그 대신 상당한 퇴직금과 연금을 받기로 했다.

은퇴 직전의 한건우는 다 타버린 양초처럼 소진되었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혹시 극비 정보를 몰래 외국의 군사기관이나 민간업체에 팔아넘길까봐, 그게 걱정되었나?

한건우는 돈 욕심이 없었고, 더이상 돈 들어갈 데도 없었다. 그건 누구보다 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미등록자들 편에 설 것도 아닌데....

“쿨럭, 쿨럭.”

한건우는 전에 없던 오한을 느꼈다.

몸에서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이대로 끝인가.’

이제까지 그가 죽였던 수많은 자들이 스쳐지나갔다. 반정부 플레이어, 미등록자들···.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처음으로 감상에 잠겼다.

‘나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걸 위안 삼아주길.’

돌아보니 은퇴생활을 얼마 못 누린 게 한이었다.

조용한 시골에 내려와서, 난생 처음으로 평화라는 걸 느껴보려 했는데, '정부의 사냥개'에게는 사치였나 보다.

지친 한건우는 허탈하게 물었다.

"천 팀장. 이것도 정부가 내린 최선의 판단인건가?"

“재밌네요. 죽기 전에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천명환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없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부의 판단>이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행해온 자신이, 이제는 그 판단의 희생자가 된다니.

우습기도 하고, 어쩐지 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건우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동생분과 달리, 말이 통하시네요.”

그런데 천명환의 비웃음이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뭐?”

말 한 마디 허투로 하지 않는 천명환이었다.

그 의미심장한 말은, 마치 동생의 죽음에 SSS가 개입해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푸슈욱-.

"윽."

천명환이 한건우의 몸통을 관통한 창을 뽑아 거두었다.

꿀럭, 꿀럭. 새빨간 선혈이 폭포처럼 솟구치면서 의식이 차차 흐려졌다. 삐- 하는 이명도 들렸다.

"최선의 판단이냐고요?"

천명환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SSS의 판단은 항상 최선이죠.”

천명환의 손바닥 위 허공에서 투명한 마정석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언뜻 평범한 마정석 원석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원석 안에 흰 전류 같은 빛무리가 꿈틀거렸다.

"맞아요. 뇌룡의 심장 조각입니다."

"!"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의 균열에서는 출현한 적이 없는 재앙급 마수.

뇌전을 자유롭게 다루고, 일곱 개의 날개를 펼치면 시간의 틈새를 날 수 있다고 알려진 신비로운 마수였다.

뇌룡의 심장은 전류가 흐르는 마정석으로 되어있었다.

희귀하긴 했지만, 별 효능도, 특성도 없어서 희귀 마정석 컬렉터들이 수집하는 돌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한건우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진짜 용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죠. 이걸 인간의 몸 속에 집어넣으면···."

천명환이 손가락을 튕기자, 뇌룡의 심장 조각이 한건우의 얼굴 쪽으로 날아왔다.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하죠. 그 과정에서 막대한 고통을 주고요."

뇌룡의 심장 조각은 한건우를 놀리듯이 허공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

"동생분처럼 약한 사람은 이걸 넣고도 꽤 오래 버티지만, 강하면 얼마 못 버팁니다. 오히려 강할수록 더 빨리 죽으니 재밌죠."

"그...건 무슨."

한건우는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동생이 이유없이 아팠던 게, 죽음에 이르렀던 게 저것 때문이라고?

거기에 천명환이 관계되어 있다면···.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SSS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다.

유용한 장기말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동안 <정부>에 협조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필요가 없어지자, 쓰레기 처리하듯 버려지는 것이다.

뇌룡의 심장 조각이 곧 창에 찔린 상처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상처 속을 파고들어서, 핏줄을 타고 서서히 움직였다.

“크헉!”

한건우는 엄청난 통증에 몸부림쳤다.

"동생분은 시시했지만, 대장님을 거치면 최상급 마정석으로 연마될지도 모르잖습니까? 기대가 큽니다."

천명환이 하는 어이없는 말에, 한건우는 고통을 압도하는 분노를 느꼈다.

이제까지 목숨을 걸며 고생한 세월이, 동생이 겪은 고통이, 고작 이런 비열한 농간이었다고?

"으아아-!"

드르르륵-

놀랍게도, 한건우를 단단히 묶고 있던 아다만티움의 사슬이 움직였다. 사슬 틈새에서 황금빛 불꽃이 튀었다.

당황한 천명환이 급히 피하려 했지만, 한건우의 손아귀는 이미 그의 목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으윽."

천명환의 두 발이 반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눈에서 흰자위가 보였고,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우드득!

천명환이 회피 스킬을 쓰기도 전에, 한건우의 괴물 같은 악력이 그의 목뼈를 부숴버렸다.

A급 플레이어의 신체는 왠만한 방어구보다 강하니, 말도 안 되는 괴력이었다.

그때, 뇌룡의 심장 조각이 핏줄을 타고 한건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파지지직!

가슴 가운데서 번개가 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통에, 한건우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한건우는 천명환의 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의 시체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천명환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었다.

"으으으...."

몸에 들어온 마정석이 한건우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의 심장에 북이 달린 것처럼 거세게 고동쳤다.

두근, 두근-.

번쩍!

쿠와아앙-!

폭풍우 치는 들판에서 심장에 낙뢰가 내리친 듯했다.

캄캄한 가운데, 깜빡이는 메시지가 순식간에 눈앞을 휙휙 지나갔다.

[히든 퀘스트 : 용기의 증명]

-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를 100명 죽였습니다

- 세계 최초 달성.

- 보상으로 악마의 권능이 주어집니다.

[악마의 권능(유일) : 탐식]

- 죽인 자의 특성을 흡수합니다.

- 특성 흡수 중

(1 / 100) ···

(99 / 100) ···

- 특성 흡수 완료(100 / 100)

[특성(신화급) 발동 : 비스트 마스터]

- 마수의 신체와 합체합니다.

- <뇌룡의 심장 조각>과 융합 중 ...

[히든 스킬(신화급) : 뇌룡의 비상]

- 시간을 역행합니다.

"허억."

한건우는 온몸을 비틀면서 눈을 떴다. 등허리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오빠, 괜찮아?"

"...어?"

“생일 아침부터 악몽 꾼거야?”

어리고 앳된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미쳤나?

동생은 죽었는데....

그것도 죽을 때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끝끝내 원망하면서 말이다.

한건우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이 핼쓱해졌다.

동생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나 먼저 갈게. 오늘은 늦으면 안 돼."

"...."

“아 맞다, 오빠. 스무 살 생일 축하해!”

여동생은 생일 축하 인사를 하고, 조금 머쓱한지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

한건우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이 말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과거에 들은 그대로였다.

20살 생일 날?

한건우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15년 전, 그가 각성한 날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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