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낙원 (완결)
슈프림 시큐리티의 본사.
셔츠 차림의 여성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 출입구로 향하던 중 한 남자와 마주쳤다.
“에스텔 님. 외출을….”
슈프림 시큐리티의 운영 대리인 밀시안이었다.
그는 에스텔을 보며 입을 열다 말끝을 흐렸다.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그날 이후, 그녀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방문하는 장소가 있었다.
꾸벅.
밀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에스텔은 힘없는 몸짓으로 같은 동작을 해 인사를 받았다.
사옥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으며 햇살은 따사롭게 거리를 내리쬐었다.
가게의 열린 문들 사이로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으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텔은 웃지 않았다
“신문이요! 신문!”
신문을 한 아름 든 소년이 에스텔 앞에 멈췄다.
그녀가 손을 저어 구매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지만, 소년은 아랑곳 않고 환한 웃음과 함께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공짜예요! 사장님이 이런 소식은 빨리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소년이 사라지고.
에스텔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신문을 펼쳤다.
「헥사메디컬. 석화증 치료제에 이어 영면증 치료제까지 무상 공급. 늘어난 농토로 대량 생산을 위한 원료 확보해.」
1면에는 기사와 함께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려있었다.
헥사메디컬의 본사 입구.
사람들이 나란히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프로이드와 나일스.
그들을 위시한 헥사메디컬의 운영진들.
그것 외에도 여러 기사가 있었다.
「자비르 칼타. 경찰청장 취임 이후 2분기. 범죄율 극적 하락. 우려의 목소리를 실적으로 증명.」
「아시모프 황제. 레지스탕스와 극적 타결 이후 친서민적 행보 보여. 헥사메디컬에 국가 예산을 할당할 것이라 발표.」
“…….”
기사를 모두 읽은 에스텔은 근처 쓰레기통에 신문을 버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풍경화에 잘못 떨어진 얼룩처럼.
도시의 흥겨운 분위기와 분리되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도시 외곽에 위치한 언덕이 나타났다.
쏴아아─
바람에 제 몸을 흔드는 푸른 잔디.
에스텔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는 완만했지만, 정상까지의 높이가 만만치 않았다.
주위엔 그늘 한 점 보이지 않았고, 내리쬐는 태양에 그녀의 몸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탁.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한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시 전체의 풍경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건물도, 차량도, 사람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색은 ‘초록색’과 ‘갈색’이었다.
도시 곳곳에 논과 밭이 운영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 위에서 미소 지으며 일하고 있었다.
도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경계벽 너머.
그곳엔 더 이상 황야가 존재하지 않았다.
초목이 자라나고 있는 푸른 초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또한 원래 위치에 있어야 할 여신상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은 이 언덕에 자주 올라왔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언덕에 올라 풍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하지만 그가 본 풍경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도시에 논과 밭은 찾아볼 수 없고, 경계벽 너머도 그저 황야에 불과했을 테니까.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에스텔은 몸을 돌려 몇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멈춰 선 곳엔 작은 봉우리가 있었고, 그 위엔 십자 형태로 묶은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기울어진 나뭇가지를 바로 세우는 순간.
주륵.
돌연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4월의 마지막 주였으며.
방주가 부상한 지 반년이 지난 날이었다.
그날 이후 세상은 더없이 풍요로워졌다.
굶주림은 천박한 농담이 되었으며, 생활 환경이 개선되며 범죄율 역시 줄어들었다.
언젠가 성경에서 그런 말을 본 적이 있었다.
세상 모두가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고.
낙원이라고 했다.
그런 세상을.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 중 세상이 가장 낙원에 가까운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라고.
마치 세상이 제자리를 되찾아 응당 누렸어야 할 것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 같았다.
그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단 한 가지.
“흑, 흐윽.”
카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흐윽… 흑.”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흐느꼈다.
방주가 머나먼 상공에서 폭발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머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처음엔 가슴이 덜컥 내렸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카인은 죽음과 늘 가까운 사내였고, 위험에 처할 때마다 죽음의 신을 농락하듯 아무렇지 않게 살아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조금 다친 모습으로 연회장에 다시 나타날 터였다.
「할 일을 합시다. 카인 님이 돌아오셨을 때 시간을 아끼실 수 있도록.」
아시모프 황자.
정확히는 아시모프로 분한 셸링포드의 말이었다.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 기사단은 무너진 황궁 벽을 통해 진입한 특무대에게 전원 제압된 상태였다.
「…카인의 지시였다. 특무대를 벽 근처에 대기시켜두라고.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군.」
제르비아는 특무대를 지휘해 연회 참석자를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포박했다.
복잡하고 혼란스런 눈동자로, 그녀 역시 카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망자 명단은 현재 정리 중입니다. 방주 탑승자가 아닌 단순 사용인들도 모두 한데 모이도록 해두었습니다.」
특무대와 함께 황궁에 진입한 밀시안의 말이었다.
모두가 현장을 정리하고 한 자리에 모여 카인을 기다렸다.
제르비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스텔 사제에게 들었습니다. 황제가 대륙을 멸망시킬 마법을 발동하려 했다고. 현재 그 마법은….」
밀시안이 답했다.
「아까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신상에 감돌던 빛이 사라졌다고. 마법은 멈췄습니다. 카인 님이 남기셨던 말에 의하면.」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카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밀시안이 서류 가방을 열었다.
카인의 인장으로 밀봉된 수십 장의 서류 봉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카인 님께선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 이 봉투를 열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지시 사항이 쓰여 있을 것이라고.」
각 봉투마다 시간과 일수에 맞춰 언제 개봉해야 할지가 적혀 있었다.
눈치를 보던 셸링포드가 말했다.
「사실 맹약의 징표가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카인 님은….」
「저, 저도요. 제 것도 사라졌어요.」
엘렌 교수가 급히 덧붙였다.
자신의 징표 역시 사라졌음을 확인한 순간, 제르비아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징표가 사라지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맹약이 완료되거나.
혹은 계약자 중 하나가 죽거나.
세상이 어지러이 돌기 시작했다.
상황이 현실 같게도 꿈 같게도 느껴졌다.
아직 묻지 못한 말이 많았다.
풀지 못한 감정이 많았으며.
반드시 뱉어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카인. 나는 너를.
나는 어쩌면 너를.
제르비아가 가까스로 의식을 부여잡을 때.
에스텔 역시 비슷한 종류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느낄 수 있는 반지.
잠잘 때나 씻을 때나 단 한 순간도 손에서 뺀 적이 없었다.
카인이 특정 임무를 위해 지시를 내렸을 때만을 제외하고는.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반지는 카인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분명 방주의 폭발 전까진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음에도.
그저 핏자국과 긁힌 자국 가득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자리해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진정하십시오. 카인 님은 그리 쉽게 목숨을 잃으실 분이 아닌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스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밀시안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진정시켰다.
「반지가 파손이나 분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제와의 전투가 평온히 흘러가진 않았을 테니까요.」
「꼭 그래야 해요. 꼭 그래야….」
에스텔이 자리에 앉고, 밀시안은 ‘2시간 뒤’ 문구가 적힌 봉투를 개봉했다.
앞부분은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현재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지시에 잘 따랐다면 특무대와 함께 연회장을 점거했을 것이라고.
「그 뒤는… 방주 탑승자 전원을 지하 감옥에 수감하라 하는군요. 지정된 몇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밀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앗아야 할 인원들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4황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황자가 살아있다면, 그들 전원을 최우선으로.」
셸링포드가 말을 받았다.
「세 황자 모두 혼란을 틈타 제가 죽였습니다. 카인 님이 이미 제게 지시를 내렸던 사항입니다.」
「예. 여기 적혀 있군요. 셸링포드 님이 지시를 수행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라고.」
셸링포드는 다음 봉투에 나올 내용을 알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황제가 되라고 했다.
그래서 죽은 아시모프의 숙원을 대신해서 달성하라고.
경쟁자를 제거하라 지시한 것이다.
유일한 황자가 된다면, 황제의 죽음 이후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시간이 지나고.
다음 봉투가 열렸다.
「각 신문사를 통해 보도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라티움의 비행 기술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처리하라고 말입니다.」
제르비아가 말을 받았다.
「모두 사망으로 처리하라는 말이군요. 방주 탑승자엔 교단과 경찰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수뇌부가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들 전부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의심을 살 테니까요. 사회적 파장은 물론 만만치 않겠지만….」
봉투는 계속해서 개봉되어갔다.
상황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제시되어갔지만, 반대로 모두의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그렇게 카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도.
“…….”
에스텔은 상념에서 돌아왔다.
황궁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그에 관해 여러 음모론이 떠돌았지만, 사회 분위기는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황위에 오른 아시모프 황자는 교단과 라티움을 비롯한 각계각층 수뇌부 자리에 자신의 인사를 배치했다.
그리고 봉투에 나온 카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먼저 여신상 철거 사업을 벌였다.
‘여신상에 쓰인 주재료가 토양의 비옥도 회복에 효과적이다.’
라티움을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신상 철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급속도로 회복되는 토양을 설명하기 위한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했다.
청장에 취임한 제르비아는 특무대를 대폭 증원하고, 벽 바깥의 치안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아니.
사실 벽 바깥이란 용어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국경 역할을 하던 벽은 황제의 지시로 한창 철거 사업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카인을 기다렸고.
봉투는 하나둘 줄어들었다.
지시 중엔 엘린 교수와 바마를 만나게 해주란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감격의 재회 후 밀시안의 지원을 받아 고아 구제 사업을 벌였다.
에스텔은 또 다른 인물들을 떠올렸다.
「잠시 자리를 비우지. 녀석이 돌아왔을 때 푸른 숲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실버팽과 잿빛늑대는 생명의 씨앗을 심기 위해 그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러스트우드로 돌아갔다.
「…요한이 돌아오면 꼭 말해줘요. 아직 소원을 못 빌었어요.」
용병으로 이름난 율리아는 얼마 전 헥사메디컬 본사를 방문해 그런 말을 남기고 갔고.
「사업을 다른 쪽으로 확장해봐야죠. 세상은 점점 평화로워지고, 총이나 칼 같은 무기는 전만큼 팔리지 않을 테니까.」
로우택틱의 대표 피에타는 차를 마시며 밀시안과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자신은.
늘 카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자신은.
쏴아아─
이곳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봉우리를 보았다.
「이제 인정들 해. 나도 녀석이 죽은 건 몹시 유감이야.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답은 정해져 있지.」
무덤이었다.
추모 장소가 필요하다며 바마가 만든 무덤.
모두 화를 내며 무덤을 부수려 했지만, 순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젠장. 난 하나도 안 슬퍼. 유감스러울 뿐이지. 어쨌든 난 너희들이 불편해할 일을 대신해준 거야. 고마운 줄 알라고.」
그렇게 무덤 같지 않은 무덤이 완성되었다.
“…….”
흐느낌은 줄었지만, 눈물은 계속 떨어졌다.
바람에 휘청인 나뭇가지를 다시 바로 세웠다.
진짜 묘비는 세우지 않았다.
그러면 카인의 죽음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단순히 카인을 떠올리고.
그가 보았던 풍경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나쁜 사람.”
결국 카인이 세상을 구했음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황제를 동요하기 위해 뜬소문을 내기는 했지만, 정확한 사건의 전말은 세상에 밝히지 않았다.
「황제의 음모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황가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아시모프의 행보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쓰여 있군요. 덧붙여 전 대륙적인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황제의 음모가 실제로 세상에 알려져도, 폭동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세계 멸망과 방주는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니까.
그럼에도 카인은 만약의 가능성을 걱정해 원천 봉쇄한 것이었다.
“나쁜 새끼.”
오늘 자정.
카인의 마지막 봉투가 개봉되었다.
애써 구축한 낙원을 망가트리지 않을 세심한 방책들이 쓰여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편지를 앞뒤로 살피고 불에 비춰보기도 했으나 더 이상 쓰인 내용은 없었다.
“자기 걱정은 안 하고.”
에스텔은 호흡을 골랐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봉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타날 거 다 알아.”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자신의 유일한 신이라 할 수 있는 한 남자에게.
그때.
“기도라. 누구에게 올리고 있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미소를 걸친 한 남자를 본 순간.
멈췄던 눈물이 다시 한번 왈칵 터져 나왔다.
에스텔은 힘껏 달렸다.
“미안하군. 기억을 되찾는데 예측한 것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와락!
몸을 날려 남자의 품에 매달리듯 안겼다.
빙글 도는 몸을 따라 봄 끝자락의 바람이 일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로.
[ 完 ] [ 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