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종장 (2)
휘오오─!
칼바람이 전신을 스쳤다.
낙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져만 갔다.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엘리베이터에 충돌해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밖에 떠올리지 못했을 정도로.
허나 카인은 한치의 속도도 늦추지 않았다.
황제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단 1초의 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지붕이 급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손아귀 안에 바람을 그러모으던 그때였다.
“……!”
엘리베이터 안에서 원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카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튼 다음 순간.
텅!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가 엘리베이터 지붕을 뚫고 발사되어져 나왔다.
핏!
아슬아슬하게 카인의 뺨을 스쳤다.
마치 총알처럼.
핏방울이 허공에 휘날렸다.
몸을 한 바퀴 돌려 자세를 바로잡는 카인.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바람 덩어리’는 어느새 착륙용이 아닌 공격용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카인은 손바닥을 뻗었다.
지붕과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 남지 않았다.
텅!
바람 덩어리는 엘리베이터 지붕 한쪽을 완전히 짓이기며 안쪽을 파고들었다.
발사의 반동으로 낙하 속도는 급격히 줄었고, 카인은 멀쩡한 지붕 부분에 사뿐히 착지했다.
“…….”
엘리베이터 안은 비어 있었다.
바람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을 뿐, 핏자국이나 살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탁. 타탁. 탁.
다급한 발소리가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바깥으로 이어졌다.
카인은 곧장 몸을 움직여 문밖으로 나갔다.
“잠깐 얘기를 하지.”
긴 발판 형태의 이동로.
황제는 어느새 그 끝에 도착해 마나 탱크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천장과 바닥에서 뻗어 나온 긴 관에 연결된 구체 형태의 마나 탱크는 살아있는 심장처럼 꿀렁였다.
저벅.
카인은 황제의 말을 무시하고 한 걸음 다가갔다.
“멈추게.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닌가?”
저벅. 저벅.
황제의 손바닥은 정확히 탱크의 센서에 위치해 있었다.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봐야 미약한 양으로 현 상황에 큰 도움은 안 될 테지만.
“멈추라고 했네! 어명일세!”
탁.
카인이 걸음이 멈췄다.
황제의 얼굴에 의아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깃들었다.
“원하는 게 있느냐고. 들어줄 의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황제는 최대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똑똑한 인물이지. 분명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런 일을 벌였을 것 아닌가.”
“그래. 원하는 것이 있지.”
“말해 보게. 신세계에서 더 높은 직책을 원하는가? 아니면 방주의 자리가 더 필요한가?”
황제의 기대감이 짙어졌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황제.”
다음 순간 카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서.
“너의 목숨. 그리고 방주의 파괴.”
텅!
황제와 카인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돌풍을 발사했다.
동시에 방호를 전개했고, 동시에 원소장을 펼쳤다.
파직! 파지직!
카인의 시계는 마법의 출력을 견디지 못해 망가진 상태였다.
때문에 그의 마나는 짙은 흑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우웅─!
백색 마나와 흑색 마나.
사용자의 주원소를 반영한 색상의 두 원소장이 해역이 맞물리듯 중간에서 충돌했다.
파직! 파지직!
황제와 카인.
두 사람 모두 다원소 사용자였다.
원소장 내엔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원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자연 상태에선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고농도’ 상태로.
파직! 파직!
원소는 상성에 따라 서로 상쇄되어 소멸하기도 하였으며.
융합되어 사용자의 의지에 관계없이 현상으로 화하기도 했다.
그 현상의 대부분은 전(電)계.
백색 마나와 흑색 마나가 뒤섞여 만들어진, 짙은 회색빛의 ‘전류 덩이’가 비산하기 시작했다.
천장으로. 벽으로. 바닥으로.
지하 공동 전체로.
톱날에 갈려 사방으로 튀는 금속 파편처럼.
쾅! 콰광!
닿는 모든 곳에서 폭발하는 전류.
무너질 듯이 흔들리는 지하 공동.
위태롭게 깜빡이는 조명.
“──────!”
반복되는 빛과 어둠 속에,
카인은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전류의 비’와 사방에서 이는 폭발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 모양과 상황을 통해 내용은 유추할 수 있었다.
카인의 입술이 비틀렸다.
“…둘 다 죽는다고. 그거 나쁘지 않군.”
정말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복원 마법의 스위치는 황제 본인만이 작동 가능하기에, 여기서 황제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어쨌든 세계는 구할 수 있었다.
카인은 황제의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회로가 망가진 것이리라.
비웃을 처지는 못 되었다.
자신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입안에 피를 한 움큼 머금고 있는 상태였다.
남은 여력을 쥐어짜 피를 한꺼번에 목 뒤로 삼켰다.
이쪽 역시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굳이 황제에게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행여 가능성을 포착한 황제가 마지막 불씨를 불태울 수도 있는 일이니.
카인은 이를 악물고 남은 모든 마나를 원소장에 주입했고, 그 결과 흑색 원소장이 점점 백색 원소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폐하를 보호하라!
─흑마법사였나…! 저 더러운…!
1층에서 외침이 들려온 것은.
황궁 기사단이 전류의 비를 피해 이쪽으로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기술자들의 통로로 진입했으리라.
벽에 위치한 계단을 통해 이쪽으로 올라오려는 생각일 터.
파직!
카인과 황제의 힘 싸움이 끝을 향해 치달으며, 회색 전류는 이제 ‘벼락’과 같은 형태로 떨어지고 있었다.
파지직!
시야가 깜빡일 때마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숫자가 늘어났다.
하지만 몇몇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 계단을 올라 카인을 향해 도약했다.
챙!
기사단의 검은 카인의 방호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황제에게 한순간의 틈을 주었다.
카인의 원소장이 흔들린 순간.
탓!
황제는 자신의 원소장을 거두고 이동로 뒤편으로 뛰어내렸다.
방주의 선체 옆면 방향이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문이 위에서 아래로 열려, 출입구를 만듦과 동시 발판이 되어 있었다.
“……!”
카인이 돌풍을 쏘아 보냈지만, 닫히는 문 사이 드러난 황제의 어깨를 맞추었을 뿐이었다.
철컥.
문이 완전히 닫힘과 함께 방주 전체에 불이 들어오고.
위잉─.
지하 공동의 천장이 열렸으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방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탓. 타탓.
방주에 연결되어 있던 관들이 끊어지며 바닥에 나부라졌다.
카인이 방주에 접근하려 뛰었지만, 뒤편에서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더러운 흑마법사! 죽어라!”
“타인의 생명을 앗아 얻은 힘! 부끄러운 줄 알라!”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또한 이쪽은 황제와의 대결로 마나가 바닥에 가깝게 소진된 상태였다.
파직!
“끄윽!”
“커흑!”
전격을 쏘아 기사들을 쓰러트렸다.
대가로 왼쪽 어깨에 공격을 허용해야 했지만.
카인은 방주 쪽으로 몸을 돌리지 못했다.
“폐하의 옥체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황궁 기사단이 계속해서 계단을 통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제르비아가 지하 공동에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공동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벽과 바닥 전체에는 전류가 흐르고 있었으며, 천장에 나타난 원형 통로를 향해 방주가 부상하고 있었다.
깜빡이는 조명 사이.
계단 위의 넓은 이동로에서 기사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카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하고 있어! 안 지나가고!”
에스텔이 제르비아의 어깨를 밀치고 계단을 향해 달려나갔다.
“카인은… 범죄자. 내 아버지를….”
제르비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스텔이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답답한 여자야! 제라트 청장은 네 진짜 아버지가 아니야! 가짜라고! 그리고 카인이 왜 저렇게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건데!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사람이 황제라서 그렇다고!”
제르비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동자가 커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의심되면 나중에 피검사를 해보던가아아아아─!! 카인한테 제라트 그 사람 혈액 샘플이 있으니까─!!”
제르비아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을 마친 듯 검을 꽉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에스텔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 기사단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기사단을 가로막고.
고개를 살짝 돌려 등 뒤의 카인을 보며 말했다.
“가라.”
“…….”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카인은 몸을 돌려 이동대 끝으로 달렸다.
부상하는 방주를 향해 도약해, 선체 옆면의 돌출부를 붙잡아 매달렸다.
“자비르 치안국장도 흑마법사와 한패다! 즉결처분하라!”
챙! 채쟁!
제르비아는 기사단의 검을 침착하게 받아냈다.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내린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란 사실이었다.
‘살아 돌아와라.’
챙! 채챙!
‘카인.’
네게 아직 묻지 못한 것들이 있으니까.
***
휘오오─!
방주의 부상 속도는 그 거대한 크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지하 공동으로부터 이어진 통로를 순식간에 지나, 바깥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돌출부에 매달렸다.
부상 탓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건 오른팔뿐.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몸이 흔들렸다.
‘이 정도라면 버틸만하다. 강화 마법에 사용할 마나를 아끼는 것이 옳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지상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구멍이 나 있는 황궁의 옥상부.
자리에 얼어붙어 방주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
작은 점 크기로 보이는 수도의 건물들.
수인에 버금가는 육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손에 힘이 풀려 진즉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만약 부유 마법을 사용한다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부유 마법의 이동 속도는 극히 느려 방주를 놓칠 가능성이 컸고, 자신의 목숨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탓!
카인은 잡고 있던 돌출부를 놓는 동시 몸을 날려 다음 돌출부를 잡았다.
왼팔에 강화마법을 사용해 그때그때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만을 사용했다.
그 끝에 황제가 들어갔던 출입구 옆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그 사이 방주는 계속 부상하여, 이제는 대륙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붉은빛으로 점멸하는 수천 개의 점이 보였다.
교단의 사제들이 대륙 전역에 박아 넣은 수천 개의 여신상이었다.
황제가 이미 방주 내에서 복원 마법의 스위치를 누른 것이리라.
‘여신상 전체가 이루는 형상은 교단의 팔각별. 이 설정은 바뀌지 않았군.’
어쨌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손바닥에 바람을 끌어모아 출입구 귀퉁이를 조준했다.
황제의 어깨를 맞췄을 때 함께 명중시켰던 부분으로, 귀퉁이는 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방주의 외부는 어떤 마법으로도 타격을 줄 수 없는 것이 사실.
하지만 기능 문제로 인해 비교적 내구도가 약한 합금을 사용한 내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웅.
바람이 모여들었다.
한 팔로는 돌출부를 붙잡고.
다른 한 팔로는 벌어진 틈의 이음새를 조준했다.
텅!
돌풍이 이음새에 명중하며 틈이 더 크게 벌어졌다.
텅! 텅!
방주가 상승을 계속하는 동안 카인은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마침내 틈은 사람 한 명 정도 크기로 커졌고, 카인은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탁!
통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안정감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주위를 살폈다.
통로 전체는 정확한 재질을 알 수 없는 백색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통로 끝은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었으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달린 것이 보였다.
걸음을 옮기자 카메라가 고개를 돌리며 따라붙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겨누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곧 갈 테니.”
탕!
통로에 고요한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