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종장 (1)
경악에 찬 사람들의 얼굴.
사방을 가득 채운 혼란과 무질서.
시간이 느리게 느껴진다.
마치 정지한 세상 속에 홀로 움직이듯이.
─지… 무슨…! 저…!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세상의 소리는 멍멍하게 들려온다.
실수 따위 할 리 없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백 번 그렸던 상황이니.
의식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머리는 반대로 차게 식는다.
체내의 마나가 의지에 감응해 현상으로 화한다.
쩌정.
허공에 생성된 두 개의 얼음송곳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다.
푸욱!
무릎 꿇은 두 표적의 심장을 꿰뚫고.
우웅─
그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마나를 손안으로 빨아들인다.
그와 동시.
황제를 향해 손바닥을 뻗는다.
파지직!
서슬퍼런 전격을 쏘아 보내는 순간.
“요하아아안!!”
시간이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소리가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지지직! 지지지직!
“감히! 감히 나를 농락했단 말인가!”
황제는 마나장을 회수하는 동시, 방호를 펼쳐 카인의 전격을 막아냈다.
파지지지직!
곧바로 전격을 쏘아내 카인의 전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두께의 백색 전류와 청색 전류가 허공에 맞부딪치며 쉴새 없이 스파크가 튀었다.
“감히 나를!”
전신에 백색 마나가 일렁였다.
눈동자는 흉흉한 안광을 발했다.
마나가 실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감히 나를!”
배신.
상황 이해는 직관적으로 이뤄졌다.
깊은 신뢰를 주었던 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저지른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아군이 아니었으며, 이제껏 줄곧 녀석의 손 위에서 놀아났을 가능성이 컸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녀석이 직접 밝힌 스스로의 정체는 ‘카인’이었으니까.
배신.
그래.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니까.
파지직!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파지지직!
상대가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두 사람의 마나를 흡수했다고 해도…!”
“…….”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 탱크에서 마나를 흡수해 너와 비슷한 수준에 달했노라고, 굳이 답해줄 필요가 없었다.
빠드득!
이를 악물고.
회로 전체의 마나를 한계 이상으로 사용해.
다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후유증을 입을 각오를 하고.
“황제 폐하를 보호하라!”
흉흉하게 마나를 머금은 황실 기사단의 검이 카인을 향해 쇄도했다.
황제와 카인.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한 상태로,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화륵!
검이 카인에게 닿기 직전.
시뻘건 불덩이가 날아와 기사단의 동작에 제약을 걸었다.
그리고.
쐐액!
뒤이어 날아든 두 자루 검이 기사단의 검로를 각기 파고들어.
챙! 채챙!
그 모두를 단번에 쳐내버렸다.
“물러서라!”
“뒤쪽은 내가 맡을게요!”
드레스 차림의 제르비아.
그리고 연회장 밖에서 대기 중이던 에스텔이었다.
“역적들을 모두 처단하라! 폐하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챙!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쉴새 없이 연회장을 울렸다.
쾅! 콰광!
외벽에서는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 무너진다! 벽이 무너진다!”
“꺄아아악!”
“사, 살려줘!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마나장에서 막 풀려나 빈사 상태에 가까움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연회장에서 달아나려 했다.
더러 기사단을 도와 카인을 공격하려는 이도 있었지만, 엘렌 교수의 마법에 제압당해 단 위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엘렌 교수의 시야 끝에, 외벽에 난 구멍으로 달려가는 2황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벽 앞에 도착해 연회장 쪽을 흘긋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구멍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
쐐액!
한 자루 검이 잠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엘렌 교수에게 쇄도했다.
“……!”
엘렌 교수는 다급하게 몸을 굴렸고.
“크윽!”
등 뒤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단을 향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있는 1황자가 보였다.
1황자 아벨.
마나를 머금은 그의 발이 의자와 테이블을 힘껏 박차고 올랐다.
단번에 십 미터 가까이의 허공을 날아 검을 내리쳤다.
챙!
대상은 제르비아였다.
아벨의 검을 받아낸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자비르 치안국장! 당신도 카인과 한패였나!”
챙! 채챙!
쉴새 없이 이어지는 검격.
흔들리는 검로를 따라.
그녀의 생각 역시 흔들렸다.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상황이 닥치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던 카인의 말.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인에게 달려드는 황실 기사단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이 튀어 나갔으니까.
상황의 윤곽도 그릴 수 있었다.
연회장에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황제가 직접 언급한 ‘방주’와.
수도에 떠돌던 소문을 종합하여.
대륙은 곧 멸망할 것이며, 방주에 탑승한 이들만이 살아남아 신세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황제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신세계에서의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을진대.
챙!
“범죄자와 결탁하다니 그대의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자비르 칼타! 검을 버려라!”
범죄자.
그 단어가 제르비아의 무의식 깊은 곳을 찔렀다.
불에 달군 송곳과 같아, 강도 높은 통증이 일었다.
또한 평생 제국의 테두리 안에 살아온 이로서, ‘황제 암살’이라는 상황이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나는 지금―.’
그때였다.
파지직!
라이티노와 바이퍼의 마나를 회로에 완전히 정착시킨 카인이 마법의 출력을 높여, 황제의 백색 전류가 점차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푸른 전류가 황제의 전신을 집어삼키기 직전.
우웅.
황제의 반지에서 뿜어진 빛이 연회장을 뒤덮었다.
수 초 후.
빛이 걷혔을 때.
황제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폐, 폐하?”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하아. 하아.
카인은 거친 호흡을 뱉었다.
유물일 것이다.
착용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자동으로 공간 이동 마법을 발동하는 유물.
황제가 어디로 피신했을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결국 그가 향할 장소는 한 곳밖에 없으니.
탓.
카인은 최대 출력으로 강화 마법을 사용했다.
잔디밭 멀리 황궁 출입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
“감히! 감히!”
황제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의복은 땀으로 흠뻑 젖고, 온몸은 후들거렸다.
양옆으로 이어진 선반.
잔뜩 쌓인 식량과 생수.
황제가 전송된 곳은 황궁 내부에 위치한 비밀 벙커였다.
“감히 나를 배신해!”
쿵!
분에 못이긴 황제가 팔을 휘둘렀고, 선반이 부서지며 식량과 생수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쿵! 쿵!
황제는 같은 행위를 몇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조금 진정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
분노가 사라지고 다음으로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아직까지 생생했다.
눈앞까지 다가왔던 푸른 전류.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것 같던 놈의 눈동자.
황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난생처음 느껴본 생명의 위협이었으며, 처음으로 가져본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공포’라는 미지의 감정은 제국의 황제를 한순간 나약한 늙은이로 끌어내렸다.
두렵고도 두려웠다.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믿겨 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막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
얼마 전 놈의 회로를 확인했을 때는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는데.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벙커의 벽은 방주의 선체와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 어느 누구도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었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식량과 생수가 충분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 후 나가면 될 것이다.
기사단이 어떻게든 놈을 죽이고 상황을 정리해두었을 테니까.
“…….”
아니. 그게 가능할까.
기사단이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을까.
바이퍼 후작이나 라이티노 장로가 합세한다면 모르지만, 그 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벙커에서 영원히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놈을 죽일 방법.
놈을 죽일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손톱을 물어뜯던 황제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복원 마법이 있었다.
방주의 조종실에 위치한 ‘스위치’를 누르면 복원 마법이 발동한다.
대륙 위의 모든 존재는 자동적으로 소멸하며, 신세계 구축을 위한 양분으로 쓰이게 된다.
“…….”
그 전에 방주를 하늘에 띄워야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방주엔 이미 방주 가동에 꼭 필요한 승무원들이 탑승해 있었으며.
최악의 경우 자신 역시 방주의 조종이 가능했다.
선별한 인재들을 태울 시간은 없을 것이다.
황자와 황녀들을 포함한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
아깝긴 하지만 자신이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은 선택이다.
승무원 성비는 남녀가 균등했기에, 신세계에 새로운 문명을 구축하는 것도 문제는 없었다.
기술자가 부족해 계획보다 속도가 느리긴 하겠지만.
결심을 마친 황제는 벙커의 출입문을 작동했다.
끼이이이─
두꺼운 문이 열리고.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를 계속 돌아 나가자 시야가 밝아지며 익숙한 장소들이 나타났다.
탓. 탓.
황제의 빠른 걸음은 지하 공동으로 출입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순간 이상함을 느꼈지만, 감히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탓. 탓. 탓.
황궁 입구 안쪽 홀을 지날 때.
“폐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나타난 전령이 황제를 향해 뛰어왔다.
“현재 레지스탕스에 의해 국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탕!
시간도 마나도 낭비할 수 없었다.
황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품에서 총을 꺼내 쏘았고, 전령은 바닥에 쓰러져 가슴에서 피를 줄줄 쏟아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용인들이 경악했지만,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회랑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놈이 따라붙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기사단은 모두 연회장에 배치했었기에, 회랑 양측에 경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삐익─
센서에 핏방울을 떨궈 인증을 마친 황제는 여러 개의 출입문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지하 공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십수 초 뒤.
삐익─
바깥쪽에서 센서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이 일제히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멈췄다.
“…….”
카인이었다.
카인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보며 자신이 황제를 간발의 차로 놓쳤음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는 하나.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다른 통로도 존재하나, 그곳은 황궁 가장 안쪽에 있어 거리가 멀었다.
카인은 엘리베이터 문과 거리를 벌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찌직! 찌지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휘몰아쳤고, 손바닥 앞에는 작은 돌풍이 형성되었다.
텅!
가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발사된 돌풍은 엘리베이터 문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바로 앞에 다가서 고개를 숙였다.
끝없이 이어진 승강기 통로.
힘없이 떨어지는 문 파편들.
그리고 그 끝에 작은 점으로 보이는 승강기의 머리 부분.
탓.
카인은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