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마지막 연회 (3)
D-25.
연회 당일. 새벽 3시 22분.
쏴아아─
제르비아는 창가로 다가갔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건 자정.
하지만 벌써 몇 시간째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
창밖엔 세찬 비가 내렸다.
손바닥을 대자 창가에 있던 냉기가 기다렸다는 듯 엉겨 붙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거리의 실루엣만 보였다.
현재 자신의 마음과 같았다.
감정은 한없이 차갑고.
‘…카인. 너는 대체 왜.’
상대의 실체는 어렴풋하기만 했다.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또 무엇이 거짓인지.
「맹약을 맺지. 블루서펜트의 괴멸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어쨌든 녀석은 맹약을 지킨 셈이었다.
비록 딸이 아버지를 찌르는 참극이 벌어졌지만, 블루서펜트 보스의 존재는 세상에서 확실히 지워져 버렸으니까.
‘너라면 더 나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왜 카인이 그런 방법을 택했는지.
녀석의 신념과 같은 ‘효율성’ 때문일 것이다.
딸의 공격이 아니었다면, 블루서펜트 보스는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
제르비아는 여전히 기억했다.
검격을 받아내던 순간 흔들리던 아버지의 눈동자와.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머뭇거리던 무수한 동작들을.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평생 무심하던 아버지는 최후의 순간에서야 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카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
적어도 그가 자신과의 유대관계를 생각했다면.
자신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의 반절만이라도 발휘했다면.
‘너무… 아파.’
적어도 그랬다면.
그런 방법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주륵.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무표정한 얼굴을 따라 빗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녀의 뿌연 시야에 무언가 포착된 건 그때였다.
‘……?’
저택의 대문을 향해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가로등이 모두 꺼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형체로 보아 남성이었다.
남성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곧 아래층에서 호출 벨 소리가 들려왔다.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제르비아는 잠시 망설였다.
한참 기다렸지만, 아래층에서 사용인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 혼자였지. 이 저택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청장이 사라진 후 사용인들 역시 모두 저택을 떠났으니까.
제르비아의 결정이었다.
본디 사용인 대부분은 청장의 필요에 의해 고용되었던 이들.
그녀는 잘 때를 제외하곤 본청에서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때문에 사용인이 불필요하다 판단했다.
범죄자인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삐익─ 삐익─
어쨌든 호출 벨은 계속 울렸고,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인…?”
예의 무감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세찬 비를 맞으면서.
스위치를 눌러 대문을 개방하자 오래지 않아 저택 출입문에서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을 열자 보이는 카인의 모습.
제르비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오늘 방문한다는 말은 분명 없었―.”
“미안하군. 처리할 일이 많아, 미리 연락할 시간이 없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황제와의 만남 직후.
카인은 지난 이틀 단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대륙의 종말을 막기 위해.
수면을 취하지 않고 줄곧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로.
때문에 그의 얼굴엔 평소와 달리 약간의 피로가 배어있었다.
“비는 대체 왜….”
“일부러 맞았다. 생각이 많아져 머리를 조금 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더군.”
카인은 저택 내부로 들어와 바람을 일으켰다.
옷과 머리가 순식간에 말라, 조금 전까지 비에 흠뻑 젖어 있던 사람으론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르비아는 거센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런 카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
사상 최악의 범죄자.
그리고.
이유 모를 애틋함과 사무치는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준 장본인.
제르비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시적 동맹 관계라 하나 상대가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할 범죄자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블루서펜트는 실질적으로 와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바마’의 존재가 맹약의 완료를 유예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제르비아는 경찰청 내부 정비를 진행하는 동시, 바마 추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바마는 활동을 중단했는지 최근 어떤 흔적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황제로부터 초대장은 받았겠지.”
“…….”
제르비아는 어제 본청을 찾았던 황궁의 전령을 떠올렸다.
「폐하께서 자비르 경을 황궁 연회에 초대하셨습니다. 영광스런 자리이니 모든 업무를 접고 필히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왜 내게 초대장을.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카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상태.
황제의 초대가 그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직감했다.
“내일 연회에 관해 대화를 나눌 것이 있다. 들어가 얘기하지.”
직감은 사실로 드러났다.
‘방금 황제 폐하가 아니라 그냥 황제라고….’
또한 카인이 꺼낼 말이 결코 간단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들어와라.”
제르비아는 카인을 응접실로 안내했고, 두 남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일 연회장에서 나는 한 가지 발표를 할 생각이다. 동시에 큰 소란이 벌어져 장내는 아수라장이 될 거다.”
“…….”
“그때 나는 특정 행동을 취할 생각이다. 막아서는 이들을, 네가 상대해주었으면 한다.”
특정 행동이란 황제의 암살을.
큰 소란이란 율리아의 도피로를 만드는 일을 뜻했다.
“행동과 소란이란 게 뭐지?”
“말해줄 수 없다.”
카인은 즉답했다.
‘제르비아는 내가 황제를 죽이려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해시킬 수는 있다.
황제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모두 설명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르비아에게 ‘악인’으로 남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자신이 하려는 일은 대륙의 구원.
자신에 대한 그녀의 증오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될 일이다. 황제의 죽음 이후 치안이 오랜 기간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녀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범죄를 향한 제르비아의 증오심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어야 했다.
악인의 사연 따윈 상관없이, 엄격히 죄의 위중만을 따질 법의 집행자가 필요했으니까.
“말해. 그러지 않으면 나는 널 돕지 않겠다.”
“미안하군. 말해줄 수 없다.”
“말해.”
“그럴 수 없다.”
“말해.”
“알아봤자―.”
“말해─!!!”
쾅!
제르비아가 테이블을 크게 치며 일어났다.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나 그대로 주저앉았다.
“말해라! 카인! 너는 항상 내게 ―!”
격앙된 감정 탓에 그녀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짙은 분노와 흥분으로 가슴과 어깨가 위아래로 급격히 오르내렸다.
그녀가 마저 말을 뱉었다.
영혼을 쥐어 짜내듯 몹시 힘겹게.
“…너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동맹이라 하나 일방적인 지시만을 내렸지.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어떠한 협의도 없이.”
카인은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서진 테이블을 흘긋 보다가 말했다.
“미안하군.”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고, 더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점이 제르비아를 더욱 화가 나게 만들었다.
“설명을─!”
울컥거리는 감정에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외침이 울리고 있었다.
모두 설명하라고.
지금 이 상황도.
수도에 떠도는 소문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라고.
그때 카인이 입을 열었다.
“제르비아.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크겠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제르비아가 급히 숨을 삼켰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내 목숨을 네게 주겠다.”
차분히 준비한다면 혼자 힘으로 황제를 암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연회장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에는 제한이 있었고, 황제의 호위를 뚫기 위해서는 제르비아와 같은 강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네게 내리는 마지막 지시이자.”
카인이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눈빛으로 제르비아를 응시하다,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다.”
***
“그래. 내 부탁대로 방주의 나머지 인원을 채웠군. 자네가 추천한 이들이니 추가적인 검증은 필요 없겠지.”
황제는 멀어지는 제르비아를 보며 말했다.
카인이 추천한 인물은 경찰청의 자비르 치안국장과 마탑의 엘렌 교수 두 사람이었다.
“둘 모두 뛰어난 인재입니다. 결코 폐하께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연회장엔 속속들이 사람들이 도착했다.
표면적으론 ‘연회’지만 실질적으론 황제의 ‘긴급 호출’과 다름없는 자리기에, 모두 업무를 내려놓고 달려온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요한 남작님도 간만에 뵙는군요. 조만간 국경에서 다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아벨 황자님. 레지스탕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그중엔 국경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벨은 의문이었다.
‘급박한 전시 상황임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 나까지 호출하시다니.’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자는 황제였기에, 먼저 의문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저 무언가 일이 벌어졌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황제는 연회장 입구에서 방문객 모두에게 유도신문을 던졌고, 카인은 옆에서 그들의 ‘배신자 유무’를 은밀히 알렸다.
잠시 방문객이 끊긴 타이밍.
황제가 카인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몇 명인가?”
“312명이 지났고, 그중 14명의 대답은 거짓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썩은 부위가 크군. 연회 시작 후 한 번에 도려내도록 하지. 카인이 숨어 있는지는 자네가 연회 때 저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알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방문객이 계속 지나고.
마지막 차량 두 대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이는 바이퍼 후작과 라이티노 장로였다.
바이퍼 후작이 먼저 다가와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부르심에 달려왔습니다. 폐하. 수도에 떠도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설마 내부에서 정보가 샌 것이….”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황제와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눈 바이퍼 후작은 연회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카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
“…….”
바이퍼 후작은 혼란스런 눈빛이었다.
레지스탕스가 여신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소문은 그 역시 들은 상태였다.
‘복원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배신자는 분명 라이티노 장로. 혹은 사라진 제라트 청장. 그도 아니면….’
요한 키리프.
폐하께서 이 젊은 천재에게 복원 마법에 관한 것까지 이야기하셨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이따 안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후작님.”
카인은 후작의 눈빛에 어린 긴장감과 경계심을 놓치지 않았다.
이후 도착한 라이티노도 황제와 대화를 나눈 후 카인을 지나쳐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일이 커졌군. 폐하께 들은 게 있나?”
“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시지요.”
바이퍼와 라이티노가 사라지고.
연회장 입구에는 황제와 카인만 남았다.
“어떤가.”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대답하는 카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배신자입니다. 두 사람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