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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한 천재마법사-220화 (215/227)

#220. 마지막 연회 (1)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그래. 이 정도 여흥은 있어 줘야겠지.”

황제는 보고서를 구겼다.

말과 달리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탁.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까마득히 아래 작은 크기로 보이는 차량과 건물들.

허나 황제의 시선은 수도의 풍경에는 닿지도 않고 곧장 지평선 끝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벽’이 보였다.

1황자 아벨이 지키고 있는 국경 지대였다.

보고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전에 퇴각시켰던 레지스탕스가 다시 국경 지대에 나타났으며, 재정비를 마친듯한 모습이라는 보고였다.

아니.

단순히 재정비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어떤 세력의 지원을 받았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첨단 공성 무기를 가지고 나타났다고 하니까.

“…….”

덕분에 아벨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공성 무기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벨은 뛰어난 기사인 동시에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벽’의 이점을 살려 수성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레지스탕스 측의 지휘관인 ‘T'가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분명 지난 전투에서 사망한 걸로 보고되었음에도.

“불과 이틀 만에 외벽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했지. 난 놈이긴 하군.”

황제는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을 흘긋 보았다.

레지스탕스에 목숨을 걸고 잠입한 요원이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중심에는 레지스탕스에게 지휘를 내리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T였다.

전장의 열기 탓에 투구를 잠시 벗은 모습이었다.

흑발에 푸른 눈동자.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얼굴이었다.

“카인이라.”

제라트가 벽 바깥에서 운용하던 범죄조직 블루서펜트의 전 간부였다.

언젠가 제라트에게 보고를 받았고, 모든 간부들의 프로필을 한 번씩 본 적이 있었다.

“분명 T가 카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물론 변용 마법을 사용한 가짜 카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카인 행세를 하여 얻을 이득이 보이지 않았다.

가짜보다는 진짜일 확률이 높았다.

“제라트는 사라졌다. 그리고 카인이 나타났지. 카인이 제라트를 죽였다. 자신을 버린 보스에 대한 복수로. 흐음.”

황제는 가만히 추리를 이어나갔다.

퍼즐 조각은 맞춰질 것 같으면서도 맞춰지지 않았다.

“만약 그게 맞다면 벽 내부 인사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겠지. 제라트가 누군가에게 단독으로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책상에 놓여 있던 종이 하나가 허공을 날아 황제의 손에 빨려들었다.

「황제에게 전한다. 현재 진행 중인 모든 계획을 중단해라. 그렇지 않을 시 방주의 존재를 세상에 퍼트리겠다. 답신은 내일까지 받겠다.」

“이런 개짓거리를 하는 걸 보면.”

레지스탕스의 전령이 아벨에게 전달한 메시지였다.

정보가 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가장 최근 프로젝트에 합류한 요한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레지스탕스는 메시지 전달 직후 황야에 있는 여신상을 포탄으로 파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아벨은 ‘이해 불가능한 행동’으로 보고를 올렸지만, 황제는 그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계획을 중단하지 않으면 마법진을 망가트린다는 뜻이겠지. 아둔한 것들. 마법진을 이루는 여신상의 개수가 몇인 줄 알고. 수백 개를 부숴도 마법진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것을.”

어쨌든 요한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났다.

단순히 그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감 때문은 아니었다.

정보의 차이였다.

‘방주’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만, ‘복원 마법’의 구동 원리를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황제 본인을 포함하여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았고, 요한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마탑의 라이티노?

방주 설계의 총책임자 바이퍼?

아니, 어쩌면 사라진 제라트가 배신을 했는지도 모른다.

“…뭐, 상관은 없는 일이지. 계획은 차질 없이 실행될 테니까. 그 전에 방주에 숨어든 쥐새끼를 잡아야겠지만 말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황제가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음을.

***

황제가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받아든 그때.

카인은 47번 구역 슈프림 시큐리티 본사 건물의 통신실에 있었다.

“공성 무기를 사용해 외벽을 계속 공략하도록. 국지전에는 응해줄 필요가 없다.”

「예. 알겠습니다.」

통신실에 있는 인물도 카인.

통신 장치 위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인물도 카인이었다.

카인은 카인과 대화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변용 마법을 사용해 ‘카인’으로 위장시킨 ‘T’와.

홀로그램 속 카인.

T는 감격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하도록. 나는 그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숭배해오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기에, 흥분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T를 보며 카인이 가만히 물었다.

“나를 만나 기쁜가.”

「예. 당연합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본래 이름 없는 조직의 말단이었습니다. 큰 조직 간의 전쟁 중 카인 님 덕에 목숨을 구했고, 이후 카인 님처럼 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47번 구역에서 카인의 행적이 끊긴 후.

레지스탕스에 들어가 카인 행세를 했다.

그러면 진짜 카인이 나타나리라 생각하고.

이렇게 직접 진짜 카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 예상은 적중한 셈이었다.

「협곡에서 저희를 퇴각시키고 이후 연락이 없으셨을 때 사실 버림받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카인 님은….」

“말이 많군. 부하들 앞에서는 말을 줄이도록 해라.”

「아. 주의하겠습니다.」

카인은 공성전과 관련한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후 통신을 마쳤다.

그리고 집무실로 이동해 다른 한 사람을 호출했다.

끼익─

“니히체 님을 모셔왔습니다.”

이십 대 초중반의 젊은 남성이 경비들에게 양팔이 붙들려 집무실로 들어왔다.

끼익─ 탁.

경비들이 나가고.

젊은 남성은 카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왼손을 황급히 등 뒤로 감췄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다섯 자리엔 모두 ‘기계’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프로이드에게 수술은 잘 받은 모양이군.”

“나, 날 어쩌려는 속셈입니까?”

니히체 간트.

거대 여신상이 있던 33번 구역에서 사이비 종교를 꾸려 교주 행세를 하던 인물이었다.

33번 구역에서의 상황이 종결된 후 47번 구역으로 이송되어 ‘감금’ 생활을 지속하고 있던 상태였다.

“내, 내 오른쪽 손가락도 모두 잘라낼 겁니까? 그때처럼?”

“그럴 생각은 없다. 당시엔 심문에 불응했기에 잘라냈을 뿐이지.”

카인이 한 걸음걸이를 좁혔다.

니히체가 한 걸음걸이를 벌렸다.

“다, 다가오지 마! 응…?”

예상과 달리 카인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테이블 소파에 앉아, 맞은편 자리를 눈짓하며 말할 뿐이었다.

“앉지.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

잠시 망설이던 니히체는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자신의 신변은 이 남자의 손짓 한 번에 좌우되기에, 저항은 무의미하단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30, 40, 50번대 구역 일대에 소문을 내주었으면 한다.”

“소문… 말입니까?”

“세계는 28일 뒤 멸망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방주에 탑승해 생존할 수 있다. 기한은 2주 내. 해당 구역에 거주하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도록. 전과 같이 종교를 만들어도 좋다. 네가 가진 선동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던 니히체는 곧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교단과 관련된 일입니까?”

“눈치가 빠르군. 너도 황폐화된 땅이 복원되지 않는 이유가 여신상 때문임은 알고 있겠지.”

니히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의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의 실종을 파헤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또한 네 아버지는 교단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지.”

“…맞습니다. 교단의 비밀을 파헤치다 입막음으로. 일기장에 그리 쓰여있었습니다.”

다만 여신상이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주원인이며, 그곳에 마나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 이상은 알아내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이야기해줄 수 없다. 다만 이 일이 끝나면 교단은 무너진다. 네가 원하던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셈이지.”

“…….”

니히체는 한참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가는 듯 보였다.

“…알겠습니다. 당신 말에 따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이곳에 갇혀 지내며 알게 된 사실들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왠지 당신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

“무엇보다 제 목숨은 당신 손에 쥐어져 있어 선택권은 없는 셈이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지시 사항과 필요한 자료를 건네준 후 니히체를 돌려보냈다.

똑똑.

「수도의 저택에서 통신이 들어와 있습니다.」

직원의 목소리.

통신의 내용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다.

황제의 호출이리라.

지금쯤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수도로 복귀한 카인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카인은 황제가 건넨 보고서와 첨부 자료를 훑었다.

“…정보가 새었군요.”

“내 생각도 그러하네.”

“500명 가까이 되는 인원 모두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같은 생각을 품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든 모양일세. 계획에 균열이 생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니.”

황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체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정보 누출의 범인이라면 이렇게 완벽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요한은 마법진의 존재를 알고 있지 못했기에,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고 있기도 했다.

라이티노. 바이퍼. 제라트.

배신자는 셋 중 하나였다.

‘어쩌면 둘 이상인지도 모르지. 프로젝트 실행일 전에 반드시 축출해야 하고.’

배신자를 방주에 태웠다간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몰랐다.

또한 ‘배신자의 축출’은 프로젝트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던 실무자가 사라짐을 의미했다.

요한을 곁에 더욱 가까이 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라면 주인 잃은 실무를 단번에 넘겨받을 수 있을 터였다.

“탑승자 명단은 모두 보았을 걸세. 가장 의심 가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단서가 부족해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요소만을 보고 판단하자면….”

카인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의 날카로운 추리에 황제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선상이 비어있었다면 방금의 추리를 토대로 수배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그럴싸하군. 만약 라이티노 장로와 바이퍼 후작. 그리고 사라진 제라트 청장 중에 꼽자면 누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나?”

카인은 일부러 잠시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려운 문제군요. 모두 배신을 할 이유가 없는 인물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꼽자면―.”

카인은 가장 의심되는 인물로 경찰청장을 지목했다.

의문의 실종과 같은 몇 가지 정황적 증거를 제시했지만, 상황을 종결짓기엔 빈약한 증거였다.

“자네 생각은 그렇구만.”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실망감을 드러냈다.

“폐하께서는 세 사람 중 한 명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러하네.”

“그렇다면 단순히 그 한 명만을 골라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탑승 인원 중 공모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 말을 하려는 건가?”

“맞습니다. 방주를 띄우기 전 그들 모두를 솎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네. 그래서 탑승 명단을 완전히 새로 짜는 것도 고려하고 있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근한 기대와 의문이 떠올랐다.

“방법이 있는가?”

“예. 방주의 탑승자 전원을 한 자리에 불러주십시오. 구세계에서의 마지막 연회라는 명목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카인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상대의 눈을 보고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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