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방주 (2)
카인은 황제를 따라 본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랑을 걸었다.
양옆으론 기사들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었다.
마치 출입을 감시하는 파수꾼처럼.
석상과도 같은 부동자세로.
“원래 율리아는 방주에 태울 생각이 없었네. 하지만 자네 덕에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된 것 같더군.”
황제가 방주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는 걸로 보아, 그들 역시 탑승 인원으로 내정된 것으로 보였다.
“보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나? 가능한 선에서 들어주겠네.”
“위대한 계획에 동참시켜주신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자네는 늘 겸손하군.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들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중에 언제든 얘기하게.”
“알겠습니다.”
회랑 끝에는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문이 존재했다.
버튼을 누르자 작은 기둥이 올라왔다.
휘릭!
황제는 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다.
기둥 위 센서에 핏방울을 떨어트리자 문이 열렸다.
나타난 것은 엘리베이터였다.
“가지. 신세계를 향한 여정의 출발지가 될 걸세.”
엘리베이터 버튼에는 별다른 숫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삑. 삐빅.
황제가 특정 순서로 버튼을 조작했고, 카인은 그 과정을 모두 머릿속에 담았다.
위잉─
엘리베이터는 하강을 시작했다.
통유리 너머로는 칠흑과 같은 색깔의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어느 순간 통유리 너머에 벽이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감상이 어떤가?”
“…이건 정말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군요.”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곳곳에 달린 수백 개의 조명이 본디 공동을 덮었어야 할 어둠을 쫓고 있었다.
하얀 연구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부품을 운반하고 있는 무인 차량 같은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카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공동 중앙에 위치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언가였다.
“저것이 ‘방주’군요.”
“맞네.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이자 도시가 될 걸세.”
“외형에선 언뜻 배가 연상됩니다만. 후작의 말로는 대륙의 복원이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 머무를 것이라 들었습니다.”
“하하! 배라. 모양만 봐서는 그렇게도 보이겠군. 하지만 잘 보게. 하단에 비행을 위한 추진부가 달려 있지 않나?”
방주는 단순히 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황제가 말한 ‘도시’에 미치지는 못하나, ‘마을’ 정도 크기는 충분히 될 것으로 보였다.
외피는 미스릴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되는 은회색 금속으로 이루어져, ‘전함’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엘리베이터가 계속 하강하며 시야에 담긴 방주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저렇게 거대한 운송 수단이 하늘에 뜰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군요.”
“라티움의 기술은 이미 시대를 앞섰네. 세상에 공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위잉― 덜컹!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앞쪽에 이동로가 나타났다.
긴 발판과 같은 형태였다.
“발밑을 조심하게.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껄껄. 뭐, 부유 마법 정도야 당연히 사용할 수 있겠지만.”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평소와 달리 자주 웃는 모습을 보였다.
공동 중간점 정도의 높이로, 아래에 위치한 연구원들은 여전히 작게 보였다.
“난간은 보이지 않는군요.”
“어차피 나만 사용하는 길인데. 굳이 필요하겠나?”
예상대로 이곳은 황제의 전용 출입로였다.
연구원들은 다른 통로를 통해 지하 공동에 진입했으리라.
황제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카인은 뒤를 따르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동로 끝에 위치한 구체 형태의 기계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계 장치에서 뻗어 나간 수 개의 관은 각기 공동 천장과 바닥, 그리고 방주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나 탱크일세. 대륙 전역에서 흡수된 정기는 마나로 변환되어 이곳으로 전송되지. 지금은 전송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말이야.”
황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주의 가동.
복원 마법의 발동.
그에 필요한 모든 마나가 담겨 있는 저장고.
“…….”
카인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황제 역시 걸음을 멈추고, 카인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역시 자네구만. 눈치챘나?”
“…보안 장치인 것 같군요.”
“맞네. 마나 탱크에는 오직 나만이 접근할 수 있네.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는 녀석이 없을 거라 생각해 별다른 장치를 두지 않았었지.”
황제는 품에서 만년필 하나를 꺼내 염동으로 허공에 띄웠다.
“하지만 연구원 중 하나가 마나 탱크에 접근해 장난질을 치려 했던 이후론 이런 장치를 마련했네.”
염동에 밀린 만년필이 허공의 한 부분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파지지지─!
앞부분부터 시작해 가루가 되어 갈려 나갔다.
곧 만년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뭔지 알겠나?”
“풍(風)계 원소를 촘촘히 깔아 정지 상태처럼 보이게 만든 함정으로 보입니다. 웬만한 이들은 당할 수밖에 없겠군요.”
“정확하네. 내가 직접 공들여 설치했네. 필생의 역작이라 할만하지.”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카인과 자신의 주위에 방호를 두르며 말했다.
“원소 배치가 일반적인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게 복잡하지. 나조차도 해제가 불가능하네. 다만 방법이 있지.”
저벅.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방호가 그를 중심으로 이동했고, 카인이 곁을 따랐다.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방호 표면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마법을 견딜 수 있는 출력의 방호를 전개하면 되네.”
“…폐하 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겠군요.”
카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함정의 위력을 가늠한 결과.
가진 모든 마나를 쏟아 방호를 사용해도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건 마탑의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카인은 ‘마나 탈취’라는 자신의 목표를 상기했다.
‘지하 공동의 출입과 함정의 해제. 혹은 돌파. 해결할 것은 이 정도인가.’
일이 쉽게 풀릴 거라 예상하지는 않았다.
황제 역시 그 누구보다 치밀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요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파고들 틈은 존재하는 법이었고, 시도 가능한 몇 가지 수가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파지직! 츳!
두 남자가 ‘바람의 벽’을 통과하자 스파크와 굉음이 멎었다.
마나 탱크 바로 앞에 다가선 황제가 센서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대지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네. 생명을 잉태하는 만물의 근원임은 물론, 이렇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힘을 주니 말일세.”
우웅─
마나 탱크의 센서와 황제의 반지가 빛을 내며 공명했다.
센서에서 피어오른 오색 찬연한 마나가 황제의 손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반지였군.’
황제의 손가락에 늘 자리해 있던 반지였다.
‘정기’에서 비롯된 마나를 인체에 적합한 성질로 바꾸는 변환 장치.
“흐음.”
마나 흡수를 끝낸 황제는 썩 신통치 않은 얼굴을 했다.
역시 구형 변환 장치로는 한 번에 흡수할 수 있는 마나 양에 한계가 있었다.
정상적인 수련법보다야 훨씬 효율적이지만, 이미 방대한 마나를 갖춘 황제가 단순히 ‘효율적’인 것에 만족할 리 없었다.
“놀랍군요. 후작에게 듣기는 했지만 토양의 정기를 정말 마나 회로를 강화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미약한 양에 불과하네. 변환 장치가 구식인 탓이지.”
황제는 혀를 쯧 찼다.
그리고는 카인을 슬쩍 보며 운을 띄웠다.
“하지만 곧 신형 장치의 개발이 완료되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마나를 늘릴 수 있지. 자네가 찾아낸 설계도 덕이야. 어떤가? 욕심이 나지 않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탱크에 보존된 마나를 흡수하고 싶지 않느냐는 말일세.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지. 세상에 대적할 자가 없을 걸세.”
“…….”
카인은 일전에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높이 사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
자신감 있는 모습은 좋아하되, 그 자신감이 황제 본인에게 향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또 시험을 하려 드는군.’
황제 앞에선 늘 겸손해야 했다.
감정의 동요, 혹은 욕망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순간 황제는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에 맞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욕은 늘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지요.”
“고개를 들게.”
카인은 고개를 들어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황제의 백색 눈동자는 고요했다.
마치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듯이.
정적이 흘렀다.
침묵이 흘렀다.
경직된 공기 속에 긴장이 흘렀다.
‘한결같군.’
카인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고, 황제는 거기서 드러난 것 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고개를 내려도 좋네.”
“예.”
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뒷짐을 지고, 발판 아래 연구원들을 보며 말했다.
“아시모프의 병은 어떤가?”
“치료제는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꾸준한 복용 결과, 증상이 차츰 나아지고 있습니다.”
황제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아시모프의 별채를 찾아 상태를 직접 보지.”
“예. 알겠습니다.”
변용 마법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지금 자신도 황제 앞에서 변용 마법을 사용해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으니까.
다만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건 ‘아시모프’ 행세를 하고 있는 셸링포드의 연기였다.
황제가 아시모프를 직접 본지는 오래되었다.
영면증이 발병한 후로 아시모프는 저택을 나서지 않았고, 황제도 아시모프를 부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시모프는 한때 황위 계승자로 거론되었고, 황제의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즉.
황제가 ‘아시모프’가 가짜임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얘기였다.
‘…몇 가지 준비가 더 필요하겠군.’
황제의 방문 전에 셸링포드를 만나야 했다.
“방주의 정원은 500명이네. 자네를 마지막으로 하여 497명이 채워졌지. 모두 신세계 구축에 필요한 인재들일세. 기술을 갖췄든, 무력을 갖췄든, 학식을 갖췄든. 막대한 부를 기증해 자격을 얻은 자도 적지 않네.
“…….”
“프로젝트의 실행일은 다가오고 있네. 정원을 채우고 싶지만 그만한 인재가 더는 안 보이더군. 자네가 인원을 찾아 채워볼 수 있겠나?”
“기회를 주신다면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망설임이 없어 좋네. 자네가 찾아 추천한 인물이라면 믿을만하겠지. 사람을 시켜 기존 탑승자 명단을 전달하겠네. 신세계에서의 역할군이 정리되어 있으니 최대한 중복되지 않는 인원들로 선정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프로젝트의 실행일은 후작에게 아직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걸 얘기 안 했군.”
황제가 카인을 향해 몸을 빙 돌렸다.
“한 달. 정확히 한 달 뒤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