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방주 (1)
‘일단 최고급 와인을 먹여주지. 진귀한 식물로 가득한 정원을 걷게 만들고. 아로마 향초가 피워진 욕탕에 몸을 담그게 만들어 주마.’
몸이 노곤해지면 저택에 묵고 갈 확률이 높아지고, 그러면 내일 아침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후작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절대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알지 못할 터였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인물이라 해도 살아온 세월에서 오는 연륜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까.
흠칫.
순간 느껴진 오한에 카인은 몸을 돌려 문쪽을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바이퍼 후작뿐 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단련된 감각이 거짓 경고를 울릴 리 없건만.
“문을 잠그셨군요.”
“혹시나 사용인들이 대화의 흐름을 끊을까 봐 그렇네.”
“그렇군요.”
카인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뒤 자리에 앉았다.
후작도 자리에 착석하며 대화는 시작되었다.
“이것부터 개봉하지. 대기자가 많아 몇 년을 기다려 받은 물건이네.”
“67년산 클로모네군요.”
“역시 아는구만! 마셔본 적이 있나?”
“예. 벽 바깥 어느 부호의 저택에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대화 주제는 벽 안쪽의 화제부터 시작해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등 여러 분야를 아울렀다.
두 사람 모두 차분한 어조로, 대화는 언뜻 보기에 매우 잔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유물론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후작님 생각은 그러하시군요. 하지만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관념론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하지만 대화의 수준이 매우 깊어,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여느 열띤 토론이나 논쟁에 뒤지지 않았다.
후작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수도에서 박식함으론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좋은 술과 좋은 대화 상대.
이보다 더 유익하고 유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현재 라티움의 기술 수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후작은 눈을 빛내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라이티노 님의 배려로 라티움을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개발이 완료된 기술 자체에 비해 시제품들은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구만. 시제품과 기술이라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인데 말일세. 내가 1052년 28번 구역에서 말단 마공학사로 일을 할 때….”
후작의 눈이 빛났다.
“…공모전에서 우승해 마공학사들의 꿈의 직장이라 할 수 있는 라티움에 진출했지.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붙어 다니며 취재하고, 후배들은 싸인을 해달라….”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져, 끊고 들어갈 타이밍을 잡기 쉽지 않았다.
때문에 카인은 대화를 주고받기보다는 후작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리는 선택을 내렸다.
“…그런데 17일 만에 초기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았네. 그냥 확 고향으로 돌아 가버리고 싶었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싸구려 와인 6병 들이를 사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물론 말의 내용은 모두 기억하지만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고, 오직 대화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당장의 목표는 황궁 지하에 출입해 구조를 익히는 것.’
황궁 지하에는 여러 종류의 시설이 존재했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연구실.
황궁 전체에 마나를 공급하는 탱크.
거대한 방주가 잠들어 있는 격납고.
카인의 최종 목표는 황제를 제거하고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맞서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했고, 때문에 황궁 지하 탱크의 마나를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위험도가 몹시 높은 일인 만큼 철저하고 신중한 계획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실 라티움의 기술은 자네가 견학에서 본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일세.”
후작이 이야기를 푼 지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기회를 포착한 카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하지만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부가 아니라니. 제가 본 것 이상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카인이 반응을 보이자 후작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보유한 기술을 꼭 세상에 모두 공개해야 하는 법은 아니지.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마법 용품은 마나를 소모하네.”
“충전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기 중의 마나가 흘러들어 느린 속도로 자연 충전이 되거나. 혹은 마법사가 주입한 마나로 급속 충전이 되거나.”
“정확하네. 그리고 어떤 경로건 마나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은 ‘대기’밖에 없는 셈이지.”
쪼르륵.
후작은 카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병을 건네 잔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밖을 보았다.
잠시 흐르는 정적.
커튼을 치자 방 안이 조금 어두워졌다.
후작이 몸을 돌려 카인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마나의 원천이 ‘대기’ 외에도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나?”
“…또 다른 원천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겠군요.”
“맞네. 혁신을 넘어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지. 우리 라티움은 첨단 기술을 통해 마나의 두 번째 원천을 확보했네.”
카인은 짐짓 몹시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런 기술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존재하다마다. 이미 실용화까지 이루어졌지. 황궁 내의 모든 시설은 ‘대기’가 아닌 ‘두 번째 원천’에서 얻은 마나로 작동하고 있네.”
“두 번째 원천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헌데 그 전에.”
카인이 잔을 비운 뒤 말을 이었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티움 내의 기밀로 생각되는데 말입니다.”
“폐하께서 자네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과분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항시 노력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세계의 구원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품고 계시네. 그리고 그 계획을 수행할 일원 중 하나로 자네를 지목하셨지.”
쪼르륵.
자리로 돌아와 앉은 후작이 새 잔을 따랐다.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 중 가장 희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카인 쪽으로 잔을 슥 밀며 말했다.
“계획을 들을지 말지 선택은 자네의 몫일세. 단, 일단 이야기를 들은 후엔 발을 뺄 수 없네.”
후작의 눈빛은 이제까지와 달리 위압적이고도 진지했다.
마치 한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요한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앞으로 자신의 취할 행동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선택은 틀린 적이 없기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니까.
“…….”
카인은 물끄러미 잔을 바라보았다.
백포도주였다.
잔에 담긴 액체는 투명한 백색에 가까웠고, 주위로 달콤한 향을 풍겼다.
‘천장에 2명. 창밖 발코니에 2명. 문밖에 2명인가.’
사방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후작이 창가에 다가가 커튼을 친 것은 미리 배치해둔 인원을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계획을 듣지 않는다 해도 곧장 나를 제거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만일의 사태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겠지.’
카인은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며 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탁!
잔을 잡은 카인이 단번에 술을 목 뒤로 털어 넘겼다.
카인의 목울대가 꿀렁였고, 그 모습을 보는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탁!
잔은 테이블 위로 돌아왔다.
꽤 많은 양이었던 술은 남김없이 비워져 있었다.
“마셔본 것 중 향과 산미가 가장 뛰어난 술이군요. 이런 진귀한 물건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작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지하 저장고에 몇 병이 더 있으니 원하는 만큼 마셔도 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에게라면 그만큼 대접할 수 있지.”
와인 정도야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세계에 단 한 병뿐인 와인을 마신다 해도, 눈앞의 젊은 인재는 신세계에서 그것 이상의 값어치를 해줄 테니까.
카인과 후작은 서로의 잔을 채웠다.
“두 번째 원천은 ‘대기’가 아니라 ‘토양’이네.”
“토양… 일반적인 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확하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대지 말일세.”
“토양에는 별다른 마나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
“엄밀히 말해서는 그렇지. 하지만 토양에는 에너지가 존재하네. 비록 마나는 아니지만, 변환을 거쳐 마나로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이지.”
“…….”
“우리는 그 에너지를 ‘정기’라고 부르네. 만물을 태동하게 만드는 힘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힘이라 할 수 있지.”
정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식생이 자라지 않는 땅은 정기가 부족하다고 말하고는 하니까.
“생명력 그 자체라 보아도 좋네. 사람도 체내에 일정량의 정기를 갖추고 태어나지. 그 양은 개인차가 있는 법이지만.”
“조금 전 황궁 내의 모든 시설은 두 번째 원천에서 얻은 마나로 작동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맞네. 토양에서 흡수한 정기. 그것을 변환해 만든 마나. 황궁 시설의 동력원일세.”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카인이 의자를 당겨 테이블과의 거리를 좁혔다.
대화에 몰입하고 있다는 신호로, 후작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말해보게.”
“현대 과학 지식 상 ‘무에서 유’로의 완전한 창조는 불가능합니다. 사용된 에너지원은 다른 에너지원으로 바뀌기 마련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기가 흡수된 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한 얘기 아니겠나.”
후작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줄지은 빈 병들을 톡톡 두드렸다.
그 많던 술은 모두 비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말라붙지.”
카인은 생각에 잠긴 척 다음 질문에 뜸을 들였다.
“정기를 흡수하고 있는 곳이 벽 바깥입니까?”
“역시 추리가 빠르군. 그렇다고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세. 토양의 정기는 자연적으로 회복되지만 그 속도가 몹시 느리지. 어차피 우리 세대에 정상적으로 이용하지 못할 땅, 조금씩 회복되는 정기를 마나로 바꾸어 이용하자는 생각이네.”
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거대 여신상이 무너져 현재는 마나의 송신이 중단된 상태지만, 이미 황궁에는 충분한 양의 마나가 모여 있네.”
대륙 전체에 세워진 여신상은 사실 토양의 정기를 흡수하는 마법공학 장치라는 것.
“황궁에 있는 마나 탱크에는 이미 십수 년 양의 마나가 축적되어 있네. 폐하께서는 모든 마나를 사용해 대륙 전체 토양의 정기를 일시에 복원하실 생각일세.”
복원 과정에서 대륙 위 모든 생명체의 정기 역시 복원을 위해 쓰일 예정이란 것.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자네와 나를 포함한 선택 받은 이들은 복원이 진행되는 동안 방주에 탑승해 소멸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원래 세상 법칙이 그런 법 아니겠나? 절대다수는 소수를 위해 희생당하는 법이지.”
복원이 끝난 후.
지상 낙원이 된 대륙에서 새로운 문명을 재건할 계획이란 것.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카인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그 모습에 후작은 오히려 만족할 수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놀랍긴 하지만…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폐하께서도 자네를 따로 부를 걸세. 방주를 직접 견학시키고 신세계에서의 역할을 부여한다고 하시더군.”
후작은 프로젝트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전달했고, 카인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과 대답.
궁금증과 궁금증 해소의 반복.
어느새 다시 한번 가져온 술도 바닥을 보여갔다.
“저는 슬슬 일어나봐야 할 것 같군요.”
“버, 벌써 가는 건가? 나와 더 이야기를….”
“가슴 설렘을 참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프로젝트 실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업체를 비롯해 서둘러 정리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군요.”
“그래도 오늘 하루쯤은….”
후작이 몹시 아쉬운 표정을 했지만 카인은 단호했다.
저택 출입문 앞.
카인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위대한 계획에 동참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할 분은 내가 아니라 폐하일세. 모든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해오신 분이니.”
끼익─.
차량 한 대가 카인 앞에 도착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카인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차량 뒷좌석에 탑승했다.
탁.
차량이 저택에서 멀어지는 동안 미소는 점점 옅어졌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카인의 얼굴엔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
에스텔은 백미러로 카인을 흘끔거렸다.
평소에도 차가운 얼굴일 때가 많은 그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의 호흡에 따라 차량 내의 원소 농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겠어.’
분노였다.
저택에서 있었던 어떤 일이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카인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오랜 시간 함께 지낸 그녀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잠깐 차를 세우지.”
끼익.
인적이 없는 공원이었다.
카인은 차에서 내려 풀숲으로 향했다.
에스텔은 급히 숨을 몰아쉬는 동시에, 걱정스런 얼굴로 카인의 뒷모습을 좇았다.
우욱─!
카인은 입에 손가락을 넣어 속을 게워냈다.
저택에서 마셨던 와인을 모두 토할 때까지 반복하여.
어느 정도 만족스런 선까지 속을 비웠는지, 카인은 손수건을 꺼내 입가와 손을 닦았다.
화륵.
그리고 그대로 공중에 띄워 불태웠다.
차량에 돌아온 카인에게 에스텔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후작과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와인이 형편없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