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경연 (4)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고위 귀족들은 카인이 도전자의 의견을 받아치고 분위기를 장악하는 방식에 흥미를 보였으며.
비교적 계급이 낮은 귀족들은 절대 적으로 만들면 안 될 이의 목록 상단에 요한 키리프라는 이름을 추가했다.
“하하하하!”
소란과 혼란 속.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의 발원인을 확인한 사람들은 급히 입을 다물었고, 곧 장내엔 웃음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황제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기존의 틀을 깰 필요가 있다고. 거친 방법을 사용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더라도.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야.”
변화와 혁신.
그것은 황제가 평소 삶의 이념이자 기치로 삼아온 두 단어였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게끔 나침반 역할을 해줘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먼 옛날, 선조들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대륙은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었다.
‘과욕이었지. 한순간의 오만과 욕심으로 번영이 약속된 미래를 날려버렸으니. 쯧.’
선조들의 실수를 바로 잡는 것.
그래서 대륙을 다시 약속된 풍요의 땅으로 되돌리는 것.
황제가 가진 삶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위한 어떤 사명감의 발로이거나, 선조들의 잘못에 대한 후대로서의 채무감 따위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인적인 욕심이자 효율성의 문제에 가까웠다.
벽 안쪽의 땅은 비교적 풍요롭다 할 수 있으나, 대륙 전체에 비하면 채 1퍼센트조차 되지 않는 크기.
즉, 나머지 99퍼센트의 땅은 낭비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토양의 척박함 때문에 활용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황제의 시선은 정확히 카인에게 향해 있었다.
‘재미있군. 나와 가치관이 이토록 비슷할 줄이야.’
거친 방법. 누군가의 희생.
그 말이 황제의 마음을 잡아챘다.
대륙 토양의 정기가 자연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정상 수준까진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일 터.
자신이 죽은 다음 토양의 정기가 돌아온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때문에 황제는 황위에 오르기 전 황태자 시절부터 ‘신세계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토양의 정기를 정상 수준을 넘어 ‘비옥함’ 수준으로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프로젝트 실행과 동시에 소멸할 것이다.
방주에 탑승한 선택 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남김없이 모두.
본디 열등한 자들은 우등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 과연 영광스런 희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신세계의 주민으로 누구보다 적격인 자가 눈앞에 있었다.
가치관과 가진 바 능력.
둘 중 어느 부분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바셀! 경연의 기본 조항이 무엇인가!”
뒷짐을 지고 대련장으로 걸어나가며, 황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질문을 받은 심판 역시 황송하다는 투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 예! 마법을 사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입니다! 참가자는 이 과정에서 서로 상해를 입을 수 있음에 동의합니다!”
“사용하는 마법에 제한을 두는 조항이 있는가!”
“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대련장 가운데 도착한 황제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들었는가! 마법의 종류와 그 활용에 대해서는 따로 제한을 두고 있는 조항이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낡은 골동품에 불과한 관습에 얽매여 승부에 불복하고 있단 말인가!”
호통과 함께 황제의 몸에서 백색 마나가 뿜어졌다.
대기 중의 원소 농도가 종류를 불문하고 급격히 높아졌고, 마나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자들은 안색이 파리해졌다.
“모두 부끄러운 줄 알라!”
이어진 두 번째 호통.
“크윽.”
“흐읍!”
무릎을 꿇거나 호흡 곤란이 와 숨을 헐떡이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시선을 돌렸다.
카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양, 평온한 기색으로.
“흥미로웠네. 율리아를 경연에 참가시킨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이런 식의 전투 방식을 선보인 것은 한 차례 더 예상 밖이었지.”
“폐하께 여흥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깨닫고 감탄한 바도 있었네. 나 역시 타성에 젖어 경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가 그걸 깨트렸군.”
황제는 자애로운 얼굴로 카인을 바라보다 좌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먼저 돌아가지. 가장 흥미로운 경기를 보았으니 나머지는 볼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모두 자리를 즐기다 돌아가게.”
그리고는 대련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도착해 바이퍼 후작에게 무언가 귀엣말을 하고는, 차를 타고 연회장을 떠났다.
부아아─
황제가 떠난 뒤에도 장내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
“…….”
경직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로 쭈뼛쭈뼛 눈치를 보다 한 사람이 말을 뱉었다.
“당연히 율리아 황녀님의 승리죠. 그, 그렇죠?”
그것을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태세를 전환해 한 마디씩 덧붙였다.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변화라니. 멋진 말이네요.”
황제가 승부의 결과를 공식으로 인정하며, ‘관례’와 ‘전통’을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치부를 감추려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변화’에 ‘혁신’을 주제로 대화에 열을 올렸고.
악단의 연주가 재개되며 어색한 분위기는 어찌저찌 풀어져 갔다.
진행 요원들이 엉망이 된 대련장을 정리하는 가운데.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요. 흐끅!”
주저앉아 엉엉 우는 세레나.
카인은 바이퍼 후작이 있는 테이블 쪽을 흘긋 보았다.
‘황제가 남기고 간 말이 꽤나 의미심장했나 보군.’
바이퍼 후작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딸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이럴 순 없다니. 뭐가요?”
어느새 다가온 율리아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나도 좋은 교사가 있었으면 더 잘 싸울 수 있었어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마법을 막 배운 황녀님이 날 이길 수 있어요. 나한텐 마법밖에 없는데― 마법밖에― 흐끅!”
율리아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좋은 교사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니.
요한의 교습이 특별했음은 인정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경연에서 승리하기는커녕, 평생 간단한 마법조차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노력 안 했다는 말은 아니라고. 내가 얼마나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연무장에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데.’
율리아는 다시 힘을 주어 단검을 움켜쥐었다.
“머리 자른다고 했죠. 그거 지금 자를게요.”
“흐끅! 나도 좋은 교사가 있었으면, 더 좋은 교사가 있었으면─!”
율리아는 염동을 사용해 세레나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띄웠다.
“인정하는 버릇 좀 들여요. 마음 같아선 다 밀어버리고 싶지만 단발 정도로 봐주는 거니까.
그리고 단검이 허공에 선을 그리는 순간.
텁!
단검은 머리카락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 멈췄다.
카인의 손이 검날을 붙잡고 있었다.
“손! 손! 아… 괜찮구나.”
율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카인의 손에 둘려진 마나를 보고 안도했다.
정신없이 울던 세레나도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놀란 눈을 했다.
“이거 놔요. 난 얘 머리를 잘라야겠어요. 내기했단 말이에요.”
율리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단검을 빼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카인의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내 권리예요. 그걸 빼앗을 생각이에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상관없어요. 내 성격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
율리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카인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뭐, 뭐예요.”
당황한 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벽 바깥에선 이보다 더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들과 마주하게 되실 겁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감정에 휘둘리실 생각입니까.”
“…….”
머리가 차게 식는 말이었다.
카인은 율리아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단검을 스르륵 빼내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배가 고파졌어요. 뭘 좀 먹으러 갈래요.”
율리아는 흥이 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쪽으로 사라졌다.
카인은 몸을 돌려 아직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세레나 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카인은 앞으로 바이퍼 후작과 교류가 시작되리라 직감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행동을 막아선 이유였다.
후작의 딸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승부란 것은 때론 승리할 때도 있고 때론 패배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세레나 님 역시 충분히 실력 있는 분이니, 승부의 결과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레나는 카인의 얼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말의 내용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상대가 자신을 극악무도한 악녀의 단검으로부터 막아준 장면만이 재생되고 있었다.
“…….”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카인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전투의 긴장이 덜 풀린 탓이리라.
분명히. 아니, 어쩌면 아마도.
…아마도?
***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인은 모자를 벗어 고개를 꾸벅이며 저택을 둘러보았다.
과연 바이퍼 후작의 명성에 걸맞는 대저택이었다.
“와인에 기호가 있다 해서 콜렉션 중 몇 개를 빼어 놓았네. 안으로 들어가지.”
“예. 후작님께서 와인에 조예가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함께 자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인은 계단 뒤쪽에서 빼꼼 내밀고 있는 세레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숨어버렸다.
“세레나 님도 계셨군요. 사교 활동이 잦아 저택에 잘 계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경연이 끝나고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네. 사용인들 말로는 무슨 편지를 수백 장 썼다 지웠다 하고 있다는데, 잘 모르겠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 나이대 아이들이야 생각과 행동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그보다 이쪽으로 오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네.”
탁. 탁.
후작은 발걸음에서 신이 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 오늘 만남의 가장 큰 목적은 요한에게 ‘신세계 프로젝트’에 대한 언질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의 실행일과 방주까지만 얘기하면 될 걸세. 방주를 보이는 건 내가 요한을 궁으로 불러 직접 하도록 하지.」
황제가 직접 선별한 인물이니 요한의 자질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만, 요한에 대한 자신의 인상 역시 그러했다.
‘그렇다 해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있겠지. 혹시나 겁먹고 달아나는 일이 없어야 하니까. 우선 마법공학 이야기로 천천히 분위기를 풀고….’
마법공학.
생각만으로 온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단언컨대 마음 맞는 상대만 있다면 사흘 밤낮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자신이 있었다.
「마법공학? 아버님. 요즘 누가 그런 걸 배워요? 방에서 기계만 만져야 하잖아요. 촌스러워요. 아름답지 못해요.」
「…….」
「그리고 아버님은 관심 분야에 대해 얘기할 때 말이 너무 많아요. 과해요. 어떻게 사용인을 붙잡고 7시간 동안 얘기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용인들이 아버님만 보면 피해 다니죠.」
딸을 마공학도로 키우려다 실패한 전적이 있긴 했지만.
‘크흠. 요즘 젊은 애들은….’
하지만 요한은 달랐다.
마법공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깊은 관심까지 보였다.
흐뭇한 시선으로 카인을 흘끔거리던 후작은 서재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자, 여기일세.”
끼익─.
왼쪽 벽면은 마법공학과 관련된 서적들로.
오른쪽 벽면은 와인 저장고로 꾸며진 서재였다.
가운데 놓인 묵직한 인상의 테이블엔 이미 십수 개의 와인병과 그에 맞는 종류별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멋진 서재군요. 후작님이 취향에 잘 반영된 것 같습니다.”
“후후. 그런가.”
서재를 거니는 카인을 보며.
끼익─ 탁.
문을 걸어 잠갔다.
힘들게 찾은 말벗, 아니, 신세계의 주민 후보가 달아나는 일이 없도록.
후작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