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경연 (3)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율리아를 보며 세레나는 당황했다.
“자, 잠깐! 지금 무슨…!”
경기를 관람하던 사람들도 충격을 금치 못했고, 곧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저, 저분 황녀님 맞지?”
“몸놀림으로 보아 강화 마법을 사용하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엄밀히 말해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다만 관례적으로 원거리에서 승부를 겨뤄왔기에, 율리아의 행동은 충분히 돌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휙!
경기를 중단해야 하는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심판이 상황에 대한 모든 명령권이 있는 인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황제는 별다른 지시를 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판은 경기를 속행시키기로 결심하고 대련장 밖으로 황급히 물러났다.
‘붙어서 승부를 보겠다는 거야? 정면으론 승산이 없으니까?’
세레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화가 났다. 분노가 치밀었다.
콧대를 눌러줘야 한다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굳어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피해? 아니면 마법으로 막아? 방호 마법을 사용하면….’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경연 준비를 할 때도 마법의 ‘빠른 시전’과 ‘파훼’ 연습만 하지 않았던가.
또한 율리아의 접근 속도가 너무 빨라 여유롭게 판단을 내릴 틈이 없었다.
쐐애액─!
결국 세레나가 선택한 수는 완성된 얼음송곳을 퍼붓는 것이었다.
‘자, 잠깐. 너무 진심으로 공격했다가 다치면…!’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력을 다해 날린 송곳들은 상대의 옷자락 한 번 스치지 못하고 바닥에 부딪쳐 깨져 나갔다.
탁!
거리를 좁힌 율리아가 바닥을 박차고 크게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관람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햇살 사이.
율리아가 역수로 쥔 단검의 날이 반짝였다.
그녀의 싸늘한 얼굴에선 독기가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는다고…? 내가…?’
세레나는 온몸에 오한이 돋으며 손발이 덜덜 떨려오는 걸 느꼈다.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는 자의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살고 싶어.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본능이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급박하게 사용한 방호 위로 단검이 낙하했다.
끼기긱! 파직!
“꺄아악─!”
완성도 낮은 방호는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단번에 깨져버렸고, 세레나의 몸이 그 충격으로 뒤편 멀리 튕겼다.
먼지투성이가 된 드레스.
볼썽사납게 바닥에 쓰러진 모습.
사람들은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을 했다.
그건 공격을 당한 세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 이렇게 싸우는 게 어디있─!”
곧바로 이어진 율리아의 공격.
세레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급히 바닥을 굴렀고.
콰득!
그녀가 있던 자리에 단검이 내리 찍혔다.
단검은 거기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먹잇감을 쫓아 움직였다.
콰득!
“꺄악!”
콰득!
“꺄아악!”
세레나는 계속 몸을 굴렀다.
어찌 방호를 사용해도 금세 깨져버렸고, 공격 마법을 날려도 빗나갈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명중시켜온 것은 집안 연무장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표적’ 뿐이었으니까.
더구나 율리아는 현재 기사 학교의 여느 우수생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세레나의 드레스가 찢겼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하지만 체면 따위를 챙길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득.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적응되자 처음의 공포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을 갓 배운 건 율리아인데, 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건 자신인지.
‘마법을 제대로 완성하기만 한다면 이런 공격쯤은…!’
세레나의 생각은 사실이었다.
쌓아온 마나의 양 자체가 달랐다.
높은 출력의 방호를 사용한다면 율리아는 세레나의 방어를 결코 뚫을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방호 안에서 안전하게 다른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데…!’
물론 가정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율리아의 공격으로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으니까.
차선책으로 똑같이 강화 마법을 사용했지만, 카인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율리아의 몸놀림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아― 하아―
마나는 회로에 차고 넘쳤다.
하지만 사용할 틈이 없었고, 반대로 체력은 급격히 바닥을 보여갔다.
파직!
율리아의 단검이 방호를 깨부수며 허공에 매서운 선을 그렸다.
대련장 바닥이 깨지며 일어난 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정적.
모두가 숨을 죽였다.
천천히 먼지가 걷히고.
이윽고 두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세레나.
그 위에 올라타 세레나의 목덜미에 단검을 겨누고 있는 율리아.
“움직여봐요. 그럴 용기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율리아가 속삭였다.
그녀로서는 첫 전투였다.
짜릿한 흥분감과 승리의 고양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허무할 정도로 손쉬운 승리였다.
요한과 여러 상황을 가정해 훈련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스, 승자는 율리아 프나함 2황녀님입니다!”
황제의 눈치를 보던 심판이 율리아 쪽으로 깃발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율리아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레나에게서 떨어졌다.
“부, 분명 제압당한 건 세레나 님이긴 한데.”
“저걸 마법으로 이겼다고 볼 수 있나…?”
사람들은 쉽게 다른 경기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머리로는 규칙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경연의 ‘품위’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비서에게 받은 코트로 몸을 가린 세레나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이건 무효예요!”
대련장 밖으로 나가던 율리아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무효라고요?”
“경연에서 이런 식으로 승부를 보는 게 어딨어요? 장비도 스태프나 완드가 아니라 그런 날붙이 따위를 사용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기세가 등등해져 율리아에게 쏘아붙였다.
“마법으로 실력을 겨루는 게 경연의 목적이잖아요? 율리아 님의 방식은 마법사의 것보다는 기사의 것에 가까웠어요. 다른 참가자들도 강화 마법을 몰라서 사용 안 한 게 아니라구요.”
“…….”
율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관람석을 보니 대부분 세레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경연 결과가 어찌 되든 상관없는 고위 귀족들은 이채 어린 시선으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고.
「황녀님의 전투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딱 요한이 얘기했던 그대로네.’
적절한 때가 되면 자신이 나설 것이라 했다.
율리아는 카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바이퍼 후작 역시 카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고, 일시에 장내 모두의 시선이 카인에게 쏠리게 되었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대련장 위로 걸어나갔다.
율리아와 세레나 사이에 선 카인이 관람석을 향해 말했다.
“승부의 결과에 이견이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군요. 불만이 있다면 황녀님의 교습을 책임졌던 제게 지금 직접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카인의 등장에 사람들이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중 젊은 귀족 하나가 나섰다.
“전 경연이 올바른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셀러스 가문의 로이드 님이시군요. 말씀하십시오.”
상대가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로이드는 움찔했다.
가문이 밝혀진 이상 적당히 물러나는 건 불가능해졌다.
말을 잘해야 했다.
자칫하면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날 수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 이미 분위기는 기울어 있으니까.’
상대는 그 유명한 요한 키리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이드는 심호흡 후 입을 열었다.
“세레나 님이 말씀하셨듯이 경연의 목적은 서로의 마법 실력을 겨루고 그 과정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 발전을 꾀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하십시오.”
“하지만 율리아 님의 전투 방식은 철저히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이 목적으로 보였습니다. 세레나 님은 기사들의 전투라고 표현하셨지만 그보다는….”
로이드는 말끝을 흐리며 한 차례 관람석의 눈치를 보았다.
“…뒷골목 잡배들의 싸움 같았습니다. 솔직히.”
품위와 우아함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관람석 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고, 율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카인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규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규칙에 문제가 없다고 다가 아닙니다. 엄연히 관례와 전통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요.”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로이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 주장이 뱉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인이 돌연 물었다.
“로이드 님은 관례와 전통을 굉장히 중시하시는 분 같군요.”
“예? 예. 그렇습니다. 관례가 있기에 기준이 잡히고 안정이란 요소가─.”
“그런데 왜 어릴 적 가문의 전통으로 맺어진 약혼자를 무시하고 사람들 몰래 벽 바깥에서 창부들과 밤을 지내는지 여쭤보고 싶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내용.
때문에 로이드가 카인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히끅.”
로이드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분명 터무니없는 내용이나, 그 말을 뱉은 이가 ‘요한’이기에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카인은 주변 반응에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슈프림 시큐리티라는 보안 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각지에 파견된 직원들이 임무를 수행하며 여러 정보를 가지고 돌아오지요. 개중엔 64번 구역 유흥 업소의 손님 장부도 있었지요.”
정확히 말하면 레드스컬 잔당을 소탕하고 시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장부였다.
로이드 입장에선 분명 신분을 감추고 방문한 장소이나, 레드스컬의 정보력은 만만치 않았다.
“거, 거짓말. 히끅.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여기 그 장부와 사진을 공개하겠습니다.”
카인이 품에 손을 넣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안 돼!”
로이드가 괴성을 지르며 완드를 꺼내 들었다.
완드 끝으로 신속하게 원소를 끌어 올렸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사람들은 카인이 로이드를 향해 손바닥을 뻗고 있는 것을 보고 ‘파훼’가 이뤄졌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봐, 봤어? 원소가 제대로 붙기도 전에 흩어졌어.”
“결합 직전에 파훼에 성공하는 게 보통인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경연의 ‘품위’와 ‘고상함’을 깨트린 자가 정작 가장 ‘품위’ 있고 ‘고상한’ 파훼를 선보였으니.
“저렇게 막으려고 한 걸 보면 진짜인가 봐요.”
“세상에. 소피 님만 불쌍하게 됐네.”
로이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항변했지만 한 번 기운 분위기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곳곳에서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다.
심지어는 자신이 도움을 주려했던 세레나조차도.
혼란과 소란 속에서.
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전통과 관례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카인의 목소리는 소음 속에서도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변화에서 나오는 법이고.”
하지만 설령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전통과 관례는 그런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높은 확률로.”
지금 뱉는 대사는 철저히 한 사람을 의식한 것이기에.
“때문에 기존의 틀을 깰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쭉 돌아보던 카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때론 거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더라도.”
카인의 시선은 정확히 황제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