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경연 (2)
저벅. 저벅.
황제가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저벅. 저벅. 탁.
발소리는 카인 앞에서 멈췄다.
곧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폐하.”
카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모두의 신경이 집중된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처리할 일이 많아 그간 자네를 부르지 못했네.”
“제 존재를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경연 참가자 명단을 보고 놀랐네. 율리아의 이름이 올라가 있더군, 교습 성과에 대한 보고라 보아도 되겠나?”
“예. 그렇습니다.”
“자네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건 사실일세. 하지만 이렇게 빨리 결과를 보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사그락.
황제의 얼굴 쪽에서 옷자락 소리가 났다.
그가 고개를 돌려 율리아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율리아. 마법을 써 보아라.”
율리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긴장감에 온몸이 굳었지만, 곧 들려온 카인의 목소리에 안정을 되찾았다.
화륵.
“호오.”
율리아의 손바닥 위에 피어난 백색 불꽃을 보고 황제가 감탄을 터트렸다.
이후 불꽃의 이동이나 크기 조절과 같은 몇 가지 지시를 내렸고, 율리아는 그 모두를 무리 없이 수행했다.
불꽃이 꺼지고, 황제는 다시 카인을 보았다.
“고개를 들게.”
그 말에 곳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황궁 출입 경험이 풍부했고, 때문에 방금 말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황제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절대자로, 누구도 그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헌데 그가 직접.
그것도 황족 외의 인물에게 고개 듦을 허락한다는 것은.
‘요한 키리프가 최근 황궁에 자주 출입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을 줄은.’
충격과 경악.
그 순간 장내 모두가 동일하게 느낀 감정이었다.
총애의 대상이 벽 바깥 출신이기에 충격은 그만큼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카인이 일부러 겸양을 위해 머뭇거림을 보였고,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
“고개를 들게. 잠시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걸 허락하겠네.”
카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일견 동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황제의 백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나? 그동안 율리아를 가르쳤던 교사가 적지 않았네. 하지만 모두 실패한 전적이 있지.”
“…….”
“단순히 ‘잘 가르쳤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군.”
모두가 신경을 집중해 카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2황녀 율리아가 마법에 소질이 없음은 공공연했던 사실.
때문에 세레나와 경연을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2황녀가 경연에 참가한다고? 에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교사로 붙은 이가 요한 키리프였기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참석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녀가 마법을 익혔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황제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제 요한이라는 인물이 또 어떤 방법으로 ‘기적’을 일으켰는지 들을 차례였다.
장내에 정적이 감돌고.
이윽고 카인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이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렸습니다.”
“두려움이라?”
“예. 첫 교습 때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황녀님의 마법적 소양 자체는 충분하다 판단했습니다. 회로를 이미 구축하셨고, 원소를 운용하는 능력 역시 크게 부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보게.”
“다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계셨지요. 황족으로서 늘 뛰어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이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고, 카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마법 교습과 함께 심리 치료를 병행했습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고, 황녀님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신 뒤, 본래 자신이 누렸어야 할 재능을 되찾으셨습니다.”
“율리아. 이 말이 사실이느냐?”
율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방법을 한참 잘못 찾고 있었구만. 필요한 건 교습이 아니라 치료였는데 말이야.”
그의 시선이 다시 카인에게 향했다.
“헌데 지금 율리아의 실력이 경연에 참가할 수준이 되는가?”
“황녀님은 제가 가르친 학생 중 손에 꼽히는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교습 기간이 짧을 텐데.”
말의 내용은 카인을 의심하는 투였지만, 황제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습 기간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교습의 깊이 역시 그에 못지않다 생각합니다.”
“지켜보지.”
황제는 몸을 돌려 고위 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음악이 다시 울리고,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연회는 재개되었다.
“…….”
율리아 역시 긴장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고, 머리가 조금 어질거렸다.
황제 앞에 설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분명 피를 물려받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다 자부할 수 있는 ‘자식’임에도.
‘…아무 말씀도 없이 가시네.’
황제가 사라지고 긴장감은 해소가 되었다.
다음으로 그 자리를 채운 감정은 커다란 실망감이었다.
마법을 익히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황궁 밖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황제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었다.
‘칭찬 한마디는 해주실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짓는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요한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 모른 척 물었다.
“뭐가요?”
“마법을 배우고 이 자리까지 오기의 과정 말입니다. 많이 힘드셨을 테니까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 남자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읽는 것 같다고.
***
경연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대련장 위에 올라 일대일로 경합을 벌였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좋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승부였습니다.”
격한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 선 채 ‘우아’하게 마법을 사용했고, ‘파훼’로 원소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다 마나가 바닥나는 순간 승부가 결정 났다.
더러 마법이 상대를 직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두텁게 두른 방호 덕에 누군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어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네가 보기에는?”
“원소 운용에 군더더기가 없군요. 참가자들 모두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잘 다듬어진 느낌입니다.”
카인은 황제의 물음에 대련장 쪽을 흘긋 보며 대답했다.
좋게 표현하자면 잔잔하게 흐르는 교향곡의 일부와 같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감상으론 지루하고 평면적이기 짝이 없는 전투였다.
‘…관상용이군. 남의 눈, 특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벽 바깥에서 이런 식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단번에 제압당해 목숨을 잃을 터였다.
상대의 마나가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비효율적인 방법 따위는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호위를 대동하기에, 마법사 간의 일대일 전투가 성립될 가능성 자체가 낮았다.
또한 그렇다 할지라도 점멸과 공격 마법을 활용해, 보다 직접적으로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보통의 전투법이었다.
“바이퍼 후작.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번 경연에도 자네 딸이 참가했지. 만만찮아 보이는 상대가 있나?”
황제의 시선을 받은 바이퍼 후작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진표는 이미 공개되었다.
2황녀와 자신의 딸인 세레나가 경합하는 건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
‘폐하께선 자식들이라고 딱히 특혜를 주지 않으시는 분이지.’
전년도와 같이 세레나의 우승을 점친다 하더라도 황제가 불쾌함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솔직하고 자신 있는 모습을 높이 사는 것이 황제였다.
‘그리고 요한 키리프의 경우는.’
바이퍼 후작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요한을 흘긋 쳐다보았다.
요한 키리프.
세간 화제의 주역이자, 최근 황제가 전례 없던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
「전도유망한 친구네. 이번 경연 자리에서 얘기를 나눠 볼 기회가 있을 걸세.」
검증이 완전히 끝나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포섭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한 끝 모를 능력과 함께 다분야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라고도.
대화를 나눠본 결과 실제로 그러했다.
어떤 분야든 이야기를 이어감에 막힘이 없었고, 특히 마법 공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드러냈다.
라티움의 이인자이자 방주 설계제작의 총책임자인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상대를 파악한다는 목적도 잊고 잔뜩 흥분하여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내가 그만큼 전문 분야에 관한 대화에 목말라 있었단 증거겠지.’
라이티노를 비롯해 라티움 연구원들의 지식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때문에 요한에 대한 바이퍼 후작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저택에 초대해 술을 나누며 밤새도록 마법 공학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저장고에 분명 87년산 발로티에를 한 병 남겨 뒀었는데… 크흠, 일단 경연을 생각해야지.’
세레나의 마법 교습은 담당 교사가 따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사사를 할 때도 있었다.
때문에 2황녀와 세레나의 대결은 요한과 자신의 대결로 확장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사실 승리가 누구에게 돌아가든 큰 상관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세레나가 이길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마법을 익혀온 기간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지.’
바이퍼 후작은 다시 나이프를 움직였다.
“전년에 비해 참가자들의 기량이 전체적으로 높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레나의 적수로 보이는 인물은 딱히 없는 것 같군요.”
황제는 한 차례 웃음을 터트린 후 카인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바이퍼 후작의 말에 동의하나?”
율리아와 세레나.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느냐는 질문이었다.
─다음은 2황녀 율리아 프나함 님과 로테 가문의 장녀 세레나 로테 님의 경연이 있겠습니다!
그때 진행자가 다음 경연의 시작을 알렸고, 카인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폐하의 여흥을 위해 답을 미루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답을 알고 보는 것만큼 지루한 경기는 없을 테니까요.”
얼핏 겸손해 보이나 사실 충만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말뜻을 이해한 황제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배려에 감탄이 나오는군. 그렇게 하지. 무릇 경기는 결과를 모르고 봐야 재미가 상하지 않는 법이니까.”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율리아와 세레나가 대련장 위로 올랐다.
이제껏 경연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대련장 주위 테이블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으셨네요? 황녀님? 용기는 높이 사드릴게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위치에서 세레나가 말했다.
편한 활동복과 화려한 드레스.
두 사람의 옷차림은 확연히 대조되었다.
“세레나. 우리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지시 하나에 따르기로 했죠. 내가 어떤 지시를 내릴 것 같아요?”
“그건 황녀님이 아니라 이기는 쪽이―.”
“아, 지시가 아니라 배려겠네요. 세레나의 머리를 삭발시킬 거니까. 평소에 머리가 길어 관리가 힘들다고 불평을 많이 했었죠? 관리가 필요 없게 만들어 드릴게요.”
세레나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는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평소 그녀는 불평을 위장한 노골적인 자랑을 했었고,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세레나는 인상을 찡그리는 동시,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방어하듯 감싸 쥐었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예요. 제가 이겨도 무리한 지시는 내리지 않으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네. 네. 저도 제가 후회했으면 좋겠네요.”
세레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뒤따라온 비서에게서 스태프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는 율리아를 발견하고 말했다.
“뭐해요? 맨손으로 싸울 거예요?”
“저는 그런 장비에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라.”
“…….”
세레나는 율리아를 쏘아보며 자세를 잡았다.
원소를 끌어올려, 경연 시작과 동시에 방출할 준비를 마쳤다.
‘어디 감히 마법을 넘봐. 콧대가 꺾여 저택으로 기어들어 가게 만들어야겠어.’
삐익─!
호각 소리와 함께 세레나의 손 위에 수 개의 얼음송곳이 생겨났다.
‘뭐야. 파훼도 안 하고. 이렇게 쉽게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면….’
다음 순간 세레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