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경연 (1)
“황녀님은 황궁 밖에 나가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렇죠?”
황궁 밖.
두 단어를 듣자마자 율리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라고 여기 갇혀만 있고 싶은 줄 알아!”
앙칼진 외침과 함께 율리아가 연무장 바닥을 박차고 카인을 향해 뛰었다.
마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스위치가 꾹 눌린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거리를 좁히는 속도는 평소 운동을 하지 않던 10대 소녀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빨랐다.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군.’
율리아에 대한 교습은 모두 세레나와의 실전을 가정해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마법 대결론 황녀님은 절대 세레나 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율리아가 기대 이상의 성장폭과 뛰어난 원소 운용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
허나 마법을 익혀온 시간의 차이로 세레나와는 보유한 마나 양 자체가 다른 것도 사실.
「원소장을 다루지 못하는 마법사들의 대결은 ‘파훼’ 실력과 보유한 마나 ‘양’으로 결판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율리아의 ‘파훼’ 실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세레나를 압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기적으론 세레나를 추월할 것이 분명하나, 아직 율리아가 마법을 익힌 시간이 짧음을 고려해야 했다.
「파훼 실력은 세레나 님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인 대결 구도로 가면 율리아는 제대로 마법 한 번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카인이 제시한 해결책은 ‘강화 마법’을 사용한 육탄전이었다.
강화 계열의 마법은 발현점이 ‘신체 내부’에 있어 파훼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불어 비교적 적은 마나로 마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율리아는 카인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육탄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쐐액!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율리아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휘둘렀고, 궤적을 따라 칼날에 감긴 불꽃이 휘날렸다.
단검이 카인의 몸에 닿기 전.
아슬아슬한 타이밍.
챙!
단검은 방호에 가로막혔다.
끼긱! 끼긱!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단검과 방호 사이에 힘 싸움이 벌어졌고, 이내 방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전력을 다한 공격. 세레나의 마나 양이라면 이 정도 시간을 버티다 부서질 터.’
쩌적!
방호가 부서지고, 율리아의 다음 공격이 이어지며 두 사람의 발소리가 어지러이 연무장을 울렸다.
타닥! 챙!
“정말 죽일 각오로 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황녀님은 세레나 님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세레나! 세레나! 그 년 이름 좀 그만 꺼내요!”
율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단검은 카인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결국 대련은 마나가 바닥난 율리아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연무장 바닥에 뻗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아… 하아… 그래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예. 과연 일취월장이라 할만합니다.”
대자로 누운 율리아 위로 카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정말 당신한테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경연에 안 내보낼 거예요? 이미 세레나한테는 그렇게 큰소리를 쳐놨는데?”
“예. 질 것이 분명한 승부를 굳이 진행 시킬 이유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
“그럴 경우 세레나 님에겐 직접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제가 황녀님의 재능을 과대평가한 것 같다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미션에 실패해도 경연에 내보내 줄 거라고.
하지만 이 대쪽같음의 화신 같은 남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경연에 못 나가면 세레나 그 년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갈 텐데.’
황궁을 탈출하기 전까지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리라는 생각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경연에서 패배해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카인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
몰래 손을 조금씩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단검의 위치를 파악했다.
‘분명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라고 했겠다.’
뒷짐을 지고 있는 모양새로 모아 상대는 방심을 하고 있었다.
기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타이밍.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기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다만 율리아가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상황을 이용하는 부분은 칭찬할만하군. 슬슬 합격을 시켜야겠지. 경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실 율리아가 승부에서 이길 수 있는 ‘최소 실력’을 갖춘 지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세레나는 ‘변칙’적인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을 테고, 방심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굳이 ‘공격 성공’이라는 조건을 건 것은 그녀의 자만을 예방하고, 꾸준히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해서였다.
카인은 율리아의 손가락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냉정하다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방침이란 것은 지켜질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
꼬물꼬물 움직이던 손가락이 단검에 닿은 순간.
“―죽어라 이 악마!”
율리아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래 봤자 카인의 눈엔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완전히 피해버릴 생각은 없었다.
“……!”
일부러 얼굴에 약간의 당황감을 드러내며, 뒤쪽으로 스텝을 밟았다.
찌직!
단검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카인의 옆구리를 스쳤고, 두 사람은 그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그을려 구멍이 뚫린 옷자락에서 연기가 피었다.
“히히. 방심했네요? 공격 성공한 거죠?”
“…….”
“왜, 왜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건데….”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카인의 눈치를 보던 율리아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흥. 이겼다. 이겼어. 이제 세레나 콧대를 꺾으러 갈 수 있어.소원은 또 무엇을 빌지. 뭘 해달라고 할까.”
타닥. 타닥.
콧노래와 함께 특유의 스텝을 밟으며 연무장을 종종거리던 그때.
“그런데 악마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평소 저에 대한 이미지가 그랬던 거군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탁.
율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 저, 그게…요?”
***
경연 당일.
본궁 뜰에 위치한 야외 대련장.
“오랜만입니다. 루테란 백작님. 지난 연회 이후로는 처음이군요.”
“어머, 불칸 후작님. 잘 지내셨나요? 석화증은 완치되셨나요? 회장직에 복귀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차량을 타고 속속 도착한 귀족들이 서로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뜰 안쪽에선 악단의 교향곡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다른 한쪽 조리대에선 지글지글 고기를 굽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황궁의 기후는 마법으로 유지되어 풍경은 봄과 다름없었다.
대련장 주위로는 원형 테이블이 인원수에 맞게 세팅되어 있었다.
“오! 이번 경연에는 헤이몬 가문도 참가하는 겁니까?”
“크로커스 가문에서도 삼남이 나온다고 들었는데요. 걸고 계신 기대가 상당할 것 같군요.”
귀족들의 대화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표면적으로 마법 경연은 고위 귀족들이 모여 젊은 인재들의 대련을 감상하고, 음식과 음악을 즐기며 교류를 다지는, 일종의 사교회 같은 자리였다.
세력이 강한 가문은 실제로 그러한 의미로 경연에 참석했다.
하지만 어중간한 위치의 가문들은 경연을 ‘출세를 위한 기회의 장’으로 보았다.
경연에 참가한 자식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만큼 황제의 눈에 잘 띌 수 있는 방법도 없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두 머릿속으론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2황녀 율리아 프나함.
그녀가 경연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참석’이 아닌 ‘참가’
자리에 나타나는 것뿐 아니라 직접 단 위로 올라 대련을 펼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2황녀님은 마법을 사용하시지 못하잖아요?」
「분명 마법에 재능이 없다고 판명되었었죠. 이제껏 경연에 참석하신 적도 없고.」
경연 불참의 이유.
사람들은 그 이유를 열등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자신과 달리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하는 또래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번에 요한 키리프가 개인 교사로 붙었지 않습니까.」
「아.」
「그러네요. 요한 키리프. 그 사람이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죠.」
처음에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 키리프가 교사로 발탁되었음을 상기하고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리에 참석한 모두는 2황녀와 요한이 경연에 나타날지 말지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세레나님. 이번에 2황녀님과 대련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세라나 주위로는 귀족가의 자제들이 다수 모여 있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그녀의 얼굴에 순간 강한 불쾌감이 스쳤다.
하지만 곧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약속을 하긴 했어요.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부담을 느끼신 것 같네요.”
우아함을 의도한 동작으로 찻잔을 홀짝이며 진입로를 바라보았다.
“황녀님이 평소에도 담이 작으신 성격―.”
“아, 저기!”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진입로로 향했다.
2황녀의 전용 차량이 도착해 들어오고 있었다.
탁!
문을 열고 나타난 율리아와 요한을 보고 사람들은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등장으로 소문이 사실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는.
“화, 황녀님이 너무 편한 복장을 하고 오셨는데?”
다른 모든 귀족가의 자제들은 양복이나 드레스 차림이었다.
대련은 보통 점잖은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그건 경연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활동복 차림인데 우아해 보여.”
“황녀님 아니면 쉽게 소화 못 할 옷차림이긴 하네.”
편한 활동복 차림이지만, 색상과 원단 조합 덕에 자리에 필요한 기품과 격식은 충분히 갖춰진 옷차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귀족가의 영애들 사이에서 패션의 유행을 선도하던 것이 2황녀.
대화의 중심은 곧 ‘황녀’와 ‘그녀의 옷차림’이 되었다.
“보다 보니 나쁘지 않은데.”
“우리 가문 전속 디자이너한테도 이야기를 해봐야겠어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순식간에 옮겨가자 세레나는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넌 늘 이런 식이었지. 내가 가져야 할 관심을 모두 빼앗아 가고.’
자신과 율리아 사이의 경쟁 구도는 귀족가의 자제들 사이에서 그리 비밀스런 사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늘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모, 학식, 교양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유일하게 자신이 율리아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자유’와 ‘마법’ 정도였다.
‘절대 안 돼. 마법마저 너한테 질 수는 없어.’
마법에 쏟은 시간 자체가 다르다.
이쪽의 승리 자체는 확실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으며, 세레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율리아를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해도 준비 시간이 부족했는걸. 걱정할 것 없어.’
스스로를 애써 다독였다.
사실 장내 모두의 시선은 율리아보다도 그 남자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세상에. 나 요한 님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야.”
“분명 연인이 없다고 하셨지?”
“있어도 없다고 믿고 싶네.”
“정신 차려. 넌 남자야.”
“그런데?”
“?”
귀족가의 자제들부터.
“확실히 벽 안쪽과 바깥은 사업 확장 때 고려해야 할 점이 다르더군요. 비힐트 님도 안면을 익혀두시면 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요즘엔 저택에서 파티가 뜸하더군요. 워낙 바쁜 인물이라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요한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저는 일부러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가문의 수장들까지.
가히 폭발적인 관심이었고, 때문에 아우라에 있어 옆에서 묻히지 않고 있는 율리아가 대단해 보였다.
“세레나.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그럼요. 황녀님도 잘 지내셨나요?”
두 소녀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야, 뭐. 그날 이후로 쭉 저택에 있었어요.”
“마법 수행에 열중하셨다던데. 속상하네요. 수행의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요.”
“세레나 님도 집에서 평소 안 하던 마법 연습을 하셨다던데요. 좋네요. 제가 세레나 님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아서.”
“아뇨. 전 평소에도 마법 연습을 꾸준히 해요.”
율리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설마.”
세레나도 지지 않고 비웃음을 지었다.
“자극도 자극 나름이죠.”
두 소녀가 신경전을 벌이는 그때.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안내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저 멀리 황제의 전용 차량이 도착하고 있었다.
탁.
황제가 차에서 내림과 동시.
모두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저벅. 저벅.
황제의 발소리가 울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카인 쪽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