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독대 (3)
“황제가 되라고 하셨습니까…? 제게…?”
셸링포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메시지를 채 되짚기도 전에 카인이 몰아쳤다.
“교단은 황제 역시 악마에 씌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면밀한 관찰 후에 내려진 결론이지. 그는 마계의 문을 열어 대륙을 다시 악마가 뛰노는 세계로 만드려 하고 있다.”
셸링포드는 머리가 어질했다.
믿기 힘든 상황의 연속으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 말을 제게 믿으라는 겁니까?”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다만 선택에 따라 너에 대한 처분이 달라질 것이다.”
요한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입막음 조로 죽임을 당할 것은 분명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요한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었다.
셸링포드가 대답을 망설이던 그때.
“셸링포드. 23세. 제국력 1046년 출생. 악마 숭배교에 빠진 부모로 인해 가문이 몰락. 10살, 7번 구역 성당의 텐드로 사제에게 거둬지며 신앙생활을 시작.”
“……!”
“제국력 1069년. 기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후 이단심문관에 지원. 하지만 자질 부족으로 판단되어 탈락. 이후 기사 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다 4황자와 조우. 이후 황실에 입궁.”
긴 정보의 나열을 마친 카인이 호흡을 고른 후 말했다.
“아시모프 황자는 본래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다. 영면증이 치료된다면 다시 황제의 관심을 받게 되겠지. 누구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황제를 관찰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다는 말에는 셸링포드도 동의했다.
소년이라곤 믿기지 않은 깊은 생각과 다방면의 학식.
거기에 때때로 보이는 카리스마까지.
영면증이 발병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본궁에 출입하며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을 터였다.
“교단은 네가 임무 수행에 적절한 인물이라 판단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답해줄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얼마든지.”
“영면증은 악마와도 연관이 있습니까?”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셸링포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시모프 님은 꼭 죽어야만 했습니까?”
“한 번 악마에게 정신이 잠식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죽음만이 당사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지.”
셸링포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따라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한 방울씩.
툭. 툭.
“아시모프는 황제가 되어 이상향을 만들고 싶어했다. 네가 정말 신하된 자라면, 주인이었던 자의 의지를 이어나가는 게 옳지 않겠나.”
툭. 투둑.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아시모프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요한의 말을 따르도록 해.」
그건 유언이었다.
악마 퇴치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자신에게 찾아올 것은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아시모프 님의 의지이니까.”
“신중히 내린 결정이길 바라지. 단순히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이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무거움도. 책임감도 모두. 하지만 아시모프 님을 연기한다면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령 목소리나 용모 같은….”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카인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실처럼 뿜어진 마나가 셸링포드의 얼굴을 휘감았다.
얼음판이 형성되어 셸링포드의 얼굴 앞에 부유했다.
“이건 대체…?”
얼음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셸링포드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만져지는 건 분명 자신의 얼굴이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아시모프의 것이었다.
“변용 마법이다. 아주 밀접한 거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다. 효력이 영구적이진 않지만 내가 주기적으로 왕진을 와 마법을 갱신하면 되니 문제가 되진 않겠지.”
변용 마법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일체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셸링포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여신님의 권능인 겁니까? 허, 지금 목소리 또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카인은 세계를 창조한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오랜 시간 아시모프와 밀착하여 생활했지. 말투나 행동거지를 모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모든 일과를 지정해주겠다. 영면증을 연기하는 것을 포함하여.”
처음에 조금 어색한 모습을 보여도 의심을 살 일은 없을 터였다.
아시모프는 영면증 발병 이후 저택에 칩거하였고, 사용인들과도 큰 교류가 없이 지내왔으니까.
‘마법을 눈치챌 위험이 있는 인물이라면 황제 정도.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 아시모프와 마주칠 일은 없다. 영면증이 치료된 후에야 관심을 두겠지.’
영면증 치료제는 이미 완성되어 임상 실험을 마친 상태였다.
허나 직접 사용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아시모프를 앞세워 황궁 내에서의 활동 범위를 넓힌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때에 맞춰 ‘치료제를 사용하여 병을 고쳤다’고 발표할 생각이었다.
“마무리를 하지. 지금부터 너는 나와 맹약을 맺는다.”
아시모프의 죽음으로 그와의 맹약은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5개의 맹약 한계에 공석이 생겨 셸링포드와 맹약을 맺는 것이 가능했다.
허공에 나타난 맹약의 문양을 보던 셸링포드는 홀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몇 주가 흘렀다.
카인은 지속적으로 4황자의 별채를 방문해 셸링포드의 ‘적응도’를 점검했다.
“말투와 행동은 이 정도면 되었군. 전에 황궁의 예법을 배운 적 있나?”
“예. 영면증을 앓기 전 아시모프 님은 황궁 내의 여러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호위를 맡은 저도 부끄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예법을 익혔습니다.”
‘셸링포드’는 긴 휴가를 받아 황궁을 떠난 것으로 처리되었다.
직접 황궁 출입구를 통한 것은 아니지만,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 그런 것까지 알리는 없었다.
“치료제를 복용해 점점 상태가 호전되는 것으로 하지. 끝에는 시중이 아예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셸링포드는 물끄러미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에 대한 의심이 아예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머리 회전이 빨랐기에, 시간이 지나자 당시 가능했던 여러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절대적인 복종’을 조건으로 한 맹약을 맺은 상태이기에, 다른 수를 쓰는 건 불가능했다.
‘헛된 생각은 버리자. 이미 총알은 쏘아졌다. 그것이 죽은 아시모프 님을 위한 길이니까.’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객관적으로 요한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여러 경우의 수 중 가장 확률이 높기도 했다.
카인의 다음 행선지는 2황녀 율리아의 별채였다.
끼익─
저택 문을 열었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광활한 넓이의 1층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저벅. 저벅.
카인이 중앙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화륵.
허공에 피어난 불덩이가 카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카인이 손을 뻗자 허공에 얼음 결정이 생겨나며 그대로 불덩이를 얼려 버렸다.
화륵.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머리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쪽이 진짜인가.’
생각과 동시에 카인의 등 뒤에 거대한 얼음벽이 생성되었다.
쾅!
불덩이는 벽에 가로막혀 폭발과 함께 소멸했다.
꽤 큰 타격을 주었는지 벽엔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는 타이밍.
바닥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도 함정이었나. 제법이군.’
화르륵!
카인이 선 자리에 불기둥이 치솟았다.
천장까진 닿지 않는 작은 크기였지만, 사람 하나는 충분히 재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기세가 강력했다.
─됐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신형 하나가 뛰어내리더니, 바닥에 닿을쯤엔 속도가 느려져 사뿐히 착지했다.
편한 활동복 차림을 한 율리아였다.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이 피워올린 불기둥을 바라보던 그녀는 정신이 퍼뜩 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콰아아아―!
불기둥 안쪽에선 기척은 물론 아무런 마나의 움직임도 없었다.
아닐 것이다.
분명 방호를 사용해 몸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만 보자면 심장에 칼이 찔려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아마 실제 그런 상황이 되면 ‘유감이군요. 하지만 전 이런 걸로 죽지 않습니다.’ 하고 칼을 뽁 빼내지 않을까.
“부, 분명 죽일 각오로 공격하라고 했는데. 경연에 나가려면 마법으로 자기 옷깃을 스칠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법을 멈춰야 하지만, 그 안에 새카만 재만 남아 있을까 두려워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유감이군요. 하지만 전 이런 걸로 죽지 않습니다.”
“꺄아아아아악─! 유령이야!”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
율리아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 찧었을 것이다.
카인이 일으킨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지 않았더라면.
“아, 안 죽었어요?”
투명한 소파에 누운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율리아가 물었다.
동시에 카인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음을 보고 약간 실망한 얼굴을 했다.
“예. 보시다시피. 아쉽군요. 여러 마법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전략은 아주 좋았습니다. 바닥에 설치한 마법의 발동이 조금만 빨랐다면 제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겁니다.”
카인의 칭찬에 율리아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렇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죠?”
“예. 훌륭했습니다. 실전 위주로 교습을 진행한 성과가 있군요.”
한껏 기분이 좋아진 율리아가 바닥 다른 곳에 설치해 둔 마법들을 발동했다.
콰아아―
불기둥이 줄줄이 피어올라 저택 내의 샹들리에며 장식용 관목 따위의 생명을 위협했다.
율리아가 환한 미소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세레나, 이 재수 없는 년. 그 잘난 콧대를 모두 태워버리면 더 이상 까불지 못하겠지. 어디서 잘난 체야.”
“…….”
카인은 시선을 위로 들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사용인들이 고층 난간에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마치 맹수를 피해 달아난 초식동물들처럼.
‘고생들을 조금 하겠군.’
난장판을 정리하는 건 모두 그들의 몫이리라.
저택의 지배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녀이니 어쩔 수 없을 터였다.
“빨리 연무장으로 가요. 진도 나가야죠.”
“일단 마법부터 중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맞네.”
율리아의 손짓과 함께 불기둥이 일제히 소멸했다.
그와 동시에 고층 난간에서 안도의 한숨이 일제히 들려왔다.
카인은 바닥이 온통 그을린 1층을 뒤로 한 채 율리아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흐응. 흥.”
콧노래와 함께 이상한 스텝을 밟으며 앞서가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성장 속도가 상상 이상이군. 어느 정도 빠를 줄은 예상했지만.’
율리아가 어느 정도의 마법적 재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꾸준히 노력하면 높은 실력에 오를 수 있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성장세가 지나치게 빨랐다.
막혀있던 수도꼭지가 뚫렸다는 정도의 비유로는 부족했다.
벽에 균열이 생겨 댐 전체가 무너져 내린 정도랄까.
‘율리아의 집념 역시 크게 작용했겠지. 오랜 세월 마법을 갈구해왔으니.’
어쨌든 첫 균열은 자신이 만들어준 셈이긴 했지만, 결국 균열을 키워 댐을 무너트린 것은 그녀였다.
부여한 과제는 할당량을 초과해서 완료해왔으며, 사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식사와 잠 시간까지 줄여 마법 연습에 집중한다고 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을 제조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율리아의 성격상 벽 바깥으로 유랑을 다닌다면 결코 얌전히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연무장에 도착한 카인이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으며 말했다.
“오늘 교습도 실전입니다. 제 옷을 조금이라도 그을린다면 합격으로 하겠습니다.”
“알아요. 난 준비 됐어요.”
율리아의 주원소는 화(火)계 원소였다.
경연 참가자 중 실질적인 적수는 세레나.
그녀의 주원소는 빙(氷)계 원소였다.
그간 쌓아온 수련 시간에 있어서는 물론, 상성에 있어서도 율리아가 불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습은 실전 위주로 이뤄졌다.
철저히 상대의 목숨을 노리고 어떤 수든 감행하는 벽 바깥의 방식으로 말이다.
“제가 사용하는 원소의 종류와 마나의 총량은 세레나 님 수준에 맞추겠습니다. 죽일 각오로 덤비십시오.”
율리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 부여를 위해 한 가지 보상을 더 약속하겠습니다. 제 옷깃을 태우는 데 성공하면 황녀님이 원하시는 소원 하나를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그 말 진짜죠?”
“예. 어떤 것이든 가능합니다.”
율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몰입을 위해 한 가지 더 장치를 하도록 하지요.”
카인을 목을 가다듬은 뒤 마법으로 목소리를 바꾸었다.
“황녀님은 황궁 밖에 나가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렇죠?”
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세레나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율리아의 눈매가 표독스럽게 치켜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