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207화 (222/227)

#207. 계략과 술수 (1)

쿠당탕!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아시모프의 몸이 비틀거렸다.

방 안 곳곳의 물건이 소년의 몸에 부딪쳐 떨어졌다.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8% ]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백진우’인지.

혹은 ‘아시모프’인지.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자신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

설령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친다 할지라도.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9% ]

‘나를 그렇게 잡아먹고 싶나. 아직. 아직이다.’

아시모프는 벽에 걸린 장식용 비도를 집어 자신의 허벅지를 찍었다.

푸욱!

뜨거운 핏방울이 얼굴에 튀며, 아득해지던 정신이 순간 돌아왔다.

[ 시스템 오류 발생. ]

[ 동기화율이 하락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7% ]

역시 효과가 있었다.

[ 시스템 오류를 교정합니다. ]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8% ]

다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동기화율이 다시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아시모프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동시에 빠르게 사고를 이어나갔다.

푸욱!

라크센은 죽었다.

제국의 미래는 걱정할 것이 없다.

적기가 되면 황제가 방주를 띄워 대륙을 멸망시키고 신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황위는 신세계에 입성한 뒤에 노려도 늦지 않다.’

푸욱!

다만 몇 가지 변수가 생겼다.

영면증은 문제가 아니다.

아시모프는 본래 영면증을 앓다 영원히 잠에 빠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으니까.

작품 내에 스치듯 언급된 치료법을 어떻게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한 키리프는 다르다.’

작품과 설정집.

그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라크센이 죽고 이야기의 흐름이 어그러진 탓일까 싶었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화증 치료제의 개발자.

마탑 교수 임용.

클럽 카스라르고 사건의 주역.

국경에서의 레지스탕스 소탕.

이중 원소장 논문 발표.

누군가는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사건들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강력한 인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폭풍의 눈처럼 말이다.

이질적인 존재였다.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나만 이야기 속에 들어온 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미 ‘빙의’ 자체가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비현실이 중첩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푸욱!

작품을 잘 아는 인물이 설정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면.

단 한 명 존재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존재가.

“크흐흐흐.”

너구나.

너로구나.

푸욱! 푸욱! 푸욱!

머리도. 허벅지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깊은 희열이 고통을 마취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주지. 너를 죽이고 현실로 돌아가면 그때는 정말 내가 글의 주인이 될 테니까.’

동기화로 인해 기억을 잃었던 것이 도리어 다행으로 작용했다.

「오랜만이다. 백진우.」

그렇지 않았다면 첫 만남 당시 녀석에게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이후로도 의심은 끊이지 않았고, 진료를 볼 때마다 불시에 유도신문이 날아왔다.

질문의 종류.

그리고 몇 가지 정황을 보아 녀석은 ‘진실의 눈’ 특성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아는 설정에는 그런 인물이 없는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자료에 따로 기술하지 않고 녀석이 머릿속으로만 구상했던 인물.

혹은 설정 따위는 필요 없는 그저 엑스트라.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녀석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시스템 오류를 교정합니다. ]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9% ]

곧 기억을 잃는다.

맹약에 의해 녀석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없다.

또한 ‘아시모프’는 이미 ‘요한’에게 완전히 먹혀버려,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장치가 필요했다.

다만 시간이 촉박해 선택 가능한 수가 많지 않았다.

아시모프는 자신의 피를 이용해 이불 위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썼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다음번에 또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셸링포드라면 분명 자신의 예측대로 행동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시모프는 정신을 잃었다.

동기화율이 100퍼센트에 달했다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

아시모프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을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잠들었구나. 분명 정원에서 식물을 가꾸는 중이었는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을 인상을 찌푸렸다.

이불을 걷자 붕대가 칭칭 감긴 허벅지가 보였다.

“……?”

“제가 도착했을 때 황자님이 피 묻은 비도와 함께 쓰러져 계셨습니다.”

의문에 답하듯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모프는 벽 쪽 의자에 앉아 있는 셸링포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방 안에 쓰러져 있었다고? 정원이 아니라?”

방 안은 평소와 같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셸링포드의 심각한 얼굴이 아시모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예. 정원에서 쓰러지신 건 한참 전입니다. 방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방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고…?”

셸링포드는 아시모프의 눈치를 보았다.

정황상 황자가 자해를 하며 방을 어지럽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본인이 한 일을 기억 못 하는 듯 보여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기억을 못 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행동이 부끄러워 기억 못 하는 척하시는 것일 수도….’

원래의 아시모프라면 절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영면증은 그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쇠약하게 만들었다.

영면증 초기에도 깊은 우울증이나 이상 증상을 보인 적이 있지 않던가.

‘최근엔 비교적 안정을 찾으셨었는데. 만약 그때와 같은 이상 증상을 보이시는 거라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몹시도 서글펐다.

운명이란 놈은 왜 이리 얄궂은 법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황자가 자신의 행동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군을 수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였다.

“아시모프 님 탓이 아닙니다. 영면증의 부작용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 병이니까요.”

“기억이 안 나… 나는 정말….”

“잠시 뒤 요한 키리프의 왕진이 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전달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아시모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에는 잔 떨림이 생겨났다.

‘…역시.’

황자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 셸링포드가 이를 악물었다.

전부터 낌새를 느끼긴 했다.

황자가 어쩐지 요한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오늘 이불에 피로 쓰인 이름을 보고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황자님의 자해는 정신적 스트레스 탓일 가능성이 크다. 그 스트레스는 아마 요한 키리프로 인한 것이겠지.’

요한 키리프는 야망과 능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로 보였다.

혹 그가 무언가 이득을 얻기 위해 황자에게 일부러 접근한 것이라면.

“아시모프 님.”

“왜 그래.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

“혹시 요한에게 무언가 협박을 받고 있습니까.”

아시모프는 말문이 막혔다.

맹약은 맺었으나 협박에 의한 관계는 아니었다.

‘절대복종’을 대가로 ‘영면증 치료’와 ‘황위에 오르기까지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니까.

특히 영면증 치료제 개발이 끝나간다는 말은 ‘맹약’을 했기에 거짓일 리도 없었다.

“협박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아시모프의 태연한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느껴지는 어색함에 셸링포드의 의심은 한층 깊어졌다.

협박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황자가 요한의 왕진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피로 쓰인 이름은 황자의 무의식이 표출한 구조 요청의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오늘 왕진 때는 저도 동석하겠습니다.”

“갑자기? 요한이 편히 진료를 보지 못할 텐데.”

아시모프는 당황했다.

매 진료 때 다른 황자들의 암살을 비롯한 향후 계획을 논의했기 때문이었다.

“아뇨. 반드시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셸링포드의 태도는 완강했다.

똑. 똑.

─ 요한 키리프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실랑이를 벌이던 중 사용인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시모프가 이불을 끌어 올려 허벅지를 가렸고, 문이 열리며 왕진용 가방을 든 카인이 나타났다.

“이야기를 나누시던 중인 것 같군요. 대화가 끝난 뒤에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예. 잠깐 시간을─.”

“아닙니다. 바로 진료를 보시죠.”

아시모프의 말을 끊은 셸링포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벽에 기댄 자세를 하고, 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침묵 속에 시선이 오갔다.

카인이 방에서 나가지 않느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셸링포드는 아랑곳 않았다.

“진료를 보아야 하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항시 황자님 곁을 지키는 것이 호위 기사의 임무입니다.”

카인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아시모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셸링포드. 밖에서 대기하도록 해. 명령이야.”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한시도 아시모프 황자의 곁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으라 말입니다.”

입궁 당시 황제에게서 그런 명을 받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의미로, 실질적인 명령권은 아시모프에게 있었다.

“억지 부리지 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황자님 주위에 어떤 위험 요소가 발생할지 모르니 자리를 지키는 게 맞습니다.”

셸링포드가 요한을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셸링포드─! 지금 무례하게─!”

“괜찮습니다. 황자님.”

요한이 둘 사이에 끼었다.

그의 눈에는 이채가 어려 있었다.

‘관계에 변화가 생겼군.’

아시모프와 율리아의 별채를 포함하여, 황궁에서 자신의 활동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백진우에 대한 수색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의심스런 인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아시모프에 대한 심증을 굳혀가던 상태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 속 괴물이 숨소리를 내어 기척을 드러내기만을.

호수 전체에 거미줄을 드리워 놓은 상태로.

“셸링포드 님.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것 같군요.”

물론 이 상황이 다른 요인 탓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주의를 기울일 가치는 충분했다.

“별다른 심경 변화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그동안 너무 안일했음을 깨달았을 뿐이죠.”

셸링포드는 주인의 말을 무시한 채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아시모프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어떤 연극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랬다면 눈동자의 떨림이나 호흡과 같은 불수의적 요소에서 티가 날 테니.

대체 무엇일까.

이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요인은.

“셸링포드 님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원하시면 진료를 지켜보셔도 됩니다.”

카인은 아시모프 쪽으로 몸을 돌리는 동시, 방 안의 모든 풍경을 뇌리에 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해둔 과거 풍경과 대조했다.

‘위치가 바뀐 물건들이 조금 있군.’

크게는 몇 센티미터.

작게는 몇 밀리미터.

사소한 차이지만 카인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긁힌 자국이 늘었다. 작게 반짝이는 알갱이는 유리 조각. 그리고 이건 피 냄새인가. 냄새의 강도는 아시모프의 허벅지에서 바닥, 그리고 테이블 순.’

‘신체 강화’ 특성으로 카인의 오감은 여느 수인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뛰어났다.

마나회로가 4레벨로 올라서며 기본적인 육체능력 역시 증폭되었으니까.

오감으로 받아들인 모든 감각은 정보로 치환되어 논리적 추론의 근거가 되어갔다.

현재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십 가지 가설이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그중 가능성 높은 것들이 추려졌다.

추리고 추려 단 하나의 가설이 남은 순간.

“그럼 진료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전에 잠시―.”

카인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참을 수 없이 올라간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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