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황녀 교습 (3)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인과 세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계단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율리아가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뭐야. 숨어서 다 듣고 있던 거야?’
언제부터 듣고 있던 것일까.
험담하는 걸 모두 들었을까.
세레나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돌렸다.
“어머, 황녀님. 샤워를 하러 가신 것 아니었나요? 독서 모임까지 시간이 촉박한걸요.”
율리아의 째릿한 시선이 닿자 세레나가 움찔했다.
율리아가 카인을 보며 말했다.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내가 잘못 들은 거죠?”
“잘못 듣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주치의의 주기적인 검진을 받으니 청력에 이상이 있진 않으시겠지요.”
“폐하 앞에서 세레나와 실력을 겨루라고요? 그것도 마법으로?”
“예. 의견이 갈렸습니다. 세레나 님은 황녀님이 마법에 소질이 없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카인의 눈길을 받은 세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맞아요. 황녀님이 오랜 세월 마법을 익히는데 실패해온 건 사실이니까요.”
“허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카인의 시선이 다시 율리아에게 향했다.
“제가 가르친 학생 중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마법으로 이름을 날리기엔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경연에서 두 분이 실력을 겨뤄보는 건 어떨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황궁 내에서는 주기적으로 마법 경연이 열렸다.
참가 제한은 ‘귀족’ 혹은 ‘귀족가의 구성원’ 정도로, 젊은 인재들이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참가하는 게 보통이었다.
“자신이 없으십니까?”
율리아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재능이 있다는 칭찬은 물론 고마운 일이야. 살짝 감동하기까지 한걸.’
하지만 세레나와 마법을 겨뤄 이길 수 있는가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어릴 때부터 마법을 익힌 ‘숙련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심자.’
백번 양보해 요한의 말처럼 ‘재능’ 자체는 이쪽이 더 뛰어나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쌓아온 학습 기간 자체가 다르니, 실력 면에 있어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또 경연까지는 시간이 한 달도 채 남아 있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율리아의 자신감 없는 모습에 세레나는 은근히 실망했다.
율리아가 내기를 수락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제안에 순간 당황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쪽에선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는 내기였다.
황제는 공과 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인물로, 경연에서 황녀를 이긴다고 ‘보복’ 같은 것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오히려 황제와 다른 귀족들 앞에서 뛰어난 마법 실력을 선보일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나보고 세레나를 이기라고요. 못해요.”
“황녀님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더 가지셔도 됩니다.”
“그래도….”
카인이 율리아 앞에 다가섰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마나를 움직여 보십시오. 인도를 따라서. 제가 가르쳐드렸던 대로.”
율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 아래.
이쪽을 감싼 요한의 그림자가 어쩐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심호흡 후 마나를 끌어 올렸다.
곧 율리아의 손바닥 위에 찬연한 백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진짜였네요.”
초심자의 것이라기엔 완성도가 상당했고, 이 순간만은 세레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요한의 도움을 받은 것이기에,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아직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율리아에게 카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황녀님이 만든 불꽃입니다.”
“도움을 받았잖아요.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아뇨. 마나를 움직인 주체는 황녀님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확신이 없으시다면―.”
카인이 짧게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황녀님을 믿는 저를 믿어보십시오.”
“…….”
불꽃과 카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율리아는 이내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기는 성사되었다.
패자는 승자의 요구 하나를 들어줄 것.
두 소녀는 결연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 각기 다른 감정을 품고 자리를 떠났다.
율리아는 걱정과 두려움을 품고 계단 위로.
세레나는 흥분과 기대를 품고 복도 저편으로.
카인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율리아의 손목을 잡았던 손.
백색 불꽃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재능은 확실하군.”
「도움을 받았잖아요.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카인은 율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율리아의 회로에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다.
당연히 마나 운용을 돕지도 않았기에, 불꽃은 온전히 황녀 혼자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율리아도. 세레나도.
그 사실을 모를 테지만.
두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인은 몸을 돌려 저택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다음 스케쥴인 아시모프 황자의 왕진을 위해 장소를 이동해야 했다.
***
“……!”
아시모프는 눈을 뜸과 동시에 상반신을 일으켰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침실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정원에서 식물을 가꾸고 있었는데. 또 잠들었구나.’
호위 기사인 셸링포드가 침실로 옮겨주었을 것이다.
옷이 깔끔한 걸로 보아 정원의 흙이나 식물 이파리 같은 것은 그가 모두 털어준 모양이었다.
‘셸링포드.’
늘 고마움을 느꼈다.
그와 함께한 것이 벌써 3년이었다.
첫 만남은 기사학교 견학 때였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각 계에서 주목과 스카웃 제의를 받고 있었다.
「네가 현재 기수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라고 했지.」
「부족하지만 그렇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화는 짧았지만, 두 소년은 서로의 야망과 능력을 충분히 알아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었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나를 섬기는 걸 허락할게.」
「평생 아시모프 님의 검이 되겠습니다.」
졸업 직후.
셸링포드는 아시모프의 호위 기사로 발탁되어 황궁에 들어왔다.
각자의 야망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
황제의 기사가 되겠다는 야망.
실제로 두 소년에겐 야망을 실현할 능력이 존재했고, 그를 위해 삶 전체를 던져오고 있었다.
분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년 전 갑작스레 발병한 영면증만 아니었다면.
대륙 각지에서 의사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에 차도는 없었다.
황제의 관심이 식으며 계승권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도 그때였다.
「나를 떠나. 정식으로 주종 서약을 맺은 것도 아니잖아. 나 때문에 네 미래를 버리지 마.」
「아뇨. 떠나지 않습니다. 제 주군은 아시모프 님 한 분뿐입니다.」
그 후 셸링포드는 쭉 아시모프의 수발을 들어왔다.
일체의 불평이나 불만 없이.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듯이.
아시모프가 절망을 견디며 투병 생활을 이어올 수 있던 것은 모두 셸링포드 덕이라 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아시모프는 테이블로 비척비척 걸어가 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에 힘이 없는 건 영면증의 증상이지만, 식은땀은 방금 꾸었던 악몽 탓이었다.
「지금부터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는 순간 너는 죽는다. 왜 라크센의 죽음을 사주했지?」
「모, 몰라요! 컥, 나, 나도 대체 내, 내가 왜 그랬, 컥, 는지!」
요한 키리프.
최근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인물이자, 자신의 주치의로 배정된 인물.
「말했지 않나. 황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겠다고. 영면증 역시 치료해주지.」
「맹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장면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공포와 두려움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신의 장난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
최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불분명한 기억들이 있었다.
자신은 황궁 밖으로 나가 ‘라크센’이라는 소년의 암살을 사주했다.
헌데 중요한 건 그런 행동을 저지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라크센. 바마. 엘렌. 내가 그 이름들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마치 기억이 그 부분만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 같았다.
나중에 조사해본 바로는 마탑의 학생과 교수, 그리고 암흑가의 거물이라고 했다.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근 나타난 요한이란 인물은 그 모든 사실을 꿰고 있었다.
라크센의 암살을 사주한 사실도.
3황자를 독살하려던 사실도.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도.
‘내 잊힌 기억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 그리고 언급했던 이름이….’
백진우.
목숨의 위협을 받아 정신이 없는 중이었지만, 그 이름은 억양이 특이해 정확히 기억했다.
‘백진우. 백진우라고.’
아시모프는 3글자 이름을 입에 넣고 굴렸다.
굉장히 낯설면서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한참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
서글프게 느껴졌다.
황제의 꿈을 꾸던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백진우.”
아시모프가 머릿속에 번개 같은 통증이 인 것은 그때였다.
“아악!”
머리를 부여잡은 아시모프가 바닥을 뒹굴었다.
불에 달군 갈고리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악마가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당장 이 고통을 멈추고 싶었다.
허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홀로그램이었다.
[‘아시모프 프나함’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 현 동기화율 - 100.0% ]
‘이, 이게 뭐야?’
의문은 다음 순간 해소되었다.
[ 동기화율이 하락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5% ]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진우야. 고맙다. 이번 글이 반응이 좋았던 건 네가 피드백을 주었던 덕이 커. 아직 사이트에 초반부밖에 올리지 않긴 했지만.」
친구의 글에 대한 열등감.
「헉. 헉. 잠깐만. 진정해. 그 칼로 나를 찌를 생각이야? 고작 글 하나 때문에?」
비바람이 부는 밤.
「놔! 이 씹- 새끼야!」
노트북을 두고 절벽 위에서 벌어졌던 사투.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아시모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친구라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 글이야. 내 글이라고.”
소년의 눈빛은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머릿속 통증에 얼굴을 구겨, 추악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 글이라고!”
아시모프는 숨을 헐떡이며 과업 창을 열었다.
[과업 - 야망의 길 ]
목표 : 자신 외 모든 황자를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십시오.
부여 특성 : 결단력. 명민함. 군주의 기품.
보상 : 현실세계로의 귀환
[ 동기화율이 하락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0% ]
점점 더 많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라크센’은 결국 제국을 무너트리는 인물.
거대한 적수가 되기 전에 미리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탁. 탁. 탁.
복도에서 울리는 다급한 발소리.
고함을 들은 셸링포드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 시스템 오류를 교정합니다. ]
[ 동기화율을 재설정합니다. ]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2% ]
“크윽.”
머리의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동기화율이 다시 빠르게 치솟으며 기억이 흐릿해져 갔다.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4% ]
[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
[ 현 동기화율 - 99.6% ]
아시모프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