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205화 (220/227)

#205. 황녀 교습 (2)

“나가서 무얼 하고 싶냐고요?”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였다.

“자유롭게 대륙을 유랑해야죠. 이제까지의 삶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한 마리 자유로운 새처럼 대륙을 유랑하고 싶다고 했다.

바다를 보고 싶으며, 용병단에 들어가 모험을 하고 싶고, 허름한 술집에서 진탕 취해보고도 싶다고 했다.

“벽 너머의 생활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실은 황녀님의 예상보다 훨씬 차갑고 딱딱할 테니까요.”

“알아요. 나를 뭘로 보고. 황궁에서의 삶을 포기하면 분명 잃는 것도 많겠죠. 하지만 나는 그래도 자유를 원해요.”

카인은 물끄러미 율리아를 보았다.

이 작은 소녀가 견뎌온 삶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황제의 수많은 자식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남과는 다른 농도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벽 바깥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다.

어린 나이와 아름다운 외모는 온갖 날벌레를 끌어들이는 요인이 될 터.

‘…이쪽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은 해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에는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카인은 율리아에게 각오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마법을 배우려고 하잖아요. 내가─.”

카인이 율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 뭐예요?”

“가녀리군요. 평소 운동을 하시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요. 다른 할 일이 많으니까─.”

꽈악.

순간 카인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고, 어마어마한 고통이 소녀를 덮쳤다.

율리아는 자리에 풀썩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고, 경련이 찾아왔다.

“아, 아아….”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수인에 버금가는 카인의 악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이거, 이거 놔, 놔….”

율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카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상대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생물 같은 오싹함을 주었다.

다만 한 가지 의도만은 명확히 내비치고 있었다.

살의.

상대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생각.

‘나, 날 정말 죽일 생각이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압도적인 무력감이 온몸을 옥죄어 호흡과 사고를 힘들게 만들었다.

카인이 손목을 놓아준 건 율리아의 공포와 두려움이 최대치에 달했을 때였다.

탁.

실이 끊긴 인형처럼 율리아의 팔이 추락했다.

“하아― 하아―.”

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율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카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법은 유명무실합니다. 악의를 품은 바람이 쉼 없이 불어, 그 어느 곳보다 쉽게 생명이 꺼지는 곳이 벽 바깥입니다.”

벽 바깥의 위험성에 대한 카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율리아는 카인의 의도를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력을 갖추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며,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일종의 경고였다.

방심하는 순간 지금처럼 순식간에 당하게 될 거란.

“그곳에서, 황녀님은 홀로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황녀님에 대한 교습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법뿐 아니라 기초적인 체력 단련에서부터, 모의 실전에 이르기까지.”

사실 황녀 교습에 큰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황궁을 탈출하고 국경을 넘는 것만 도우면 될 뿐, 완전한 자립을 도울 의무는 없었다.

다만 과거 생각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고, 악의로 가득 찬 어른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죽은 친구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기준이 충족되었다 생각될 때까지 저는 황녀님을 국경 너머로 내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안정되지 못한 호흡으로 말을 뱉었다.

“믿지 말라는 대상에는 당신도 포함되나요? 당신도 벽 바깥사람이잖아요.”

카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율리아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

교습은 연무장으로 장소를 옮겨 이루어졌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율리아가 카인의 지시에 따라 연무장을 뛰었다.

“하아. 하아.”

벌써 몇십 바퀴째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은 땀으로 절고 입에선 단내가 올라올 정도였다.

율리아가 뛰는 속도를 점점 늦추더니, 이내 바닥에 철푸덕 몸을 엎었다.

“더 이상 못 뛰어. 나 죽어. 차라리 죽이라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일어나십시오. 황녀님.”

카인은 염동을 이용해 율리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흐아아.”

흐느적흐느적.

율리아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녀 쪽에서 ‘악마’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카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기대 이상이군. 하기야 평생을 황궁에 갇혀 있었으니.’

카인은 내심 율리아의 독기에 감탄했다.

아무리 강화 마법의 보조를 받았다지만, 평소 운동을 하지 않던 이가 이만한 기량을 보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율리아는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시간을 체크하던 카인은 그녀를 멈춰 세웠다.

대(大)자로 뻗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50바퀴. 정확히 72분 걸렸습니다. 매일 동일한 바퀴를 도는 것이 과제입니다. 천천히 시간을 줄여나가도록 하죠.”

“자, 잠깐만요! 그, 그쪽이 강화 마법을 걸어줘서 이만큼 뛸 수 있던 거잖아요! 나 혼자 있는 날엔….”

카인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사용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마법을 못 써서 배우려고 하는 사람한테 자꾸 무슨 소리야!”

카인이 다시 염동을 사용했다.

“싫어! 싫어! 일으키지 마요! 안 돼! 안 된다고! 나 더 못 뛰어!”

격한 몸부림의 의사 표현.

안타깝게도 상대는 교섭 의사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율리아는 카인 앞에 강제 기상하게 되었다.

탁.

카인에게 손목을 잡힌 율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미 한 번 잡혔던 부분.

치료 마법을 사용해 멍이나 후유증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다만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방식의 공포였으니.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원소를 끌어 올리십시오.”

카인은 기민성 강화 마법의 필요 원소를 불렀다.

그리고 율리아의 회로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어 마법의 운용을 도왔다.

“…이거 이렇게 쉽게 써도 되는 마법이에요?”

마법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자신의 몸을 감싼 은은한 백색 마나를 보며, 율리아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원리를 알고 그대로 따르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강화 마법 자체는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 성공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율리아가 심리적 장벽을 일전에 극복한 적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요…?」

황궁의 정원.

손바닥 위에 피었던 작은 불꽃.

율리아는 이미 그때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그렇다 해도 재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율리아의 재능은 뛰어났다.

라크센이나 엘 렉스터 같은 천재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수재 반열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다.

“다른 마법도 가르쳐줘요! 지금 상태라면 뭐든 다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율리아는 잔뜩 흥분하여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카인은 몇 가지 기초 마법의 구동 원리를 가르쳐주었고, 교습을 마무리 지었다.

“샤워부터 해야겠어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찝찝해요.”

탈진에 가까운 상태지만, 율리아는 여느 때보다 개운하고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인과 율리아는 연무장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던 세레나와 마주쳤다.

“교습이 이제 끝나신 모양이네요?”

세레나가 몸을 빙글 돌리며 생긋 웃었다.

시선은 율리아가 아닌 카인을 향해 있었다.

순간 율리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필로체와 쟌은요?”

“식당에서 차를 즐기고 있어요. 교습받느라 고생이 많으셨네요. 15분 뒤에 도서관에서 독서 모임이 있는 건 알고 계시죠?”

“…기다려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율리아가 사라지자, 세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요한 남작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무리 황제 폐하의 명이라지만, 불가능을 어떻게 가능으로 만들겠어요?”

세레나의 말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고 노골적이었다.

“일전에 황녀님을 교습한 교사들이 모두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고 듣기는 하였습니다.”

“맞아요. 제가 요한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돌멩이를 열심히 닦는다고 보석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카인의 말을 동조로 여겼는지, 세레나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자기 이야기에 심취해 카인의 냉랭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되신다면 찬란한 원석을 세공해보실 생각은 없나요?”

원석은 스스로를 지칭했다.

실제로 세레나는 마법 실력이 뛰어나기로 사교계에 소문이 나 있기도 했다.

마탑에 입학했다면 학년 수석은 무리더라도, 차석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세레나 님은 이미 여러 명의 교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요한 남작님이라면 새로운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세레나의 구애는 멈추지 않았다.

카인은 이 자기애 넘치는 갈색 머리 소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로테 가문의 바이퍼 로테는 황궁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황궁 지하의 마나 탱크와 접점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때가 되면 황제가 먼저 ‘신세계 프로젝트’를 언급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나 탱크에 접근할 기회를 가지게 될 테고.

하지만 ‘마나 흡수 장치’가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에 완성되었기에, 시기를 앞당길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였다.

“누가 돌멩이고 누가 원석인지는 분명하잖아요?”

“예. 황녀님이 찬란한 보석의 가능성을 갖춘 원석. 세레나 님이 볼품없는 돌멩이지요.”

“맞아요. 제가 원석… 뭐라고요?”

세레나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농담을 하실 줄 아는 분이네요. 재밌어요.”

애써 웃어넘기려 했지만, 미동조차 없는 카인의 표정에 진담임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에요?”

“예. 황녀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남에게 폄하를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세레나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고개를 돌려 주위에 사용인이 없음을 확인하고 카인을 향해 쏘아붙였다.

“흉을 본 일이 잘못된 건 인정할게요. 친한 사이다 보니 불필요한 말을 했네요. 하지만 황녀님이 원석이고 제가 돌멩이라니, 농담으로라도 불쾌해요.”

“저는 농담을 즐기지 않습니다. 오늘 황녀님의 회로를 검사했고, 그 안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카인이 한 차례 호흡을 골랐다.

“세레나 님의 마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성장 한계’나 ‘잠재력’에 있어 황녀님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셨을 것 같진 않군요.”

“하! 하!”

세레나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한쪽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반대쪽 손을 카인에게 내밀었다.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 회로도 검사해보세요! 그러면 누가 우위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결벽증이 있어 말입니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하나 쉽게 남을 비방하는 분과는 몸을 접촉하고 싶지 않군요.”

세레나의 얼굴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 시간, 율리아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뒤에서 카인과 세레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독서 모임까지 시간이 촉박하지만, 자신이 떠난 자리에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까 궁금했던 탓이었다.

─지, 지금 제가 더럽다는 건가요?

율리아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동안 세레나와의 신경전에서 밀리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상대는 ‘마법’과 ‘자유’라는, 이쪽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법과 황궁 바깥의 경험을 주제로 자랑할 때마다 배 아파 죽는 줄 알았는데.’

얄밉던 상대가 속수무책으로 면박을 당하는 꼴을 보니 그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율리아는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세레나 님은 실력에 자신이 있고, 저는 황녀님의 재능에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곧 있을 폐하 앞에서의 마법 경연에서 황녀님과 실력을 겨루시는 것은?

당연히도, 사전에 아무 합의가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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