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204화 (219/227)

#204. 황녀 교습 (1)

“그 내용 모두 가짜 아닌가?”

집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황제가 빤히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둘러대는 건 소용이 없겠지.’

카인은 차분히 생각했다.

황제는 일전 이쪽의 손목을 잡아 회로를 살핀 적이 있다.

회로 내의 원소 비율와 마나의 양을 들여다보았다는 이야기.

「저자의 경우 회로 내의 전(電)계 원소와 빙(氷)계 원소의 비율이 완전한 동수를 가지는 경우에 속한다.」

때문에 논문 내용이 그럴듯하게 쓰인 거짓임을 알 것이다.

‘내 회로에는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주원소가 흐르고 있으니까.’

“맞습니다. 역시 꿰뚫어 보셨군요.”

이중 원소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원소 친화성’ 덕.

‘카인’을 포함하여, 작품 내 단 3명의 인물에게 밖에 부여하지 않았던 최상급 특성.

“알 수밖에 없지.”

황제의 나직한 한 마디.

순간 집무실 내 모든 원소의 비율이 급격히 치솟았다.

원소 각각의 색채가 뚜렷해지며 프리즘을 흩뿌린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야 이 정도는 쉬운 일이니까. 굳이 비율 같은 조건을 맞추지 않더라도 말이지.”

“…….”

‘이중’ 원소장 따위는 아득히 넘어섰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십사 중’ 원소장이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고개를 들게. 잠깐 허락하지.”

카인은 고개를 들어 또 다른 ‘원소 친화성’ 특성의 소유자인 황제를 보았다.

“내가 자네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율리아와 아시모프의 일도 잘 해낼 거라 믿네.”

황제 입장에서 카인은 몹시 흥미롭고도 탐이 나는 인재였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시험을 던지는 족족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

가령 아이타르의 반대를 꺾고 교사 자리를 쟁취한 일.

‘그 늙은이 고집 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무언가 감명을 주었다는 얘기겠지.’

아이타르는 기본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타인의 희생을 밑바탕으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앙숙인 라이티노에 한해 비정상적인 적의를 드러낼 뿐.

신세계 프로젝트에 아이타르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설득될 리가 없었다.

그것을 넘어, 세력을 꾸려 프로젝트에 저항해올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이 라이티노 쪽 인물인 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반대였다면 아이타르와 요한을 떼어놓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여야 했을 터였다.

“폐하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이번 일도 잘 마무리 짓는다면 상으로 귀한 이야기 하나를 해주겠네.”

실로 마음에 차는 인재였다.

관찰과 검증이 아직 온전히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

“이쪽입니다.”

카인은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회랑을 걸었다.

멀리 2황녀 율리아의 별채가 보여왔다.

“대저택이군요.”

“예. 황자와 황녀님들 중 율리아 님의 별채가 가장 큽니다.”

분수와 미로가 있는 거대한 정원을 지나 저택 문 앞에 도착했다.

끼기긱─

“요한 키리프 남작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중첩된 목소리가 울렸다.

양옆으로 도열한 수십 명의 사용인이 카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사용인들이 만든 긴 통로.

그 끝에 드레스를 입고 부채로 입을 가린 율리아가 서 있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님.”

앞에 다가온 카인에게 율리아가 손등을 내밀었다.

“…….”

눈처럼 새하얀 손등.

의도는 충분히 알아차렸다.

손등에 키스해달라는 것이다.

‘허례허식을 챙기는 성격은 아닐 텐데.’

손등 키스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존경과 헌신의 의미를 담아 하는 것이 보통.

허나 율리아가 이쪽에게 ‘존경’이나 ‘헌신’ 따위를 바라진 않을 터였다.

황궁 ‘수색’과 ‘탈출’을 조건을 내세운 계약 관계에 불과하니까.

카인은 흘긋 시선을 돌렸다.

중앙 계단 옆쪽.

율리아 또래의 소녀 3명이 2층 난간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율리아와 같이 드레스와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차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시선들을 피했다.

별채에 놀러 온 귀족 영애들이리라.

‘…알만하군.’

친구들 앞에서 화제의 인물인 ‘요한’과의 친분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황궁 내의 암투 속에 살아남아 온 소악마라도, 그 나이대의 감성은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율리아에게 다시 시선을 돌린 카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이벌들입니까?”

“꾸미고 온 것들 봐요. 어떻게든 나한테 안 지려고.”

그녀가 생긋 웃었다.

“건방진 년들이.”

“…….”

앞으로 황궁에서의 활동영역을 넓히려면 율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정도 연극에 어울려주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인은 율리아의 손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기품있는 몸짓으로 손등에 입을 맞춤으로써 10대 후반 소녀의 과시욕을 충족시켜 주었다.

고개를 들자 만족스런 얼굴을 한 율리아가 보였다.

“고마워요. 가요. 교습에 할당된 시간이 많지 않아요.”

주 3회 2시간씩.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시간이었다.

율리아는 카인의 손을 잡아끌어 중앙 계단을 올랐다.

그 과정에서 난간에 모여 있는 소녀들과 마주쳤다.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들 있어요. 교습이 끝나고 돌아올 테니까요.”

“다녀오세요. 저희끼리 다과를 즐기고 있을게요.”

대답을 한 건 무리의 중심으로 보이는 갈색 머리 소녀였다.

율리아와 갈색 머리 소녀가 서로를 응시했다.

둘 다 눈은 웃지만 입꼬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갈색 머리 소녀가 카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반가워요. 요한 키리프 남작님.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로테 가문의 세레나라고 해요.”

진심 어린 미소.

율리아를 볼 때와는 달랐다.

‘로테 가문이라.’

대대로 수준 높은 마법사를 배출해온 명문가였다.

가문의 수장인 바이퍼 로테 후작은 황궁 직속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저도 마법에는 참 관심이 많답니다. 개인 교사가 따로 있어 마탑에 입학하지는 않았지만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도 요한님에게 교습을 받아보고 싶네요.”

다분히 율리아를 의식한 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신화에 가까운 업적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인물이니 요한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나중에 따로….”

“가요. 시간 없어요.”

율리아가 세레나의 말을 끊고 카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세레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지만, 율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탁. 탁. 탁.

계속 계단을 오르자 소녀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의외군요.”

“뭐가요?”

“황녀님이 저런 다툼에 어울리는 것이.”

율리아는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사용인이 한 명도 없는 최상층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자극이 없거든요. 이런 다툼에라도 끼지 않으면.”

율리아는 복도에 앞서 나가더니 카인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포옹을 하듯 양옆으로 팔을 뻗으며 말했다.

“난 말이에요. 집중하고 몰입할 것이 필요해요. 잠시라도 고개를 돌렸다간 이 저택을 가득 메운 답답함과 지루함에 잡아먹히거든요. 사실상 죄수나 마찬가지란 현실이요.”

복도 벽면에는 액자가 가득했다.

역대 황족 구성원들의 초상이 복도를 지나는 이들에게 감시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4황자 아시모프의 별채에도 이런 복도가 있었지.’

황제의 지시라고 했다.

황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수시로 상기하기 위함이라고.

허나 그보다는 중압감과 부담감을 더 많이 느낄 터였다.

“갇혀 지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감옥에라도 갇혀본 적이 있나 보네요?”

율리아가 농담을 던지며 깔깔 웃었다.

카인이 한때 죄수였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황궁에서 내가 보이는 대부분의 모습은 연기에요. 남의 눈엔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거든요.”

율리아는 자신의 속마음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사실 우울하고 짜증 날 때가 대부분인데.”

카인은 그 모습이 이제껏 그녀가 앓아온 고독에 대한 반작용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적인 황궁 내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을 터였다.

어쨌든 ‘동맹’이기에 어느 정도 이쪽을 신뢰하는 것이리라.

혹은 ‘외부인’이기에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상관없다는 것일 수도.

“괜히 침울했다간 폐하가 정신과 의사를 붙이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귀찮게 말이에요.”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나 보군요.”

“아주 어릴 때요. 지금은 아니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율리아의 정신적 피폐는 다름 아닌 황제의 비틀린 소유욕 때문이었으니까.

“아! 아까 걔네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진짜예요. 수시로 바깥 이야기를 해서 약을 올리거든요. 친교를 유지하라는 폐하의 명만 아니었다면 진작 연을 끊고 저택에 발도 못 들이게 했을 텐데.”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 사이.

현재는 묘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복도 끝 나선 계단에 다다랐다.

한참을 오르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누가 내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에요. 사용인들도 못 들어오게 하거든요.”

끼익─

단촐한 크기의 방이었다.

새하얀 벽지에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가구만이 놓여 있었다.

저택의 다른 호화스런 곳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병실 같은 느낌이군요.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까?”

17세 소녀보다는 임종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노인의 방에 가깝지 않을까.

“맞아요. 짐은 침대 아래에 다 챙겨놨어요. 탈출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사용인의 출입을 금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스레 황제에게 이야기가 들어가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끼익.

율리아가 문을 닫는 사이.

카인은 창가에 다가가 바깥을 보았다.

현재 위치는 저택 우측 지붕에 솟은 첨탑의 꼭대기였다.

층수가 꽤 높아 아래 펼쳐진 정원이 멀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시야 끝을 가로막고 있는 황궁의 외벽이 보였다.

등 뒤로 율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3살 때 저택을 증축했어요. 첨탑도 직접 설계했죠.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첨탑 높이가 낮더라고요.”

벽 너머 풍경을 보기 위한 그녀 나름의 시도였으리라.

카인이 몸을 돌려 율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첨탑은 낮지 않습니다. 황궁의 벽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뿐입니다.”

율리아가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고마워요. 내 탓이 아니라는 위로로 들리네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운석이 떨어지거나. 전쟁이 벌어지거나. 벽이 무너지는 상상이요.”

“폭발성 마약으로 벽에 구멍을 낸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현실성이 있군요.”

카인의 입장에서는 진지한 분석과 계산을 마친 판단이었다.

잠시 멍했던 율리아가 카인의 말을 이해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운석이나 전쟁이 현실성이 있어요. 차라리 폭약 쪽이 실현 가능성이라도 있지.”

“족히 4년은 걸렸을 겁니다. 재료를 모으는 속도와 벽의 강도를 고려하면.”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율리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됐고. 마법 가르쳐줘요. 나 많이 기다렸어요. 그날 이후 혼자 마법을 사용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율리아의 손바닥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원소 운용은 기억하고 계신 것 같군요.”

“당연하죠. 내가 얼마나 마법을 배우기를 원해왔는데요.”

카인은 율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입을 열려던 때에야 다음 문장을 뱉었다.

“먼저 묻겠습니다. 황녀님은 벽 바깥에 나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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