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이중 원소장 (3)
“튜링 교수님이 논문의 저자라면 이 문장도 증명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돼! 난 저런 문장을 쓴 적이 없어!”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 문장이 누군가 덧붙여 썼다는 말씀입니까?”
“그, 그래! 그렇다고! 내가 쓴 문장이 아니야!”
튜링의 반말에 주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작 본인은 잔뜩 당황하여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상하군요. 논문의 다른 부분과 필체가 완전히 동일한 것 같습니다만.”
요한의 말에 공감을 표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튜링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자.
그다음엔 어떻게든 될 것이다.
“경찰을 불러 필체 대조를 해보면…!”
“튜링 교수.”
요한의 싸늘한 목소리에 튜링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표정 역시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 모습에, 장내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나? 적당히 말을 맞춰주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어, 어, 그게 말이오….”
얼음송곳이 몸 곳곳을 꿰뚫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며, 유예되었던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상대가 바로 누구인지.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거대한 포식동물 앞에 선 기분.
상황이 주는 중압감과 두려움에 이가 다닥다닥 부딪쳤다.
정신은 아득해져 갔고, 결국 머릿속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으아아아─!!!”
튜링은 괴성을 지르며 세미나장 출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문 바로 앞에 다다른 순간.
파직!
허공에서 인 전류가 튜링을 덮쳤다.
바닥에 쓰러져 부르르 몸을 떠는 튜링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 찢어 죽일 쥐새끼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우리 요한 논문을.”
라이티노였다.
짙은 분노로 이를 까드득 대며 말을 끊어 뱉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남의 지적 재산을 탐하려 한 죄. 마탑 학칙에 의거하여─.”
라이티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번쩍이는 전류의 창이 역수로 들려 있었다.
교수들은 얼굴이 창백해져 감히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형!”
파지직!
창이 떨어지는 순간.
다른 장로들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라, 라이티노 님! 진정하십쇼!”
“마탑에 그런 학칙 없습니다! 사형이라뇨!”
방호를 펼쳐 튜링을 보호하려 했지만 라이티노의 동작이 너무도 빨랐다.
끔찍한 광경을 예상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푸스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얼음 방벽에 막혀 사그라지고 있는 전류의 창이 보였다.
“원소장…?”
“…장로님들 것인가?”
사람들은 대기 중 원소 농도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빙(氷)계 원소와 전(電)계 원소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져 있었다.
두 원소가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
그 아름다움에 순간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이타르 장로님 것 같은데….”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타르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멀뚱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쉽군. 라이티노 녀석이 사고 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헌데 이 원소장은….’
아이타르는 입맛을 다셨다.
앙숙의 입지가 약화 될 것을 기대해 아무 행동도 않고 있었다.
빙(氷)계 원소는 아이타르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라이티노를 보았다.
“마탑에 사형은 없다니까요!”
“없으면 지금부터 만들면 되지! 놔! 이거 안 놔?”
라이티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장로들.
모양새로 보아 전(電)계 원소 역시 라이티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라이티노 님.”
시선을 한데 받은 요한이 좌석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라이티노 앞에 도착하여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튜링 교수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는 아니지요. 경찰에 넘기면 그에 맞는 처벌을 받을 겁니다.”
라이티노는 요한과 튜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천천히 흥분이 가라앉는 듯하더니, 곧 헛기침을 삼키며 말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대기 중의 전(電)계 원소와 빙(氷)계 원소를 휘저으며 말했다.
“논문의 주인이 저라는 사실은 더 이상 입증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지금부터 질의응답을 받겠습니다.”
***
“회로 내의 원소 비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방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세미나장 내의 열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요한 교수님께서는 이중 원소장 운용 시 가장 큰 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언제부터 이중 원소장 운용이 가능하셨던 겁니까?”
질문은 끊임없이 쏟아졌고, 요한은 막힘없이 답변을 해 나갔다.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진 질의응답.
허나 누구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면 오늘이 지나도 세미나가 끝나지 않겠는걸.’
아이타르는 필사적으로 손을 드는 교수들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래야 할 터였다.
‘이중 원소장’ 논문 주인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가 앞으로 또 올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아쉽구만. 아쉬워.’
어쨌든 교사 자리는 확정적으로 요한 교수에게 넘어갈 것이다.
저기 맥케란 교수는 이미 경쟁을 머릿속에서 지운 듯 선망 어린 시선으로 요한 교수를 보고 있지 않은가.
‘둘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오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아이타르는 튜링과 헤이먼이 경찰에 연행되며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맥케란 교수도 한패야! 저자도 한패라고!」
그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별다른 물증이 없어 헛소리로 치부되기는 했지만.
요한과 맥케란 교수가 처음부터 한마음을 먹었거나.
아니면 맥케란 교수가 나중에 요한 교수에게 붙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두 교수가 서로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구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두 젊은 천재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시대는 변화했고, 자신은 지금 그저 나이 든 늙은이일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자신은 마법계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초신성의 탄생을 목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세미나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요한의 논문은 마탑의 학술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되었다.
마법계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단 며칠 만에 전체 논문 중 가장 높은 열람 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요한의 대저택 앞에 텐트가 늘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저기 요한 키리프다! 붙어!”
“황녀님의 개인 교사로 입궁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요한 교수님! 논문 3페이지 2단락에 있는 내용 말입니다!”
기자들 사이에는 교수들도 끼어 있었다.
연구실 앞에 진을 치는 것이 보통.
하지만 성질 급한 이들은 체면 구기는 것을 무릅쓰고 저택 앞에 대기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답을 얻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질의응답은 세미나에서 끝났습니다. 남은 질문은 다음 논문에서 한꺼번에 답하겠습니다.”
모든 질문을 그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으니까.
끊이지 않는 질문을 하나하나 모두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논리적으로 이해는 되었다.
요한이 발표할 다음 논문에 기대감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전혀 해결되지 않아,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이 문장에 대한 해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있소!”
“이것 하나만, 이것 하나만 답변해주시면 안 됩니까?”
교수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감히 요한 곁에 달라붙지는 못했다.
요한 특유의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옆에 딱 붙어 있는 호위 때문이었다.
“너무 달라붙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용모를 다시 한번 바꾼 에스텔이었다.
그녀는 기자나 교수가 가까이 올 때마다 검집에 손을 올려 그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끼익─
두 남녀 앞에 황실의 문양을 가진 차량이 멈춰 섰다.
차량 기사가 내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요한 키리프 님. 황제 폐하의 부름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두 남녀를 태운 차량이 황궁 방향으로 사라지고, 자리에 남은 이들은 멍한 시선으로 차량의 뒷모습을 좇았다.
차량은 오래지 않아 황궁에 도착했다.
카인은 에스텔을 밖에 대기시킨 뒤 홀로 황궁 본채에 진입했다.
“안녕하십니까. 요한 키리프 남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요한 키리프 남작님.”
안내를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곳곳마다 사용인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았다.
그간의 업적들 덕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황궁 사용인들 사이에도 익히 퍼져 있었다.
위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역대 황실 구성원의 초상화가 걸린 회랑을 지나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끼기기기─
문이 열리고 순백의 공간이 나타났다.
카인은 중앙에 놓인 책상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뒤편에서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의 영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그간 일이 바빠 부르지 못했네.”
“잊지 않고 불러주신 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인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향해 황제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먼저 국경에서 고생이 많았네. 아벨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제국의 미래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에서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자신을 국경에 보낸 이유가 일종의 ‘시험’이란 점을 카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를 단번에 몰아내는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을 터.’
시험은 충분히 통과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내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가 본 아벨은 어땠나?”
“야망. 그리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지도력과 결단력을 포함하여 전장에서의 실무 능력이 돋보였으며….”
카인은 아벨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평가를 이야기했다.
아주 세밀하게.
오랜 시간 그 인물을 지켜봐 온 것처럼.
“단점은 없었나?”
“상황에 따른 유동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확하군. 자네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일세.”
다시 사각거리는 펜 소리.
“논문은 읽어봤네. 아주 마법계를 뒤집어 놨더군.”
“부족한 글이 과분한 관심을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앞에서 겸양은 떨지 않아도 되네. 자네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보게.”
카인은 잠시 고민하는 척 일부러 대답에 뜸을 들였다.
“당연히 큰 관심을 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마법계 역사에 없던 혁신적인 내용의 논문이라 생각합니다.”
황제가 돌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다 웃음기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일세.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자신감. 진정 실력 있는 인물이란 증거지.”
황제가 남은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앞으로 내 앞에선 굳이 겸손 부릴 필요 없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논문의 내용 말일세. 이중 원소장이라고 했지. 몹시 흥미로웠네. 그런데 말이야.”
순간 펜 소리가 멈추었다.
“그 내용 모두 가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