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이중 원소장 (2)
“그래도 자리에 나온 걸 보면 뭔가 준비를 해오긴 했나 봅니다.”
튜링 교수가 옆자리에 앉은 헤이먼 교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논문을 도둑맞았는데 그걸 공론화하지도 않고.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습니다.”
헤이먼이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혹시 요한 교수가 범인이 우리인 걸 눈치채고 흉계를 꾸민 건….”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일 처리는 완벽했으니까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도 걱정할 건 없습니다.”
튜링. 헤이먼. 맥케란.
셋은 ‘공범’으로서 역할을 분담했다.
41층 전체의 CCTV를 마비시키는 일은 맥케란이.
요한의 연구실 카드키 사본을 구하는 일은 헤이먼이.
연구실에 있는 ‘논문’을 찾아 훔치는 일은 튜링이.
그 과정에서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요한 교수에게 ‘심증’은 있더라도 ‘물증’은 없을 거란 얘기였다.
“지켜보기나 합시다. ‘저작물’ 없이 어떻게 발표를 하는지.”
튜링은 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요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분위기군.’
최근 수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 발표자이기 때문이리라.
‘이중 원소장이라고. 내용을 보고 정말 놀라긴 놀랐지.’
회로 내에 흐르는 2종의 주원소.
비율이 완전히 동일할 시 이중 원소장 전개가 가능하다는 이론.
처음 보았을 땐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생각했지만, 기술된 내용은 몹시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증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따로 보관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후에 내용을 바꾸어 우리의 공동 저작으로 발표한다면….」
맥케란 교수의 제안이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빛났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완벽범죄를 위해 불태우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지만, 금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변경된 의견을 모았다.
“반갑습니다. 원소학과의 요한 키리프 교수입니다.”
좌중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확인한 요한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발표할 논문의 제목은 ‘인간의 성장동력으로서의 열등감과 계급에 따른 극복 방식의 차이’입니다.”
조수 하나가 단 위로 올라와 요한에게 논문을 건넸다.
튜링과 헤이먼은 순간 흠칫했지만, 제목을 듣고 이내 안도했다.
‘그런데 열등감이라고? 그게 마법과 관련이 있나?’
발표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계급과 선민의식은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꽤나 도발적인 내용의 논문이었다.
“이런 이일수록 스스로의 발전보다는 타인을 끌어내리는 식으로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특히 자리에 있는 대다수 교수가 높은 계급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하면.
오래지 않아 웅성거림이 생겨났고, 교수 하나가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논문의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고, 자료 역시 뒷받침되어 설득력이 높다는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게 마법과 관련된 내용인 겁니까?”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논문의 노골성에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논문 자체는 마법과 관련이 없습니다. 분야를 따지자면 마법보다는 사회과학에 속해야겠지요. 하지만 제가 이 논문을 이 자리에서 발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장내 모두가 다시 한번 숨을 죽였다.
“논문 내용을 입증할 표본 하나가 마탑 내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교수’들.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려 시도했다는 말입니까?”
“예. 인간이 모이는 곳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죠.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표본이 워낙 흥미로워 말입니다.”
다시 나타난 조수가 요한에게 테이프 하나를 건넸다.
외관상 CCTV 녹화본임이 분명하였고, 튜링과 헤이먼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아니겠죠?”
“아닐 겁니다. 해당 시간에 41층 전체의 CCTV는 멈춰 있었습니다.”
요한 교수와 친분을 쌓은 맥케란 교수가 연구실 내를 살피며 개인용 CCTV가 없는지 확인을 마치기까지 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
말과 달리 튜링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려오고 있었다.
딸칵.
테이프가 삽입되자 스크린에 영상이 출력되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연구실이었다.
“누구의 연구실이지?”
“창밖 풍경으로 봐선 층수가 꽤 되는 것 같은데요.”
한 줄기 식은땀이 튜링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직접 들어갔던 장소.
알아보지 못하려야 못할 수가 없었다.
─삐빅.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인물이 나타났다.
튜링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법을 시전한 것은 그와 동시였다.
화륵.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불덩이가 스크린을 향해 날아갔다.
허나 중간에 생겨난 2개의 얼음 결정에 의해 그 자리에서 막혀 버렸다.
“튜링 교수! 무슨 짓입니까!”
“맙소사. 지금 이게 무슨….”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튜링의 귀에 지금 다른 이들의 말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맥케란 교수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빙결 마법의 원소가 날아온 방향은 두 곳이었다.
요한 교수와 맥케란 교수 쪽.
그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당해버렸다.
결국 맥케란 교수는 요한 교수에게 붙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득.
튜링은 맥케란을 노려보았다.
맹약을 맺지 않은 건 먼저 신뢰를 내보이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자신이 있기 때문도 있었다.
자신이 본 맥케란 교수는 분명 야망이 있으며, 그를 위해 거친 수단도 사용할 준비가 된 인물이었다.
‘헌데 믿음을 이런 식으로 저버린다고.’
튜링이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이 스크린엔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연구실에 들어와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증거는 없어.’
튜링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자리에 앉았다.
마법을 날린 건 좋지 못한 판단이었으나, 후에 어떤 식으로든 둘러댈 수 있었다.
결국 논문을 훔친 범인으로 입증되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저게 누구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글쎄요. 장소는 아마 요한 교수의 연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스크린 속 남자는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두꺼운 파일을 품에 넣고 연구실 밖으로 사라졌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이틀 전, 제 연구실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하려던 본래 논문을 도둑맞았습니다.”
요한의 손가락이 높이 들어 올려졌다.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한 사람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바로 마법공학과의 튜링 교수에 의해서 말입니다.”
곳곳에서 헛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났다.
경악과 혼란스러움.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졌다.
튜링은 일부러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요한 교수, 무례하군요. 마법과 하등 관련 없는 내용으로 시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애꿎은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십니까?”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관계를 밝혔을 뿐입니다.”
“저는 당신 연구실을 방문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영상에 기록된 날짜와 시간엔 다른 장소에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튜링은 만약 경찰 조사가 들어온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알리바이까지 조작해둔 상태였다.
“원하시면 알리바이 조사를….”
“조작된 알리바이 말입니까?”
요한의 손짓과 함께 회의실의 뒷문이 열렸다.
외부인 몇 명이 등장해 단 위로 올라와 한 사람씩 증언을 시작했다.
“12번 거리 마, 마법용품점 주인 소프란입니다. 튜, 튜링 교수님에게 돈을 받고 시간이 조작된 영수증을 발행해드렸습니다.”
“마탑의 전자식 출입구 설치를 맡았던 데인입니다. 돈을 받고 41층에 있는 특정 연구실의 카드키 사본을 만들어드렸습니다.”
튜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쪽이 누구를 매수했는지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터다.
맥케란 교수가 정보를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리 쉽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적지 않은 뒷돈을 먹인 상태인지 않은가.
‘저 멍청이들이. 자기들도 처벌받을 수 있단 사실을 모르는 건가?’
허나 튜링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재력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일은 그보다 요한이 전문가라는 점.
그리고 두 업자는 그의 생각과 달리 영리한 선택을 내렸다는 점.
요한이 제시한 금액은 단위 자체가 달라,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마음이 들게 했으니 말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헤이먼 교수를 흘긋 보았으나, 넋이 나간 얼굴로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얼간이 같으니라고.’
달리 도움을 바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순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모두 조작된 상황입니다! 제게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시는 겁니까!”
튜링은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의 열연에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기 시작했다.
평소 평판과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었다.
“증거는 또 있습니다.”
요한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조수가 단 위에 올라와 그에게 논문을 건넸다.
“오늘 오전 중 튜링 교수의 자택에서 발견한 제 논문입니다. 금고에 보관되어 있더군요.”
“그거 가택침입인 거 아는─!”
튜링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말 자체가 논문이 자신의 집에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불법 여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찰이 직접 수색을 진행했으니까요.”
의심의 눈초리가 다닥다닥 꽂혔다.
겉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튜링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냈다.
논문은 모두 수기로 작성되었다.
또한 저자명이 아직 쓰여지지 않았던 상태였다.
“제가 쓴 논문입니다. 문제 될 게 있습니까?”
물끄러미 튜링을 바라보던 요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튜링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이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후에 필체를 대조하면 논문의 주인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당장을 모면해야 ‘다음’을 강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러는 요한 교수도 이 상황에 모든 책임을 질 수 있겠지요?”
“그러시군요. 저 역시 물론입니다.”
요한은 단 위에 비치된 기기를 이용해 논문을 스크린에 띄웠다.
그동안 튜링은 좌중을 돌아보며 논문의 내용을 설명했다.
“이중 원소장에 관한 이론입니다. 통념상 회로 내의 원소 비율은 반드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부러 스크린을 돌아보지 않았다.
실제로 튜링의 암기력과 이해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감명 깊게 읽은 논문이기에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막힘 없이 설명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을 가정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17페이지에 기술된 표본 A의 사례를 볼 때….”
요한은 말없이 논문 페이지를 넘겨 좌중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마치 튜링의 발표를 보조해주듯이.
그의 목소리 템포에 맞추어.
“요한 교수의 필체가 맞습니다. 전에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 튜링 교수가 내용을 완전히 암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튜링 교수의 논문일 가능성도….”
반응은 극명히 갈렸다.
분위기는 다시 한번 반전되었고, 자신감을 얻은 튜링이 계속해 발표를 이어갔다.
“이상입니다. 이중 원소장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영역이 아닙니다.”
장내엔 정적이 흘렀다.
분명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지금 박수갈채를 날려도 될지 알 수 없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내용을 아주 잘 숙지하고 계시는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가 공들여 ‘직접’ 작성한 논문이니까요.”
“직접이라. 재밌군요.”
“더 다듬어 다음 분기에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미완품으로 공개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누구 덕택에 말이죠.”
살얼음판 같은 정적 속에 두 사람의 대화가 흘렀다.
“정말 튜링 교수님의 논문이 맞다면 증명해보시죠.”
“증명?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더 증명한단 말입니까?”
요한은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논문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튜링이 전에 보지 못했던 문장이 쓰여 있었다.
「본 논문의 저자는 수집된 표본 중 유일한 특이체질의 소유자로서, 발표회에서 ‘이중 원소장’을 직접 시연해 이론을 증명하고자 한다.」
문장을 읽은 튜링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 허?”
“증명해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낙하하는 물방울처럼.
“논문 끝에 쓰인 이 문장을.”
그 파문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자리의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