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이중 원소장 (1)
덥석.
맥케란은 요한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상대의 평온한 얼굴을 보니 덩달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묵은 감정을 털어내신 듯 보여 저도 기쁘군요.”
“아, 예? 예.”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이 밀려오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 큰 성인이 남 앞에서 무방비로 우는 모습을 보인 꼴 아닌가.
하지만 부끄러움은 곧 다른 생각에 의해 잊혀졌다.
‘인간미가 없고 비정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요한 교수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것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유명인의 숙명이라 할 수 있었다.
추종자가 늘어나는 만큼 적도 생겨나는 법이니까.
소문을 퍼트린 이의 악의가 섞였을 것이나,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반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직접 겪은 요한 교수는 이제껏 만난 누구보다도 포용력이 넓고 대인배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래도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잠시 설전이 오갔다.
맥케란의 태도는 강경했으나, 요한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곤란하군요. 누군가에게 벌을 주는 걸 반기는 성격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벌주는 걸 반기지 않는다.
연일 최고 벌점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엘 렉스터가 듣는다면 기가 차 할 말이었다.
“어떤…?”
“후에 언제든 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는 겁니다. 제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계시니, 갚을 기회를 드리는 것이지요.”
맥케란은 생각에 잠겼다.
‘요한 교수님도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선 온전히 죗값을 치르고 싶지만, 상대가 그걸 원치 않아 보였다.
계속해 강권하는 것도 실례란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요한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후에 제게 어떤 요구를 하셔도 괜찮습니다.”
이후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
대부분 맥케란이 질문을 던지고 요한이 답하는 식이었다.
마탑에서의 교수 생활.
마법에 대한 관점과 생각.
각자가 준비 중인 논문.
그밖에 맥케란이 요한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
“그럼 연구실에 있는 그림을 직접 그리셨다는 말씀입니까?”
“예. 작은 취미 중 하나입니다.”
대화를 나누며 연신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모두를 수준 높게 체득한 듯 보였다.
가슴 한켠이 뜨거웠다.
열등감이 아니었다.
이번 감정은 선망에 가까웠다.
“아, 그리고 쓰레기봉투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맥케란이 품에서 편지와 상자를 꺼냈다.
“요한 교수님 앞으로 쓰인 편지 같습니다. 직접 버리신 것은 아닐 테지만, 누가 본다면 불필요한 소문이 퍼질 수 있을 것 같아 챙겨두었습니다.”
“제가 버린 게 맞습니다.”
“예?”
카인은 편지와 상자를 받아들었다.
“3학년 중 엘 렉스터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준 선물입니다. 마법이 걸려 있더군요. 지금은 제가 해체한 상태이지만.”
편지와 상자를 열면 불길이 치솟도록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게 요한의 설명이었다.
‘엘 렉스터가 요한 교수에게 오기를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더니.’
맥케란은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상대가 요한 교수이니 어떤 못된 장난도 소용이 없겠지만, 편지에 설치한 함정은 정도를 넘어섰단 생각이 들었다.
“징계위원회를 소집하겠습니다.”
“벌점으로 충분합니다. 사춘기 때의 철없는 행동일 뿐이니까요.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부끄러움을 깨달을 겁니다.”
맥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대로의 지도법이 있으리라.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누고, 고개를 꾸벅인 뒤 연무장을 나섰다.
끼익― 탁!
‘생각보다 훨씬 인물됨이 괜찮은 자로군.’
닫힌 문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인은 아공간에서 팔찌 모양의 작은 장치를 꺼냈다.
「흡수 장치가 완성되었소. 지금 황제가 쓰고 있는 장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나를 흡수할 수 있소.」
데어 헤일리.
마탑의 전 수석연구원이자 황제에게 누구보다 강렬한 증오를 품은 인물.
그가 흡수 장치의 완성을 알린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당신이 흡수 장치를 이용해 어떤 일을 벌이든 상관없소. 대신 황제의 숨통만은 꼭 끊어주시오.」
단기 목표는 확실했다.
황궁 지하에 진입해 탱크의 마나를 모두 흡수할 것.
벽 바깥에 구축한 세력으로 황제와 전면전을 펼칠 것.
‘황궁 내에서 황제를 암살하는 것이 최선. 하지만 그의 무력을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은 낮다. 아무리 탱크의 마나를 흡수한다 해도.’
때문에 벽을 붕괴시킨 후 천천히 포위를 좁혀가는 방향을 확정시하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벽 안쪽에서 포섭한 모든 인물을 벽 바깥으로 함께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맥케란 교수는 포섭을 위해 평소 주시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황궁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힐 때가 머지않았다.’
카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연무장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몸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했다.
***
마탑 37층.
외진 곳에 위치해 평소라면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회의 공간.
“저희는 차라리 맥케란 교수님이 황궁에 입궁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3명의 교수가 모여 있었다.
“맞습니다. 마탑에 부임한 지 한 학기도 되지 않은 자가 황녀님의 교습이라니 말이 됩니까?”
맥케란은 자신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두 교수를 바라보았다.
마법공학과의 튜링 교수.
원소응용학과의 헤이먼 교수.
자기 분야에서 입지가 확고한 자들로, 이번에 함께 입궁 후보에 올랐던 이들이기도 했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탑에 돌아와 요한 교수에 대해 첫인상이 나쁘다고 말하기도 했지.’
맥케란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일단 잘 알았습니다. 헌데 엘렌 교수는 자리에 부르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아, 그게. 엘렌 교수는 정치 다툼을 싫어하는 편이고 제안을 수락할 것 같지도 않아서….”
헤이먼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을 들은 맥케란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제안을 수락할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튜링과 헤이먼 교수의 제안은 간단했다.
요한 교수의 논문을 찾아 제거해버리자는 것.
건축업자에게 뒷돈을 주어, 요한 교수의 연구실 카드키 사본을 구했다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연구실을 찾았던 학생이 요한 교수가 논문을 작성 중이던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한 교수는 출퇴근 때 아무 물건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걸로 유명하죠. 분명 연구실 내에 논문이 있을 겁니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을 이런 비겁한 수를 받아들일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
‘만약 요한 교수의 논문을 없애버린다면 내가 입궁하는 건 확정에 가까운 일이다.’
‘저작물’이 필요한 것이 세미나.
아무리 요한 교수라도 단시간 내에 논문을 다시 완성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니. 요한 교수라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일단 자신에겐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세미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맥케란은 두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41층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다, 요한의 연구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교사 자리를 무작정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에 가깝지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부딪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했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류 업무를 보고 있는 요한 교수.
책상 한쪽에 무방비로 놓인 그의 논문이 보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예. 앉으시지요.”
응접용 테이블에 앉자 커피포트와 잔이 날아와 제 역할을 수행했다.
쪼로록.
이쪽의 기호는 또 언제 파악한 것일까.
취향에 꼭 맞는 차가 잔에 채워지고 있었다.
서류철을 정리한 요한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잔을 들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요한 교수님의 논문과 세미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맥케란은 튜링과 헤이먼 교수가 건넸던 제안을 이야기했다.
한치의 내용도 빠짐없이 모두.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한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정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논문은 자택으로 가지고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맥케란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튜링과 헤이먼 교수 일은 제가 장로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치 없이 넘어가면 또 비슷한 일이 생길 겁니다.”
“어떤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선도의 시기가 지난 성인들이지요. 스스로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주변에서 도움을 줄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요한이 잠시 생각에 잠긴듯한 모습을 보였다가 말했다.
“장로님들께 보고를 드리는 것 대신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논문은 일단 연구실에 그대로 두고 ….”
계획을 듣는 맥케란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등에 한줄기 소름이 돋는 동시, 요한을 적으로 두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달았다.
“그,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군요.”
“예. 튜링과 헤이먼 교수에게는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맥케란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논의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서는 길, 불쑥 생각 하나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가 한 말을 모두 믿어주시는 겁니까? 튜링과 헤이먼 교수가 제게 했다는 제안들….”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요한이 빙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믿습니다. 맥케란 교수님의 말이니까요.”
순간 맥케란은 가슴 한구석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겨울학기가 끝나고 종강을 맞은 마탑은 고요했다.
몇 남지 않은 인적마저 함박눈에 묻혀, 정물화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끼익─
그때 정적을 깨고 차량 한 대가 마탑 앞에 멈췄다.
그것을 시작으로 차량이 줄지어 도착했다.
“프란체 교수님, 강의는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오늘 새 저작을 발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잘 지내셨나요! 이번에 강의 평가가 높게 나오셨다고 하던데.”
차에서 내린 교수들은 담소를 나누며 마탑 입구로 향했다.
황녀의 교사 자리에 관한 소식은 이미 교수진 사이에 널리 퍼진 상태.
화제의 중심은 단연 요한과 맥케란 교수였다.
“전 맥케란 교수가 황궁에 들어갈 거라 생각해요. 실적이나 공헌도를 고려하면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으니까.”
“오늘 요한 교수가 발표할 논문이 변수가 될 겁니다. 평범한 주제는 아닐 테니까요. 평소 워낙 비범한 모습을 많이 보였던 인물인지라.”
“이번 강의 평가에서 4.95점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던 걸요.”
“예? 역대 최고점 아닙니까? 만점에 가까운데, 그거 말도 안 되는….”
엘리베이터를 탄 교수들이 대회의실에 도착하고, 자리는 속속들이 채워졌다.
맨 앞은 장로들의 자리.
바로 뒤는 발표자들의 자리였다.
특별히 허가받은 몇 명의 성적 우수생 것을 포함하여, 50석의 자리는 금세 만석이 되었다.
“그럼 하반기 학술 발표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넓은 단 위에 마이크를 쥔 사회자가 세미나의 시작을 알렸다.
차례에 따라 교수들이 논문을 발표했고, 착석해 있는 이들은 평가지를 작성했다.
분위기는 엄숙하여 일체의 잡담은 없었으며, 발표가 끝날 때마다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다음은 실용전투학과 맥케란 교수님의 ‘마법의 실전 사용을 위한 원소 운용의 변용’ 저작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맥케란은 심호흡을 하고 단 위에 올라섰다.
“반갑습니다. 실용전투학과의 맥케란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발표하고자 하는 내용은….”
화면에 준비한 자료를 띄우고 차분히 발표를 시작했다.
“그래서 실전을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기존의 정석적인 원소 운용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깔끔하고 수준 높은 발표였다.
다른 교수들에겐 없던 박수갈채가 이어졌고, 질의응답도 꽤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짝짝짝짝!
맥케란은 단에서 내려오며 요한을 보았다.
이쪽을 보며 흡족한 발표였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은 요한 교수님을 모시겠습니다.”
맥케란은 자리에 앉아 뒤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튜링과 헤이먼 교수.
그들은 단 위로 향하는 요한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당신들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세미나 끝에 누가 웃고 있을지는 과연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