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학술 발표회 (3)
카인이 맥케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
맥케란은 아차 싶었다.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식으며, 이성적 사고가 돌아오고 있었다.
빈틈없기로 유명한 요한 교수가 아무렇게나 학생의 편지를 버릴 것 같진 않았다.
만약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다면.
편지가 버려진 데에 어떤 이유가 있는 거라면.
‘…너무 섣불리 행동했다. 어리석게도.’
다시 한번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야기라니. 황녀님의 교사 자리에 관한 것입니까?”
어쨌든 대답은 해야 했다.
맥케란은 말 돌릴 거리를 찾기 위해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요한 주위에 퍼진 전(電)계 원소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제가 요한 교수님의 원소장을 조금 관찰해도 되겠습니까? 다음 주 강의가 ‘전(電)계 원소장 대처법’이어서 말입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순발력 뛰어난 대답이었다.
실제 다음 주 강의 내용이 그러하기도 했다.
요한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순간 긴장했지만, 곧 이어진 대답에 안도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하지요. 교수님 앞에서 원소장을 시연하면 되겠습니까?”
“예! 예! 하시던 것을 계속하시면 됩니다!”
맥케란은 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가 앉았다.
혼란한 정신을 추스르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연무장 내에 펼쳐져 있는 원소장을 그제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라이티노 장로님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데. 범위가 조금 작을 뿐이지.’
그것도 장로급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로,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충분히 광범위한 원소장이었다.
연신 감탄이 나왔다.
파직! 파직!
대기 중에 흩뿌려진 고농도의 전(電)계 원소는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자리에서 즉각 고등급 전격 마법으로 화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원소장 내에서 전개되는 마법은 원소의 융합 속도가 빨라 ‘파훼’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똑같이 원소장을 전개해, 대기 중 원소 농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맥케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끓는 피가 빠르게 혈관을 타고 돌고, 확대된 동공은 요한의 매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 연무장에 들어왔던 목적은 잊혀지고, 다른 생각 하나가 뇌리에 자리 잡았다.
‘나와 요한 교수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벽 바깥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고 했으니, 거친 현장에서의 경험이 풍부할 것이다.
‘실전 역시 강하겠지. 클럽 카스라르고 사건으로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고.’
하지만 자신 역시 실력이 뒤떨어지진 않았다.
물론 대부분 ‘벽 안쪽’에서 대련과 독학으로만 쌓아온 실력이지만, 쏟은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최근엔 일부러 벽 바깥에 나가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벌이고 다니기도 했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자면 자신이 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가슴 속에 느껴지는 감정은 강력한 호승심이었다.
맥케란은 저도 모르게 뱉었다.
“요한 교수님.”
“예.”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저와 대련 한 번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순간 연무장 내에 있던 모든 전(電)계 원소가 요한의 몸으로 회수되었다.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시선.
맥케란은 당황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강하게 밀고 나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로 결심했다.
“순간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호승심을 참을 수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습니다.”
“솔직하시군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아 좋습니다.”
요한이 미소 지었다.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팔찌 둘이 날아왔다.
하나는 요한에게.
다른 하나는 맥케란에게 도착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과 마법의 출력에 제한을 두는 장비였다.
대련자의 능력치를 동등하게 조정하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마나의 양과 출력 레벨은 3단계로 하는 게 어떨까 싶군요. 혹시라도 큰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까요.”
“좋습니다.”
출력 레벨 3단계.
고위력 마법은 사용치 못하지만, 충분히 긴장감 넘치는 전투를 펼칠 수 있는 단계였다.
두 남자는 손목에 팔찌를 착용했다.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은 뒤, 특수 제작된 합금 타일로 이뤄진 대련장 위에 올라섰다.
“보조 도구를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각자 장비를 하나씩 사용하는 걸로 하지요.”
요한의 수락에 맥케란은 품에서 완드를 꺼내 들었다.
‘요한 교수는… 장갑?’
라이카와의 결전 당시 유적에서 얻었던 실크 재질의 검은 장갑이었다.
출처를 알지 못하는 맥케란은 잠시 당황했다.
보통은 자신과 같이 완드나 스태프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요한 교수가 사용하는 것이니 평범한 물건은 아니겠지. 라이티노 장로님과 친분이 두터우니, 라티움에서 제작된 물건일 수도 있겠어.’
자세를 바로잡고, 완드 끝을 요한에게 겨누며 말했다.
“승부는 한 사람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맥케란은 곧장 원소장을 전개했다.
그의 주원소는 화(火)계 원소와 수(水)계.
그중 회로 내 비율이 우세한 화(火)계 원소가 삽시간에 연무장에 퍼져나갔다.
‘됐다. 내가 조금 더 빨랐─.’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지척에서 생성되어 날아온 푸른 전류에 맥케란은 급히 방호를 전개했다.
파지직!
일회성으로 생성했던 약한 출력의 방호는 단번에 깨져버렸다.
‘대체 어느 틈에─.’
상대의 원소장 전개가 더 빨랐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방어에 성공했기에 앞으로의 전투는 자신에게 유리하다 할 수 있었다.
원소장의 격돌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승부가 갈렸다.
주원소의 상성.
사용자의 마나 운용력.
상성에 있어서는 자신의 화(火)계 원소가 요한 교수의 전(電)계 원소보다 우위에 있었다.
마나 운용력에 있어서는 요한 교수가 앞설 거라 생각하지만, 상성으로 충분히 격차를 메울 수 있었다.
파직!
예상대로 대기 중의 전(電)계 원소는 화(火)계 원소에 의해 경로가 막혀 확연히 느려진 결합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육안으로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방호를 펼쳐 막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짧은 순간.
맥케란은 상황 판단을 마쳤다.
생성되고 있는 전격 마법.
위력을 가늠해 딱 그에 맞는 방어도의 방호를 생성한다.
동시에 상성 우위에 있어 운용이 자유로운 화(火)계 원소를 움직여 결합한다.
화륵.
시전이 늦었음에도, 작은 불덩이는 전격보다도 먼저 생성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맥케란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요한 교수가 자리를 박차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황급히 화염구를 날렸지만 신체 강화를 몸에 두른 요한을 명중시키진 못했다.
쾅!
연무장 바닥에 박혀 폭음과 함께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틈에 맥케란 바로 앞에 도달한 요한이 크게 도약했다.
전등 아래.
요한이 역수로 쥔 얼음 단검이 빛났다.
끼기기긱─!
단검은 그대로 방호를 긁으며 내리 떨어졌다.
내구도가 다한 방호가 깨지고, 뒤편에서 완성된 전격 마법이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날아들었다.
파직!
맥케란은 몸을 굴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냈다.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얼굴 옆 연무장 바닥을 보았다.
검게 그을린 자국 위로 작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기척에 급히 몸을 일으켜 완드를 휘둘렀다.
챙!
완드와 얼음 단검이 격돌했다.
합금으로 제작된 완드이기에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다.
허나 문제는 공격이 속수무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챙! 챙!
맥케란은 힘겹게 공격을 막아냈다.
얼음 단검이 휘둘러지는 것과 함께 전격 마법이 불시에 날아들었다.
불가피하게 방호의 출력을 높였고, 마나는 급격히 소진되어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전투 방식이었다.
마법사들의 기동이라고 해봐야 ‘점멸’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마법과 육탄전의 병행은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영역이었다.
회로의 특질 차이로 마법사는 동급 마나유저에 비해 신체 능력이 뒤떨어졌고, 온전히 마법에만 집중해 전투를 벌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요한 교수는 여느 기사 못지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강화 마법을 몸에 둘렀다고는 하지만.
“크흑.”
단검과 전격 마법이 쉴새 없이 방호를 두들겼다.
바닥을 보여가는 마나에 맥케란은 패배를 직감했다.
‘원소 간의 상성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런 전략을 택한 건가.’
영악했다.
감탄이 나왔으며, 분했다.
‘결국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는 건가.’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순간 한 가지 생각에 번뜩 머리를 스쳤다.
일부러 공격을 허용해 팔찌를 깬다면, 마나 제한이 풀려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고위력 마법을 사용하면 단번에 요한 교수를 찍어 누를 수 있다.’
반칙에 가까운 행동이기에 결국 패배는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이 남자를 쓰러트리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또한 몹시 밀착한 상태이기에, 고위력 마법은 양측에게 큰 부상을 입힐지도 몰랐다.
아득.
그럼에도 갈등했다.
도덕성과 열등감이 끊임없이 반목하며 소음을 일으켰다.
콰드득!
방호를 깨트린 단검이 맥케란의 목을 노렸다.
살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목 바로 앞에서 멈추리란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실제 상황이라면 움직임이 더욱 매서워 기회가 없을 테지만….’
맥케란은 자연스런 움직임을 가장해 손목을 위로 들었다.
그걸 발견한 요한은 행여 상대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단검의 속도를 늦췄다.
파삭!
팔찌가 부서졌다.
순간 맥케란의 몸에서 다량의 화(火)계 원소가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불길이 연무장을 뒤덮었다.
***
화르륵.
시뻘건 불길은 한참 뒤에야 사그라졌다.
요한과 맥케란은 멀쩡했다.
푸른빛 찬연한 두 개의 방호가 두 남자를 각기 감싸고 있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맥케란은 얼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맥케란 교수님의 팔찌를 망가트렸군요. 그 탓에 순간 출력을 조절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 교수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분명 고의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쪽이 무안하지 않게 되려 배려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순간.
더 이상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털썩.
맥케란은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바닥에 댄 양팔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요한 교수님께 열등감을 느끼고 못된 생각을 품었습니다. 실수인 척 부상을 입히려 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사실을 퍼트려도 상관없습니다.”
감정이 복받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어갔다.
“사퇴를 원하시면 그렇게 할 것이고, 두 번 다시 마법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저열한 욕망은 한참 토해냈다.
끝내는 조금 후련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물론 요한 앞에서 여전히 고개는 들지 못했다.
“처벌 말입니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분노나 불편함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미 죗값을 치르신 것 같군요.”
“예?”
“잘못을 시인하고 벌거벗은 감정을 내보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형벌이라 할만한 일이죠.”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저….”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니까요.”
울컥하는 감정에 맥케란은 다시 한번 어깨를 들썩였다.
“고개를 드십시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민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저는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기분 탓일까.
목소리에 온화함이 느껴지는 것은.
맥케란은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